빗줄기가 유리창에 부딪히며 낮은 소리를 낸다. 처음에는 간헐적으로 떨어지던 빗방울이 어느새 일정한 리듬을 만들며 창을 두드린다. 그 소리에 바깥세상의 분주함이 잠시 멈춘다.
나는 봄비를 좋아한다. 여름비처럼 거세지도 않고, 겨울비처럼 쓸쓸하지도 않다. 그저 그 사이 어딘가에 머문다. 봄비는 부드럽게 내려 나뭇잎을 적시고, 댜지로 스며든다.
베란다 밖 에어컨 실외기 위에 놓아 둔 꽃잎이 진 철쭉의 잎사귀에 빗물이 고인다. 투명하게 빛나는 그 물기는 오래된 기억을 닮았다. 터지지 못하고 가만히 머무는 말 같기도 하고, 마른 가지 끝에 돋아난 새싹 같기도 하다. 눈을 떼지 못하고 한참을 바라본다. 비에 젖은 흙 냄새, 살짝 습해진 실내의 공기, 바람결에 섞인 풀잎 향이 서서히 내 주변을 감싼다.
며칠 전 일이 떠오른다. 4일간의 연휴가 시작되던 첫날이었다. 후배와 함께 광안리 해변을 걸었다. 길의 이름이 해파랑길인지 남파랑길인지, 혹은 둘 다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침부터 간간이 흩날리던 봄비는 이내 굵어졌다가 다시 가늘어지길 반복했다. 우리도 우산을 썼다 접었다를 반복하다가 언제부턴가 그냥 비를 맞은 채 해변을 걸었다. 가녀린 바람에 해무를 뚫고 바다로 쓸리듯 내리는 비는 후두둑 경쾌한 소리를 냈다. 옷깃은 젖었고, 물은 운동화 안으로 스며들었다. 따뜻했던 몸이 차가워졌지만, 이상하게도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시간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그때는 그 감정이 외로움인지 평온인지 몰랐다. 지금 생각해 보면, 둘 다였던 것 같다. 그날의 나와 후배는 말이 없었다. 비가 두 사람의 마음을 은근히 채워가고 있었나 보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바쁘게 살다 보면 내 마음이 어떤지도 모르고 지내는데, 빗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나를 돌아보게 된다. 머릿속 복잡한 생각들이 비에 씻겨 나가는 느낌이랄까. 그러고 나면 정말 중요한 것만 남는다.
특히 봄비가 내릴 때면 그 느낌이 더 강하다. 거실에 앉아 빗물에 씻겨 더욱 선명해진 창밖 산등성이를 바라보다 보면, 마음속에 어떤 여백이 생긴다. 무언가를 서둘러 채우지 않아도 괜찮다는 생각이 드는 공간이 만들어진다. 그 여백 속에 봄비가 스며들어 자기만의 자리를 만든다. 그 자리에는 낯선 허전함과 따스한 다정함이 함께 머문다. 그곳에서 나는 오래간만에 솔직해진다.
빗소리는 각기 다른 표정을 하고 있다.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가늘고 경쾌하고, 배수관을 타고 흐르는 물줄기는 단단하고 낮은 소리를 낸다. 나뭇잎에 닿은 빗방울은 잎의 모양에 따라 다르게 튄다. 그런 차이를 귀로 듣고, 눈으로 따라간다. 마치 삶이 여러 결을 가지고 있다는 걸, 비가 알려주는 것만 같다.
베란다 문을 활짝 연다. 비의 냄새가 집 안으로 밀려든다. 어릴 적 마른 운동장에 빗줄기가 타닥일 때 나던 흙냄새, 비에 젖은 나무껍질의 향, 꺾인 나뭇가지에서 퍼져 나오는 초록의 냄새가 섞여 있다. 그 냄새는 지나온 시간의 단면처럼 다가오기도 하고, 지금 이 순간을 선명하게 살아내고 있다는 신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비에 젖은 도시의 풍경은 유난히 깨끗해 보인다. 물이 닿지 못했던 구석까지 닦아내듯, 건물과 거리와 사람들의 표정이 다시 깨어나는 느낌이다. 나는 소파에 걸터앉아 바깥을 바라본다. 말하지 않아도 괜찮고, 움직이지 않아도 괜찮은 시간이 주어진 것이다.
휴일 새벽, 다시 비가 내렸다. 이불 속에 누워 빗소리를 듣고 있는데, 어쩐지 그날은 집 안에만 머물고 싶지 않았다. 차를 몰아 내리는 빗속으로 나아가 물금 정수장 근처의 수변공원으로 향했다. 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강가에 차를 세우고, 트렁크 문을 열었다. 뒷좌석을 평평하게 접고 몸을 기대어 앉았다. 그렇게 창문 너머로 강물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들이 작은 원을 그리고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텀블러에 담아온 커피는 아직 따뜻했고, 새벽 공기는 서늘했다. 천장처럼 드리워진 회색 하늘 아래, 강물은 부지런히 흐르고, 물안개가 천천히 피어올랐다. 빗소리는 규칙적이면서도 예측할 수 없는 리듬으로 울렸다. 강물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하나하나가 만드는 동심원들이 서로 겹치고 지워지기를 반복했다. 그 모습이 삶과 닮아있다는 생각이 순간 스쳤다. 우리의 만남과 이별, 순간의 기쁨과 아픔이 그렇게 물 위에 퍼졌다가 사라지는 것처럼, 결국 모두 흘러가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물결이 사라진 자리에 또 다른 빗방울이 떨어지고, 새로운 파문이 일어났다. 끝나는 것 같지만 끝나지 않는, 멈추는 것 같지만 멈추지 않는 이 순환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어쩌면 그래서 비 내리는 새벽 강가가 위로가 되는지도 모른다. 내가 붙들고 있던 아픈 기억들, 놓치기 아쉬워 움켜 쥐었던 순간들도 이렇게 물 위의 파문처럼 흐르고 있다는 사실이, 그래서 하나하나에 너무 집착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내 안에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돌아오는 길, 와이퍼가 닦아낸 창 너머로 도시의 아침이 조금씩 드러났다. 사람들은 이제 깨어나기 시작했고, 봄비가 다녀간 자리에는 맑은 공기가 남았다.
봄비의 흔적은 여전히 내 안에 머물러 있다. 이따금 창밖으로 흩어지는 빗줄기를 바라볼 때면, 나만의 작은 비밀을 간직한 것처럼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우산을 펴고 걷든, 옷깃이 젖도록 비를 맞든, 차 안에서 빗방울이 창을 타고 흘러내리는 모습을 바라보든, 봄비는 언제나 내게 특별한 자리를 만들어 준다.
비가 그치고 맑은 하늘이 펼쳐졌듯, 내일은 또 다른 하루가 펼쳐질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봄비가 내게 남긴 고요함으로 충분하다고 나는 느낀다. 빗소리는 멈췄지만, 그 여운은 내 안에 남아 있다.
봄비가 준 쉼표 같은 시간을 통해 나는 다시 나를 만나고, 세상을 좀 더 따뜻하게 바라보게 된다. 그렇게 봄비는 찾아와 내 마음을 적시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