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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on Jaemin Mar 21. 2023

부차적인 것들 중에선 가장 중요한-4

-정지돈 소설의 윤리적 위상에 관한 에세이-

  3. 미래(?)의 책       


  집합의 가능성을 무람없이 부려놓는 글쓰기야말로 정지돈 소설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개성이다. 이러한 개성은 정보로서 선행하는 역사의 파편들을 데코럼 곳곳에 배치하여 서사적 맥락을 초과하는 의외성의 화학작용을 가시화한다. 한반도 최후 왕조의 마지막 황손 이구의 건축가로서 행적과 느슨하게 연결된 다양한 인물과 전후 모더니즘사조를 번다하게 오가는, 대표작 「건축이냐 혁명이냐」에서 그 진가가 확인된 바 있다.

 정지돈 소설은 실현되지 않은 그러나 역사 혹은 서사의 가능성을 내재한 정보의 편린을 무차별하게 펼쳐놓는다. 그 과정에서 모호해진 데코럼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어디론가 향하는 움직임(movement)이 된다. 의미와 답을 알 수 없는 가운데서 작동하는 데코럼은 그 과정 중에 지속되는 의지가 된다. “어떤 우연이 있고 우연들이 일어나면 그것을 우연이라 부를 수 있을까. 이미 일어난 일을 우연이라 할 수 있을까. 나는 말이 겹치는 걸 좋아하고 일을 생각하고 바라보면 어느 순간 멀리 떨어진 곳에서 서서히 일의 중력이 서로를 끌어당기는 게 보인다. 그러니 어디로든 가야 한다. 무엇이든 읽어야 하고 어떤 이야기라도 해야 한다.” 과거의 편린을 데코럼 사이에 삽입하여 ‘나’라는 데코럼의 의도를 움직임의 의지로 재구성하는 글쓰기 기술(art of writing)이 그렇게 작동하게 된다. 1970년대 한국을 방문한 일본인의 기록과 ‘나’와 ‘상우’ ‘한기’의 지루한 경주여행기가 중첩되고(「팬텀 이미지」) 영화사와 문학사 어디에도 그다지 중요한 것 같지 않은 고다르와 페넬로페의 만남이 과장된 만담이 되어 ‘나’와 친구가 떠난 시시한 여행과 뒤범벅된다(「주말」).

 이 생경한 소설적 구성은 사실 너무 완벽하게 성공적이라 문제이다. 정지돈식 소설적 구성은 서사와 역사가 가지 않은 길임이 분명하지만 굳이 만들 필요가 있는 길인지 한편으로 의심스러운 측면이 있다. 정지돈식 연결은 서사와 역사의 대안이라기 보단 그저 이 시대 소설 카테고리를 구성하는 소설적인 방법의 조금 더 원초적인 제스처로 읽히는 감이 있다. 독특하긴 하지만 소설로서 가능한 동시대적 개성 중 하나일 따름이라는 말이다. 아무리 다른 방식으로 움직여도 현재 소설이 처한 물적 조건 자체를 뛰어넘을 순 없다는 걸 증명한다고나 할까. 

  『작은 겁쟁이 겁쟁이 새로운 파티』(이하 『겁쟁이』)는 바로 이 한계 속에서 동시대 이후를 넘보는 작업이라 할만하다. 해수면 상승으로 미국과 중국이 무너지고 모든 이들이 각자도생 하는 2063년의 한반도라는 생경한 미래를 배경으로 류경호텔에 거주하는 불법이민자와 이민국 십대 무장강도, 20세기 한반도 최고의 문명사학자 무하마드 깐수가 마구잡이로 연결된 여정이 펼쳐진다. 총기소유가 상식이 되고 휴전선이 사라진 한국인의 일상은 현재 한국인의 그것과는 판이하다. 마음만 먹는다면 차를 몰고 서울에서 옌지까지 몰고 갈 수 있는 심상지리와 모두가 총을 품고 있는 가운데서의 인간관계는 분명 2010년대 한국인의 공통감각은 아니다. 

 그럼에도 『겁쟁이』에 구현된 2063년 한반도는 어딘지 모르게 익숙하다. 오늘날 한국인들이 마주하는 일상적인 사회문제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G2가 몰락하고 일본이 침몰한 대격변 속에서도 배타적 국민국가와 이민족 차별과 양극화는 사라지지 않았다. 현대문명을 파탄으로 내몬 환경재앙의 도래에도 사회구조의 대안을 구성하는 데 인류는 실패하고 살던 데로 살길 결정한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 서울에서 사느냐 지방에서 사느냐의 문제는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가 돼버렸고 짐의 모친 같은 하위 노동자의 삶은 청소로봇의 뒤치다꺼리와 감정적인 총격전으로 점철된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채 세계는 더 나빠졌다. 

 『겁쟁이』의 서사 안에서 온갖 것들과 조우하여 연결하는 약한 고리이자 데코럼인, 짐의 위상은 다음과 같다.     

  과거에 지은 건물이나 위락시설, 산책로는 낡았지만 그대로였다. 짐은 텅 빈 놀이터, 유원지, 공원을 걸었다. 아무런 의미도 기능도 없는 글. 짐이 걷기 좋아하는 곳이 그런 걸지도 몰랐다. 짐은 안드레아에게 같이 가자고 했지만 그는 너무 위험하다고 했다. 가지 마세요. 짐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시간이 나면 다시 인적이 드문 것으로 향했다.     

  『겁쟁이』의 짐이 2010년대 청년이었더라면 옛날 영화와 미술관을 전전하며 글을 쓰는 카페 웨이터처럼 사는 “인간-펜”을 꿈꿨을 터이다. 그러나 사회구조의 모순‘만’ 심화된 가운데 인생에 대한 기대나 야망 없이 배달 일로 생계를 꾸리며 글을 쓰며 살아간다. 자기만의 글쓰기를 구상하며 친한 지인조차 함께하길 저어하는 교외의 폐허를 전전하는 짐은 현시점에서 상상할 수 있는 거의 최악의 미래가 펼쳐진 가운데서도 정지돈식 연결의 글쓰기를 관철하는 근미래인의 표상이다. 그는 파국을 겪으면서도 사회와 인간의 인식이 바뀌지 않은 상황 속에서 변함없는 의지로 무분별한 연결을 가시화한다.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을 현시하는 ‘움직임’과 집합의 의지는 인간사회의 구조와 인식이 바뀌지 않았기에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다. “한번 생긴 것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라는 정지돈 소설세계를 관통하는 인상적인 잠언은 이 순간 단지 선행하는 정보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구성하는 인간사회의 구조 전체의 악무한을 포함하는 테제로 확장된다. 세계를 바라보는 인간의 관점이 바뀌지 않는 이상 정지돈의 데코럼은 이 특이한 위상에서의 집합을 향한 운동을 반복할 터이다.

 이토록 무모하고 한편으로 낭만적인 정지돈 소설의 의지는 위대한 구상을 관철하려는 선대의 현자나 예술가의 그것과는 또 다르다. 그것을 추동하는 몸의 정체는 사실 좀 의외인 구석이 있다. 소설의 화자들이 불확실한 시대에 갈피를 잡지 못하는, 너무도 평범한 2010년대 헤테로 남성 청년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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