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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on Jaemin Mar 30. 2023

부차적인 것들 중에선 가장 중요한-6

-정지돈 소설의 윤리적 위상에 관한 에세이-

   4. 부차적인 겁쟁이-(2)           


  이러한 태도는 정지돈 소설 곳곳에 산재하는, ‘나’라는 이름의 작은 겁쟁이가 취할 수 있는 모종의 윤리적 태도의 최대치다. 그렇게 정지돈은 역사와 서사의 자명한 일방통행로를 의심하는 ‘다른 사람’과 타인의 기억 그리고 예표의 흔적들을 배제하지 않는 다소 난폭한 구성의 운동을 향해 나아간다. 동시대에 대항하는 야심만만한 묵시록적 화학반응을 반복하는 무모한 충동과 겁쟁이 헤테로 남성의 데코럼이 공존한다는 건 의아하면서도 흥미롭다. 이 겁쟁이는 무분별한 집합의 현란함이 선사하는 혼란스러운 화학작용에 가려진 채 지금껏 그다지 주목되지 않은 부차적인 위상에 놓여 있다. 그가 전면에 나섰다면 조금 더 친절한 ‘문학적 효과’는 가능했을지 모른다. 정지돈 소설은 바로 이 부차적인 헤테로 남성의 데코럼과 그것을 흐트러뜨리는 흔적들 간의 영원한 줄다리기다. 그리고 그 경합 속에서 헤테로 남성의 데코럼은 간신히 패배한다. 불가해한 화학반응과 혼란스러운 정보의 파편들은 이 싸움이 남긴 폐허일지도 모른다.    

  이 ‘싸움’의 양상은 『야간 경비원의 일기』(이하 『경비원』)에서 보다 전면에 나타난다. 서울 스퀘어 빌딩 야간 경비원 아르바이트로 만난 사이버 아나키스트이자 국제야간경비원연맹 조합원을 자처하는 몽상가 조지(훈)와 스물다섯 살 남자 ‘나’의 느슨한 만남이 교차하는 가운데 ‘에이치’를 사이에 둔 시인 ‘이성복’과의 ‘글쓰기교실’에서의 지질한 인정투쟁이 반복된다. 이미 패배해 버린 ‘좌파적 기획’을 서민들에게 되돌려주려는 조지(훈)와 그의 동지들(?)의 무모한 시도는 종국엔 대기업의 소셜 마케팅으로 수렴된다. 예술과 현재에 대한 급진적인 사유의 편린들은 술자리에서 자기보다 한참 어린 ‘에이치’에게 플러팅을 시도하는 꼰대 시인에 대항하는 너절한 기싸움을 위한 ‘정보’로 전락한다. 야간 경비원 일용직을 전전하며 글쓰기 교실을 기웃대는 ‘나’는 자신의 지식을 어디다 쓸지 모르는 채 예술에 대한 망상과 처참한 말로의 급진적 미래기획이 무력하게 지속되는 서울 어디쯤을 배회한다. 세상은 이 모든 시도에 ‘실패’라는 답을 내린 상태이지만, ‘나’는 “문제를 푸는 건 끝이 아니다. 과정이다. 답은 과정”임을 여전히 믿는다. 자신이 집에 들어가는 순간에 마주하는 빈 건물에 야간경비원이 있다는 걸 상기하면서. “모든 큰 건물에 경비원이 있다는 사실이 건물을 지날 때마다 생생하게 의식되었고 나의 집으로 나의 집으로 마치 그것을 잊지 않으려는 듯이 길로 길로 그리고 집으로 속으로 중얼거리며 걸어 나갔다.”

 미래를 상상하는 온갖 사유와 연결의 가능성을 이미 손에 넣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지 너무나 오래되어 이것들의 사용법은 오래전에 잊혔다. 대안적 사유는 비좁은 판에서의 소모적인 인정투쟁이나 ‘급진’을 빙자한 홍보 수단으로 부지불식간에 동원될 따름이다. 『경비원』의 ‘나’에겐 (누군들 있겠느냐만) 이를 뒤집을 만한 역량이 없다. 그럼에도 ‘나’는 답을 포기하지 않고 그것을 과정으로서, 자신의 의지로 지속하려 한다. 이러한 의지가 끝내 향하게 될 곳이 어디 일진 모르겠다. 확실한 건 현재 그것은 그저 ‘나’와 세상 간의 작은 싸움일 거라는 사실이다. 이 싸움은 서사와 관련된 패러다임과 권력을 사이에 둔 현재의 주요 전장 어딘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대적으로 덜 시급한 소규모 국지전이다. ‘나’의 실존은 자신의 몸에 대한 타자의 권력과 통치의 문제에서 비교적 자유롭다. 심대한 트라우마도 보이지 않으며 미래에 대한 실질적인 ‘위협’도 없다. ‘나’의 싸움상대는 그저 지루하고 평평하게 지속되는 동 시대성이다. ‘나’는 이에 대항하여 현재를 주조하기 위해 배제되었거나 잊힌, 그저 흔적(trace)으로 남은 존재를 무차별하게 연결한다. 그러나 그것들의 용처는 알지 못한다. 극히 혼란스러운 모종의 화학반응만이 남겨진다.  

 이러한 정지돈의 ‘싸움’의 의의를 과대평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된다. ‘‘나’가 싸우듯이’ 모두가 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그저 이 과정을 지켜보면 된다. ‘도살장’과 ‘해부학 교실’ 어디쯤에서 이미 너무 많은 싸움이 일어나는 중이다. 정지돈의 소설은 오늘날 부차적인 전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테로 남성의 데코럼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구성의 부차적인 부분에 남겨두는 효과와 끊임없이 유동하는 동시대를 항해하는 난파선을 만들고자 하는 ‘작은 겁쟁이’가 상연하는 운동에의 의지는 부차적인 것들 중에선 가장 중요한 전장 중 하나라고 주장하고 싶다. 이 전쟁의 성패가 새로운 ‘미래’로 우리를 이끌어 줄진 솔직히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나’와 같은 부류의 데코럼을 품고 있는 이들에게 정지돈 특유의 구성과 구상과 결부된 부차적인 위상의 데코럼은 그들이 반드시 대답해야만 하는 시급한 윤리적인 딜레마와 무관하지 않다. 그들에게 정지돈의 싸움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닐 것이다.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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