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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on Jaemin Apr 06. 2023

혁명, 관찰자, 내면- 2

이미상, 『이중작가초롱』(2022) 서평

  2. 동시대적 내적자아의 다양한 초상

    

  독서행위의 근본적인 전환에 따른 ‘혁명의 개인화’는 시대의 변화에 참여했던 개인들의 자기 혁명으로 반복됐다. 프랑스혁명의 궁극적인 이상(자유·평등·박애)은 수없이 반복되어 온 변혁적 실천에도 불구하고 미완의 과제로 남겨졌다. 이러한 가운데, 책은 불균질 한 사적인 공간에서의 자기 혁신과 발견의 가장 유력한 매체가 됐다. 책을 만드는 원초적인 에너지인 글쓰기가 세계의 변화와 이에 감응하거나 반발하는 개인의 돌이킬 수 없는 사적 순간의 기록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문학은 모든 시대의 개인이 자신의 시대에 스스로 적정하다고 생각하는 방식에 따라 자기만의 내면을 임의적으로 조정해 나가는 불균질 한 과정의 형식이다. 이를테면 팀 오브라이언은 『줄라이 줄라이』를 통해, 세상이 바뀔 것이라는 작가 자신이 속한 68세대의 믿음이 내적인 자기 변혁의 가능성 정도로 축소-조정되는 양상을 포착한 바 있다. 이 소설에서 미국의 베트남 침공에 항의하면서 대안적 세계를 꿈꾸던 1960년대의 아름다운 영혼들의 삼십 년 후 동창회에서 각자가 마주한 초라한 내면을 그린다. 세계의 변혁을 위한 1960년대 청년들의 낭만적인 실천은 지지부진하게 좌절되고 이십일 세기에 접어들어 그저 사적인 추억으로 남겨진다. 1960년대 말에 열렸던 세계의 변화의 가능성이 닫힌 가운데, 변화를 믿었던 과거와 대면한다는 것은 그저 나의 전성기를 반추하는 철저한 사적인 행위로 귀결한다.

 나는 『이중작가초롱』의 혁명 또한 같은 선상에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양상은 팀 오브라이언이 포착한 68세대의 내면의 양상과는 다르다. 이미상이 포착하는 문학적 내면에는 누군가의 내적 고백에 참견하는 관찰자(spectator)들이 가득 들어차 있다. 내면을 구성하는 사적영역과 공적영역의 경계가 사라져 뒤섞여 상연되는 듯하다. 뒤에 살펴볼 어떤 소설이 구현하는 내면의 경우는 트위터 피드처럼 읽힐 정도다. 이에 비하면 『줄라이 줄라이』의 68세대들의 내면이 너무나 안온하고 고독하게 느껴진다.

 만약 이러한 정체불명의 글쓰기에 내면이라는 말을 붙이는 게 정당하다면, 그것은 디지털 소셜 미디어 시대의 내면 풍경의 문학일 터이다. 소셜 미디어를 매개로 끝없이 떠오르는 새로운 타입의 ‘나’의 확장, 갱신 그리고 운 나쁜 누군가의 ‘나락’이 일상이 된 세계의 문학적 자아.   이미상의 첫 번째 소설집의 흥미로운 지점은 이를 특정 시대의 내면이나 세태 차원에서 다루지 않고, 그것을 소셜 미디어 시대의 문학적 내면을 마치 1789년 이래 지속된 ‘혁명의 개인화’의 연장선상에서 다룬다는 것이다.     


  (1) 내적 자아의 참혹함     


   첫 번째 소설 「하긴」의 주인공 ‘나’는 한때 열혈 운동권 학출 출신의 중년 언론사 주필이다. ‘나’는 딸 보미나래에게 주말마다 한국 현대사를 전수하거나 함께 책을 읽는 일상을 꿈꾸는 ‘의식 있는’ 시민을 자처한다. 그러나 이러한 ‘나’가 상상하는 이상적인 부녀관계는 딸 보미나래의 지지부진한 학습 능력 탓에 요원하다. ‘나’는 자신의 딸이 “역사는커녕 한글 받침도 금방 익히지 못”하고 암기를 위해 괴상한 노래를 지어 흥얼대는 ‘머리가 나쁜 종자’라는 사실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한다. ‘나’ 부부는 이러한 딸의 상황을 ‘치료’ 하기 위해 ADHD검사 등 온갖 노력을 기울이지만 허사이다. 당연한 귀결이다. 애초 딸을 위한 부부의 모든 노력은 명백하게 그들 자신을 위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딸 보미나래를 대하는 ‘나’의 시선은 그녀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과 거리가 멀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고매한 의식과 사회적 지위에 부합하는 이상적인 부녀관계를 투사한 채 딸을 그 틀에 끼워 맞추는 행태일 뿐이다. 이는 ‘나’가 보미나래와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지는 않는다는 데서 알 수 있다. ‘나’는 시간과 비용을 아낌없이 투자하는 좋은 아버지인 연하지만, 그것은 결코 딸을 위한 게 아니다. 그가 기탄없이 대화를 나누는 상대는 딸이 아니라, 비슷한 계급과 의식 수준에 있는 동년배의 친구들 이를테면 그가 열등감을 느끼는 중년 남성 ‘문’ 같은 이들이다.

 ‘나’가 그에게 열등감을 느끼는 이유는 문의 딸 초롱 때문이다. ‘나’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어린 나이에 등단하여 반항을 일삼는 문의 딸 초롱과 보미나래를 비교하며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린다. ‘나’의 엇나간 열등감은 초롱의 소셜 미디어 계정 염탐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는 이상적인 부녀관계에 대한 음침한 상상으로 치닫는다.      


  한밤, 나는 초롱의 글을 읽으며 상상한다. 나를 육박하듯 빠르고 거칠게 공격해 오는 내 딸 초롱이. 코나에 몰린 나는 기분 좋게 당혹한다. 내가 키운 거한테 내가 먹힌다니. 나는 카이스트에 갈 석형의 딸은 하나도 아쉽지 않다. 초롱이 나의 이상이다. (중략) 멋지지 않은가? 우리가 부모에게 가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했던 것을 우리에게 가하는 새끼를 길러낸다는 것이.     


   남의 딸을 상대로 상상의 나래를 펴는 ‘나’의 행태에서 알 수 있는 건 그가 중증의 나르시시스트라는 사실이다. ‘나’는 자신의 딸이 자기 세대가 채 달성하지 못한 한국사의 한 페이지를 확실하게 넘기는 다음 세대의 주역, 다시 말해 바자로프적 인간이기를 희망한다. ‘나’는 딸 보미나래를 그 자체로 존재하는 인격체라기보다 자신의 뒤틀린 인정욕구를 채울 욕망의 대상으로 바라본다.

 ‘나’가 딸을 통해 투사하는 의식화된 부녀관계와 반항은 일견 정반대의 가치인 것 같지만, 사실 근대적 세대 의식 유형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동일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또한 세계의 변화에 열렬히 참여했던 전성기의 추억이 자기 변혁의 가능성으로 축소-조정된 행태를 암시한다는 점에서 앞서 언급한 『줄라이 줄라이』의 ‘혁명의 개인화’ 양태를 떠올리게 한다. 『줄라이 줄라이』의 늙은 68세대는 자신들의 황금시대가 철저하게 자기 사적인 문제임을 받아들이고 덤덤히 초라한 자신의 현실을 친구들과 함께 오롯이 추억하며 늙어간다. 이와 달리, ‘나’는 자신의 비루한 현상태를 자기 내적인 문제로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채 딸을 매개로 도약하고자 한다.

 이후 ‘나’는 그 대신에 자기가 이루지 못한 그럴듯한 아버지 되기에 딸을 동원하는 방편으로 보미나래의 본모습을 헛된 스펙으로 분칠 하기로 결정한다. 그리하여 보미나래는 대학입시를 위해 미국 모처의 정체를 알 수 없는 히피 공동체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한국에 남은 ‘나’는 딸이 보내온 영상으로 다큐멘터리를 대신 편집하면서 초롱에게 추사 한 것과 유사한 나르시시즘적 망상을 향유한다.     


  보미나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P 대안학교에 들어갔다. (중략) 보미나래는 포트폴리오를 위해 일 년을 휴학하고 미국의 에코 공동체에서 지내기로 했다. 공동체에서의 생활을 다큐멘터리로 찍어 청소년영화제에 출품해 수상한 뒤 경기권역 대학의 사회학과에 지원해 보기로 했다. 딸이 미국에 있는 동안 나는 시민미디어센터에서 영상 연출을 배울 예정이다. 혹시 아나? 우리 부녀가 야마가타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에 초청될지. 그런 생각을 했지만, 아니다.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연출에 내 이름은 빠져 있을 테니.

 (중략) 한 해 동안 딸은 해먹을 만들게 되었다. 영어를 못해도 되는 단순노동이라 다행이었다. 나는 딸에게 귀국할 때 해먹을 하나 사달라고 부탁했다. 서재에 매달아 놓을 생각이었다. 해먹에 누워 소설을 읽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때면 나도 나 자신을 속일 수 있을지 모른다. 딸이 공부를 못한 건 그저 다른 북소리를 듣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저능의 명분으로 얻은 미국도, 히피도, 에코도, 공동체도 나는 모두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지나간 혁명의 기호를 가득 채운 자의식과잉의 나르시시스트적 허영은 이를 보조하는 핵심 조연이어야 할 현실의 보미나래에 의해 철저히 파괴된다. 얌전히 유학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줄 알았던 보미나래가 임신 사실을 숨겨왔다는 게 드러나고 갑작스럽게 혹인 혼혈아를 출산한 것이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버지로서 현재 딸이 처한 상황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자기와 비슷한 수준의 또래 남성들 앞에서, 자신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이 참혹한 현실을 그럴듯한 설정으로 꾸며내기에 급급하다.     


  “응, 조지타운 로스쿨 다녀. D.C. 에 사는데 버지니아로 잠시 놀러 왔대. 우리 애가 주말마다 시내 커피숍에 갔는데 거기서 만났대. 애가 있던 에코 공동체에선 인터넷 사용이 금지됐거든. 사위 될 놈이 졸업하고 연방정부에서 일할 예정이다. 우리 애도 학교만 마치고 미국으로 들어가기로 했어.”     


  ‘나’의 일상과 사적공간은 딸의 방에서 풍겨 나오는 정체 모를 지린내와 원치 않던 육아로 실망과 고통스러운 나날로 채워진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딸과 대화하지 않는다. 대신에 자기 내면에만 존재할 망상으로 꾸며낸 수신자를 향해 절절한 편지를 보낸다. 소설 초반부에는 아내를 수신자로 쓰이던 언론사 논설위원 ‘나’의 격주 에세이는 갈수록 딸과 관련된 사위 ‘샘’이나 딸이 미국에서 사 온 해먹 같은 허구의 대상을 향한 뒤틀린 독백으로 채워진다.

 참혹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을 받아줄 ‘당신(thou)’을 찾아 헤매는 ‘나’의 행태는 그가 워너비인 혁명과 위대한 아버지 같은 낡고 낡은 시대의 낭만적 진정성(authenticity)에 사로잡힌 아름다운 영혼이라는 사실일 터이다. 「하긴」은 현재 자신이 정말로 해야 하는 일(딸과의 대화적 관계)을 내팽개친 채 딸의 출산으로 무너진 사회적 위신과 또래집단에서의 훼손된 자존심에서 회복되지 못한 중년 남성의 나르시시스트적 내면을 포착한 희귀한 사례다. 다 늙은 ‘나’의 때늦은 질풍노도의 독백은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다. 그러나 자신의 내적 충만함을 찾기 위한 그의 진정성은 우스꽝스러울지언정 의심할 이유는 없다.

 이 소설은 단순히 왕년의 운동권 세다 위선이나 현상태에 대한 희화화한 세태소설이 아니다. 시대의 변혁에 참여하는 아름다운 영혼의 실천들이 결국 ‘혁명의 개인화’로 수렴되면서 나타난 내적 고립과 변화의 문제를 포착한 소설이다. ‘나’가 내적인 아노미에 빠진 이유는 자기가 투신했다고 믿었던 과거의 혁명이 시간이 흘러 개인의 문제가 되었다는 사실을 직시하지 않았다는 데서 시작한다. 이를 위해 ‘나’는 자신의 내면에 허구의 관객을 상대로 고릿적의 이상적이고 의식 있는 아버지의 이미지를 유지하며 자신의 현실을 부인한다. 갑작스럽게 그의 인생에 출현한 혼혈아 손자는 그가 유지하던 자기애적 허구로 쌓은 성채를 단번에 산산조각 내는 궁극적인 타자일 터이다. ‘나’가 보내는 애처롭고 절절한 편지는 타자가 침입한 이후 이제까지 유지하던 내적 자기애에 따른 관성적인 정형행동(stereotypic behavior)이거나 현실인정 과정에 있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어느 쪽이라도 현재의 ‘나’에겐 그다지 위로가 되진 않을 터이다.

 「하긴」의 ‘나’가 끝내 실패한 ‘혁명의 개인화’에 따르는 현실과 내적인 화해는 이미상의 첫 번째 소설집을 떠받치는 가장 중요한 문제의식으로 읽힌다. 두 번째 소설 「그 친구」의 화자 규는 대안적 학술실천과 문화운동을 겸한 변혁의 실천이 사생활과 긴밀히 얽히면서 이를 유지하기 위한 내적인 타협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인물이다. 규는 왕년의 야학 활동 인연이 이어지고 있는 모임의 불성실한 회원인 지경과 규의 남편이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모임의 창립 멤버이자 사적인 명분도 있는 규가 애초에 모임에 불성실한 태도로 일관하던 지경에게 탈퇴를 요구한다고 뭐라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규는 오히려 지경의 탈퇴를 만류하며 지극히 불편한 감정을 느낌에도 불구하고 모임 안에서 지경과의 공존을 선택한다. 이는 자신을 ‘그친구’라 부르며 의식화된 자기 세대의 미덕을 과시하지만, 뒤에서는 불륜을 일삼으며 여자들만 남은 모임을 파투로 몰아넣는 남편에 대한 내적 수치심과 분노 때문이다.      


   남편은 떠들어댄다.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추문 끝에 살아남는 건 남자들이다. 지경을 쫓아내고, 얼마 안 있어 규도 모임에 나오지 못할 것이다. 남편은 끊임없이 말한다. 그친구, 예전엔 리버럴 하고 유연했는데, 이젠 계곡에서 양말도 안 벗어요.

 (중략) 그게 최악이었다.

 남은 자로서 남편이 마지막 말을 앗아가는 것.     


   이러한 선택을 한 규에게 펼쳐질 미래는 참담하기 그지없다. ‘규가 커피를 쏟으면 지경을 보고, 지경이 화분에 걸려 넘어지면 규를 보는’ 시선을 견뎌내는 상황이 펼쳐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를 감내하기로 한다. 세상의 변화를 위해 결성된 현재의 모임에서의 활동이 남긴 사적인 참혹함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규의 선택은 「하긴」의 ‘나’에게 펼쳐진 미래와 같이 참혹할 수밖에 없을 터이다. 그러나 도래한 현실을 끝까지 외면하면서 자참혹한 악무한으로 침전하는 ‘나’의 내면과 달리, 규는 참혹한 현실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자신에게 펼쳐질 미래를 직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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