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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on Jaemin Mar 15. 2023

부차적인 것들 중에선 가장 중요한-3

-정지돈 소설의 윤리적 위상에 관한 에세이-

  2. 메멕스라는 예표와 부차적인 존재(들)의 연결-(2)       


 (계속) 메멕스는 디지털 시대의 미래를 예건한 선구적인 가설이지만 정작 실현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디지털 시대의 예표(豫表, figura)라 할 수 있다. 구약에서의 절대적이고도 추상적인 구원의 약속이 예수의 육화라는 예견된 적 없는 방식으로 실현된 것처럼, 메멕스는 디지털 하이퍼텍스트라는 신약(New Testament)을 예견한 구약(Old Testament)의 위상을 체현한다. 「우리가 생각한 대로」와 「존 케이지의 대화」라는 두 편의 ‘메멕스 연작’은 디지털 시대의 예표로서 메멕스 시스템을 시도한다. 저장된 정보를 필요에 따라 편리하게 편집하는 메멕스의 하이퍼텍스트적 구상은 오늘날 무한히 펼쳐진 정보(information)와 기억(memory)을 널뛰기하는, 노드(node)를 가능한 많이 먹어치우는 허브(hub)의 이상과 대치한다. 메멕스의 궁극적 이상은 특정 시공간과 문화적 관습으로 제약된 인간에게 무한한 정보 접근과 이를 사용할 새로운 방법을 평등하게 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모든 창의적인 애플리케이션들의 꿈들이 세계의 모든 노드들을 되는대로 먹어치우는 플랫폼(platform)인 것과는 상이하다고 하겠다. 오늘날 허브(들)와 플랫폼이 하이퍼텍스트에 주목하는 건 그것 자체의 역량과 가능성이라기보다는 하이퍼텍스트가 가져오는 부수적인 효과 때문이다. ‘메멕스 연작’은 이들과 전적으로 불화하는 반시대적 하이퍼텍스트의 가능성을 추수한다. ‘메멕스 연작’의 운명은 아날로그 기술인 메멕스가 디지털 기술에 사장된 것과 마찬가지의 운명을 맞을 가능성이 높다. 플랫폼과 영향력 앞에 잊히고 패배할 것이며 운나쁘면 배제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하이퍼텍스트의 구상과 역능의 가장 원초적인 순간이 그 안에 서려있다.      

  어떤 사람들은 계속 모으고 어떤 사람들은 계속 버린다. 그러나 계속 버리는 사람들도 어떤 것을 모으고 모으는 사람들도 어느 순간 버리지만 지금은 스스로 버리건 모으건 상관없이 모든 것이 쌓여 있다. 정보는 예상치 못한 상태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사용자는 자신의 의지대로 정보를 모으고 버린다. 이때 정보는 의지나 지향의 선결조건이다. 개인의 의지는 정보에 의존한다. 영향력을 위시한 유튜버의 의지는 스스로를 허브로 삼아 링크를 축적하고, 넥플릭스가 기업가적 의지로 전 세계의 영상 콘텐츠를 싹쓸이한다. 선행하는 정보에 대한 정지돈의 의지는 이와 달리 메멕스라는 실패한 브라우저에 의존한다. 사이버네틱스 이론의 탄생의 순간(memex6), 이란여성의 자전거 탑승금지조치(memex8), 기후학의 일요일 효과(memex9), 타자기의 발명과 여성해방(memex14) 등이 기록된 인덱스카드(index card)가 무차별하고 무책임하게 나열된다. 여기서 읽을 수 있는 건 영향력 혹은 플랫폼으로의 의지(will-to-platform)와 전적으로 불화하는 하이퍼텍스트적 구성의 의지이다. 정지돈은 유튜버의 안티테제로서 시대와 불화하는 하이퍼텍스터다. 이는 첫 번째 작품집의 시대착오적인 인물 ‘장’이 내뱉은 광기 서린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아포리아와 연장선상에 있다. “장은 어리석은 질문이야말로 유일하게 가치 있는 질문이라고 믿었다. 어리석은 질문에는 답이 없거나 틀린 답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며, 이로써 질문은 질문이 아닌 의지가 되기 때문이다.” 메멕스적인 연결의 의지는 ‘인간은 각자의 세기를 산다’고 뻔뻔스럽게 말하며 볼셰비키와 사빈코프, 발터 벤야민과 러시아 혁명기를 2010년대 모스크바에서 모사하다 비명횡사한 ‘장’의 의지와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메멕스를 향한 정지돈의 의지나 2010년대 모스크바에서 ‘장’이 품은 혁명에의 의지는 각각 유튜브와 스킨헤드에 의해 배제된다. 이것들은 역사가 되지 못한 채 인류세의 한편에 흔적(trace)으로 남겨질 터이다. 시대와 역사 혹은 유행이나 대세로의 의지가 이런 흔적들의 의미를 박탈하는 데 성공했다 하더라도, 그들이 존재했었다는 사실까지 소거할 순 없다. 실현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존재했었다는 흔적까지 완전히 말살할 수는 없다. 그저 부차적인 것으로 역사 저편 이름 모를 문서고에 유폐될 따름이다.

 ‘장’과 ‘메멕스 연작’을 관통하는 시대착오적인 의지는 바로 이 부차적인 것들을 향한 호명과 연결의 의지로 읽힌다. 존재하는 것만으로 특별한 의미를 가질 수 없다. 그러나, 데리다가 어딘가에서 말했듯이, 모든 의미는 존재 혹은 존재했다는 흔적에서부터 발생한다. 흔적은 부차적인 것이지만 의미를 구성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이는 단순히 정지돈 소설의 테제에 국한되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선행하는 흔적이란, 의미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 건조한 모든 역사와 서사를 떠받치는 용골(龍骨)이다. 정지돈이 선사하는 낯선 소설적 효과는 건조가 끝난 방주가 아니라 여태까지 본 적 없던 형태의 방주를 건조하는 과정을 상연하려는 무모한 의지이다. 이는 분명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아무도 방주의 건조과정을 보자고 소설을 펼치지 않는다. 독자들이 굳이 소설을 통해 보길 원하는 건 자신을 흥미로운 어딘가로 이끌 완성된 방주일 테니까. 정지돈 소설은 이러한 기대를 배반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관습적인 읽기로 주조된 소설의 전형에서 풀려나와 역사와 현재 미래에 대한 자유로운 집합(assemblage)의 가능성을 상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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