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돈 소설의 윤리적 위상에 관한 에세이-
1. ‘도살장’과 ‘해부학교실’ 사이에서
문학으로 쓰여졌다면 일단 그것은 문학이다. 물론 쓰여졌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텍스트가 가치를 갖기 위해선 읽혀야 한다. 문학의 가치는 쓰여진 텍스트를 읽는, 문학적 실천으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대단한 문학적 가치를 품고 있다한들, 읽히지 않는다면 아무래도 상관없는 문서더미일 따름이다. 쓰여진 모든 것이 마땅히 자신의 (문학적) 가치를 온당하게 평가받을 수 있는 세상이 도래하면 좋으련만, 쓰기와 읽기의 불균형이야말로 세상의 이치다. 시대가 지나도 읽힐만한 문학적 가치를 획득한 19·20 세기의 정전은 실제로 당대에 쓰여진 문학의 0.5%에 불과하다고 한다. 99.5%의 문학은 읽히지 않은 채 문학체제라고 불리는 것을 떠받친다. 인쇄라는 물질적 한계를 넘어서 디지털 시대로 진입한 이후 불균형은 훨씬 심화됐을 터이다. 그럼에도 쓰기와 읽기는 계속되는 중이다.
이러한 불균형은 근대 소설이 자본주의 시대의 양식이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한다. 소설은 프랑스혁명 이후 나타난 무규칙·무규정의 욕망과 재미를 추구하며 번성한 새로운 장르였다. 대중의 관심이 집중된 새로운 장르에서 승부를 보려는 이들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상황에서, 초기의 소설가들은 재미와 인기를 끌어 모아 경쟁에서 승리하여 부와 명성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발자크나 뒤마 같은, 신화로 남은 소설가들의 삶은 오늘날 성공한 유튜브 크리에이터의 궤적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들의 성공에 멸시와 추문이 뒤따랐다는 것까지 말이다. 다이아 버튼을 받는 데 성공한 극소수 유튜버의 성공이 구독과 즐겨찾기를 갈구하는 구독자 수십 명의 크리에이터 수백만을 양산하는 사태처럼, 아서 코난 도일 단 한 사람의 ‘문학적’ 성공과 정전으로서의 권위 획득 이면에는 수백수천 편의 읽히지 않는 탐정소설의 무덤이 존재한다. 프랑코 모레티는 인쇄혁명 이래 각양각색의 형태로 반발해 온 소설 텍스트의 운명을 결정하는 근대적 장치(apparatus)의 한 측면을 문학의 도살장(slaughterhouse of literature)으로 명명한 바 있다. 자본주의 체제의 가장 유력한 신장르 중 하나인 소설의 가치평가-장치로서 읽기 행위는 절대다수의 읽히지 않는 문학을 불가피하게 양산하는 공장식 도축 시스템으로 기능한다. 비정하기 이를 데 없지만 상품으로써 문학의 실존에 대한 가장 현실적인 비유임을 부정할 수 없다. 이는 ‘문학적 상상력’의 도살장이기도 하다. 여기서 살아남아 끝까지 읽히는 텍스트가 ‘문학적 의미’의 대부분을 가져간다. 정전과 문학적 가치 획득 이면에는 시장주의 메커니즘이 특유의 피 냄새가 배어있다.
많은 이들 특히나 읽기 행위에 특별한 가치를 부여하는 독자들은 이러한 주장에 반론을 제기할지도 모른다. 읽기의 본질은 선택이지 배제가 아니라고. 이런 입장을 견지하는 이들은 오늘날 애석하게도 한없이 세계의 주변부로 밀려나는 중이다. 2020년대의 발자크나 빅토르 위고는 문단이 아니라 유튜버일 가능성이 높다. 읽기 행위의 가치를 옹호하는 이들이 유튜브를 하지 말란 법은 없다. 심지어 이들 중 일부는 실제로 유튜브를 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대학의 문학 분과야말로 이들이 기거할 가장 안전한 대피소이다. 새로운 욕망과 재미가 만발하는 시장에서의 의미화-도살 메커니즘으로는 깨뜨릴 수 없는, 문학을 대하는 과학적 관점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노스럽 프라이(Northrop Frye)는 대학의 문학 분과를 ‘문학적 읽기’의 전당으로 만드는 데 가장 결정적인 공헌을 한 이론가 중 하나이다. 그의 저작들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너무나 기독교문명 친화적이기에 즐겨 읽히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문학을 문학의 일반명사로 신화화하는 저널비평의 기조에 대항하여 문학을 문학으로 인지하게 하는 효과(effect)를 과학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프라이의 구상(vision)은 폐기되지 않았다. 프라이의 과학적 방법론은 대표작 『비평의 해부』의 제목에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 ‘해부학적 비평’ 혹은 ‘비평에 관한 해부’라는 두 개의 뉘앙스를 가진 이 책의 문제의식은 ‘현상을 알기 위해서는 이면을 들여다봐야 한다’는 것이다. 2020년에 생산되는 문학은 ‘새로운’ 문학이다. 그것들은 지금까지 문학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표현들로 채워져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표현이 반드시 새로운 문학적 효과를 담고 있다고 확신할 순 없다. 텍스트를 문학으로 인지하게 하는 문학-효과에는 모종의 한정된 패턴이 있다. 이 패턴은 지극히 추상적인 데다가 언어와 문화적 관습에 따라 각양각색이다. 그러한 가운데 문학-효과의 패턴은 무한한 표현의 카오스를 문학이라는 코스모스로 인지할 수 있게 한다. 프라이의 작업은 기독교문명에 국한된 시론(試論)에 그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을 문학으로 인지하게 하는 커뮤니케이션 형식의 유기적 기관을 서사, 상징, 신화, 수사 등으로 해체하고 유형화하는, 과학적 방법으로서 비평에 대한 전망은 미지에 대한 지적 탐구영역으로서 문학을 바라보는 새로운 장을 열었다. 커뮤니케이션 형식으로서 문학의 효과에 대한 과학적 탐구가 가능하다는 프라이의 구상은 시장에서 판가름 나는 취미판단이나 대중성의 기제로 일소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커뮤니케이션 형식으로서 문학의 내적 본질에 대한 탐구는 끝나지 않았다. 프라이가 설립한 ‘해부학교실’은 문학을 문학 그 자체로 존재하게 하는, 미우나 고우나, 이 시대 마지막 보루 중 하나이다.
오늘날의 문학은 독자의 선택과 배제라는 냉혹한 시장논리 장치인 도살장 그리고 문학을 문학 그 자체로 존재하게 하는 분과학문 장치인 해부학교실 사이에서 자신의 운명을 시험한다. 도살과 해부는 방법적으로 전혀 다른 기술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살에 칼을 댄다’라는 메타포를 공유한다는 면에서 본질적으로는 같은 부류의 행위이기도 하다. 도살장과 해부학교실은 명백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이 또한 메타포이다. 강의실에서 해부를 한답시고 도살이 일어나는 경우를 꽤나 자주 볼 수 있다. 저잣거리에서 아무도 기대하지 않은 유의미한 해부학적 비평의 가능성이 나타나기도 한다.
도살장과 해부학교실 사이 어디쯤을 부유하는 수많은 텍스트 중에서 정지돈의 근작들은 이와는 사뭇 다른 관점과 방법으로 새로운 실천의 글쓰기 기술을 향해 나아간다. 역사 혹은 서사라고 하기엔 일견 무리가 있는 지도 그리기(mapping)로 픽션을 구축하는 운동. 이러한 무모함은 다른 텍스트에선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효과, 즉 부차적인 것들을 마땅히 있어야 할 위상에 놓는 윤리적 효과를 가시화한다. 이는 정지돈 소설의 내적 질서 안에서 구명(究明·救命)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관점이라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