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2월. 자퇴할 줄만 알았던 대학교를 6년만에 졸업했다. 그렇지만 졸업만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고, 많은 인문대 졸업생들이 그렇듯이 깜깜한 미래만을 고민하며 겨울을 보냈다. 봄이 서서히 찾아오던 3월에는 죽어있던 꽃과 나무가 분주히 새 삶을 준비했고 멈춰있던 내 삶의 시침도 그동안 멈춘 것을 보상하는 것처럼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시작은 온 가족이 코로나에 걸린 일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하루 이틀 만에 차례로 걸려 격리 기간이 길지 않았다. 어린 시절의 몸살감기를 떠올리게 하는 미열에 시달리면서도 내 마음속에는 희망이 차올랐다. 자연면역을 얻었으니 코로나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워졌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전염병으로 인해 내가 박탈당했던 여행이라는 피난처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지지 않았을까. 갑자기 이상한 힘이 솟아나 외교부와 여러 나라의 출입국 사이트를 조사해 보았다. 그러던 중에 발표된 단순재검출 반영 검사 면제 방침은 운명의 계시처럼 느껴졌다. 코로나 확진 한 달 뒤인 4월 초에 귀국하게 되는 일정이라면, 마지막 이틀을 힘들게 검사로 보내지 않고 온전히 즐길 수 있을 것이었다.
3월 중 발표된 단순재검출 반영 입국 조치
여행을 갈지 말지, 혹여나 간다 해도 잘할 수 있을지 등을 걱정하느라 며칠간 잠을 못 잤다. 피곤에 절어 겨우 잠이 들어도 설핏 의식이 있을 정도로 옅게 들거나 불안이 가득한 악몽을 끊임없이 꿨다. 예전엔 잘만 떠났는데, 2년간 갇혀 있으면서 다른 사람이 된 걸까? 엄마는 이런 날 보고 나이가 든 것이라 말했다. 위험한 선택을 피하는 어른. 한국에 남아있는 것이 몸도 마음도 편한 선택지라서 자꾸 안주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번 기회에 가지 못하면 괴로운 후회의 시간이 이어질 것도 알았다. 격리 해제 후 항원검사에서 음성 결과를 받으며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코로나에 걸렸고, 아팠고, 회복했다는 사실이 두려움을 덜어주었다. 완치하고 바로 같은 종류의 바이러스에 감염될 확률은 매우 낮다고 하니까. 다음날 아침 프랑스 파리의 숙소를 예약하면서 여행이 확정됐다. 출국일로부터 나흘 전이었다.
긴박한 일정이지만 그 사이에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부으며 열심히 준비했다. 소매치기가 많은 국가라 몸 안에 찰 수 있는 얇은 전대와 여권 스캔본을 가장 먼저 준비했다. 여러 장의 마스크, 후유증을 대비한 약, 면역력을 위한 홍삼 파우치, 자가진단키트, 코로나 관련 서류와 귀국을 대비해 영문으로 된 격리해제증명서를 챙겨야 하는 것이 이전과 달라진 점이었다. 그 외에는 익숙한 여행 준비를 하면 됐다. 여행을 다니며 쌓아온 본능이 아직 깊은 곳에 살아 있었는지 오랜만이지만 해야 할 일을 착착 해나갈 수 있었다. 해외사용이 가능한 체크카드를 발급하고, 방구석에 잠들어있던 비상용 유로 현금을 챙기고, 옷가지와 비상식량을 챙기자 이제야 이전에 느껴본 여행의 설렘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휴면회원으로 지냈던 여행 카페에 수시로 들어가 실시간 정보를 체크하고 ‘파리’와 관련된 거의 모든 게시물을 탐독했다. 이렇게 열정을 느껴본 게 얼마만일까. 즐거웠던 나흘이 빠르게 흘러 출국하는 날이 되었다.
캐리어를 끌고 집을 나오니 잘못이라도 한 듯 숨고 싶었다. 사람들의 눈길을 끌어서였기도 했지만, 위험하다고 비판받을 수도 있는 여행을 떠나게 됐다는 이유에 더 가까웠던 것 같다. 과거에 종종 보이던 캐리어족은 자취를 감추어 바퀴가 돌돌거리는 소리마저 생경했다. 최대한 눈에 안 띄게 조심하며 인천공항에 가는 공항철도 플랫폼에 왔다. 열차도 기존 지하철이 아니라 기차 같은 형태의 열차로 바뀌어 있었다. 공항까지 가는 승객이 별로 없어서인 걸까. 남은 자리가 역방향밖에 없어 약간 메슥거렸다. 그런 중에도 제대로 준비한 게 맞는지 불안해 대한항공 홈페이지를 들어가 프랑스와 한국의 출입국 규정을 조사하고 다른 여행객의 후기를 찾았다. 아빠가 카카오톡으로 모바일 탑승권을 보내줬다. 늘 스탠바이용 카운터에 가서 종이 탑승권을 보여줬던 터라 이런 신식 과정이 신기하게 느껴진다. 2년 사이에 많은 것이 바뀐 것 같다.
다시 찾은 인천공항은 거의 그대로였지만 동시에 완전히 다른 장소처럼 느껴졌다. 이 안을 가득 채우던 사람과 활기가 사라져 있었다. 지하철역을 빠져나와 게이트와 인포메이션을 보니 세트장에라도 온 듯 아무도 없었다. 가끔씩 지나다니는 공항 직원은 한가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어지는 지하상가는 문을 닫은 식당이 대부분이었고 그나마 문을 연 식당에도 사람이 없었다. 출발층인 3층에 올라가러 도착층을 지날 때도 방역교통망을 안내하는 입간판만이 조용히 빈 공항을 지키고 있었다. 내가 다시 돌아오는 4월에는 자유로이 대중교통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었다. 3층에 도착하니 체크인 시간을 맞은 대한항공 카운터에만 약간 사람이 있고 그나마도 줄이 길지는 않았다. 알록달록한 깃발과 등산복을 입은 중년 손님들로 북적이던 여행사 카운터도 이제는 텅 비어있었다. 쓸쓸했다. 그들은 지금 다 어디 갔을까?
몇 년 간 하늘길이 막힌 경험은 처음이기에 익숙한 체크인도 겁이 났다. 탑승할 수 없다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듣는 여러 가지 상황을 상상하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카운터로 걸어갔다. 긴장한 것이 무색하게 절차는 간단하게 끝났다. 여권과 카카오톡 탑승권, 코로나 관련 서류를 보여주고 직원이 살펴본 것이 전부였다. 캐리어까지 수화물로 붙이고 가벼운 에코백 하나만 덩그러니 남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이렇게 가벼운 차림으로 지구 반대편 나라에 간다니 불안했다.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기 전, 언제 다시 볼지 모를 인천공항을 다시 둘러보고 보안검색대에 들어갔다. 역시나 줄이 없어 보안검색도 빨리 끝났다. 면세점은 더 가관이었다. 텅 빈 복도는 내 발걸음 소리마저 튕겨내고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 게이트 안 유일한 편의점을 찾아내서 보리차를 사 왔다. 예전에는 비행기에 탈 때마다 목마른 사슴처럼 승무원을 불러 물을 한 잔씩 받았는데 매번 부르기가 미안했다. 게이트 내 편의점의 존재를 알게 된 이후로는 기내에서도 마음 편하게 사간 물을 마신다. 가야금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가보니 파리 행 게이트 근처에서 공연을 하고 있었다. 잠시 서서 들었다. 어느덧 샤를 드골 국제공항 행 비행기의 탑승수속이 시작되었다.
코로나 시기에 국제선을 타는 건 처음이기에 상상밖에 할 수 없었는데 생각보다는 좌석이 꽤 차있어 놀랐다. 내 자리를 찾아 숫자와 알파벳을 확인하며 복도를 걸어갔다. 자리를 모르고 받는 직원용 표이기 때문에 그 순간에는 약간의 긴장감이 든다. 하필이면 팔걸이가 올라가지 않는 맨 앞자리라 기대했던 ‘눕코노미’는 불가능했다. 그래도 과거 로얄석이었던 자리에 앉았으니 감사했다. 출발을 기다리고 있자니 잊고 있던 수많은 여행의 시작들이 기억났다. 국제선이 빈번하게 다니던 시절, 중국 쪽을 지나가는 유럽 노선이 너무 많은 나머지 운행 허가를 차례로 기다리느라 비행기에 앉아 한 시간을 넘게 기다렸던 적이 있다. 경유할 시간이 촉박해져 잔뜩 짜증이 난 채로 꼼짝없이 앉아있었지만, 그마저도 그리워지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지난 2년은 참 이상한 세월이었다. 창문 밖으로 분주히 수신호가 오가고 다른 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리는 진동이 전해졌다. 내가 탄 비행기도 이륙을 준비하며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비행기에는 거의 어른밖에 없었다. 그래서 기내식을 나눠줄 때 승무원들이 거의 “와인 드시겠습니까?”라고 물어보며 다녔는데, 아버지뻘의 남자 승무원께서 나한테만 다정스런 말투로 “주스 줄까요?” 물었던 재미난 해프닝이 있었다. 사실대로 정정하면 민망하실 것 같아 “네 감사합니다.” 하고 받았다. 늘 고정이던 비빔밥과 소고기/생선 요리가 아닌 새로운 메뉴여서 반가웠다. 두 번의 식사 모두 한식으로 먹었다. 제육볶음과 백김치볶음밥. 맛이 괜찮다. 특히 제육볶음은 기내식에 잘 나오지 않는 신선한 쌈채소가 있어서 더 색달랐다. 2년 동안 별로 수요도 없었을 텐데 대한항공이 많이 노력했구나 싶었다. 중간에 간식이 있었다. 바나나와 주먹밥과 과자 중에서 주먹밥을 받았다. 주먹밥도 처음 보는 메뉴인 것 같다. CJ에서 기술협력을 했다고 써있었다. 높은 고도에서 둔해진 미각을 감안해도 약간 짠 느낌이 있었다. 그래도 비행기에서 처음 경험하는 쫀득쫀득한 식감이 인상 깊었다.
러시아 전쟁으로 항로를 우회하여 미국 동부에 갈 때나 볼 수 있던 12시간 이상의 운행시간을 버텨야 했다. 승객도 승객이지만 직원들과 비행기도 고생을 했다.(3월에 간 여행인데 7월이 끝나가는 현재까지 전쟁이 끝나지 않을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뒤척이기도 하고, 작은 화면으로 영화를 보다가 두통에 시달리기도 하고, 잠깐씩 선잠에 들기도 하며 열심히 시간을 죽였다. 14시간 35분이라는 기나긴 시간을 버티고 비행기는 파리에 도착했다. 다시 여행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