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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십칠도씨 Jul 30. 2022

한강의 「채식주의자」와 오정희의 「새」를 비교하여

폭력이 고이는 곳에서 몸으로 말하다

출처: 창비, 문학과지성사



폭력이 고이는 곳에서 몸으로 말하는 자: 상실 극복의 불완전성과 필연성


“문학이란 영원히 답을 얻을 수 없는 방식으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 롤랑 바르트     


    「채식주의자」의 영혜와 「새」의 우일은 가부장제로 대표되는 폭력으로 고통받는 인물들이다. 영혜는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맞아 죽은 개와 그 개를 먹은 기억으로 인해 트라우마를 갖게 되고, 육식을 거부하게 된다. 결국 영혜의 내면에 고인 폭력은 칼로 자기 손목을 긋는 극단적 자해의 방식으로 발현된다. 이후 영혜는 채식에서 한 발 나아가, 자신의 몸에 쌓여온 폭력의 결과물(혹은, 다른 생물의 시체)을 다 비워내겠다는 듯, 모든 음식을 끊고 식물처럼 물과 햇빛만 있으면 살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일의 경우, 아버지의 폭력으로 인해 어머니가 집을 떠나고 친척들의 집을 전전하다 아버지의 방임으로 누나와 단둘이 남은 절망적 상황에 놓인다. 불량학생들과 어울리다 높은 곳에서 떨어져 몸을 다친 우일은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먹지도 않고 말과 배설물을 내뱉다가 조용히 죽음을 맞는다. 그가 기억해낸 최초의 폭력은 아기일 때 아버지가 창문 밖으로 자신을 던진 폭력이다. 우일 또한 영혜와 마찬가지로 타인에게 폭력을 발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안으로 수렴하여 결국은 다른 존재가 됨으로써 승화시킨다.      


한강, 「채식주의자」
“녀석의 덜렁거리는 네 다리, 눈꺼풀이 열린, 핏물이 고인 눈을 나는 보고 있어. ... 개에 물린 상처가 나으려면 먹어야 한다는 말에 나도 한입을 떠넣었지. 아니, 사실은 밥을 말아 한그릇을 다 먹었어. ... 거품 섞인 피를 토하며 나를 보던 두 눈을 기억해.”(p.53)

오정희, 「새」
“그때 아버지는 우리를 버리려고 갔던 거야. 누나. 아버지는 나를 내던졌어. 생각나지? 엄마를 때리고 아주 아기인 나를 삼층에서 던져버렸어. 그래도 나는 말짱하게 살아났어. 나는 날았던 거야. 떨어지면 죽거든. 나는 그때 벌써 그걸 알았어.”(p.159)


근원적 트라우마를 찾아서     

    두 작품에서 태초의 폭력이자 상실의 근원은 모두 ‘아버지’로 대응되는 가부장제이다. 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주변 인물들 또한 가부장제가 가하는 폭력의 상징으로서 나타난다. 영혜 아버지의 폭력성과 우일 아버지의 폭력성이 다른 인물에 의해 되풀이되는 것이다. ‘새’가 되어 날아가기 직전 우일이가 끊임없이 내뱉는 말들은 아버지의 어머니를 향한 폭력의 회고이다. 우일의 아버지는 아내를 매일 밤 멍들 정도로 때리고, 이씨 아저씨의 추근거림의 피해자인 ‘그 여자’에게도 책임을 전가해 폭력을 휘두르며, 딸을 성추행하는 순간마저도 자기연민을 우선하는 등 가부장제의 악을 형상화시킨 인물이다. 같은 하숙집에 사는 이씨 아저씨는 우일의 아버지와 달리 자식이 없어 동물에게 대신 폭력을 행사한다. “우리는 개를 먹어서 개처럼 되어간다.”(126)는 우미의 진술은 인간이 매일 먹는 음식이 다른 동물의 시체라는 당연하지만 무시되는 사실을 환기하는 동시에, 생명의 살아있음 자체가 폭력이 될 수 있는지를 되돌아보게 한다. ‘아버지’의 폭력을 받은 인간은 그 자신도 폭력이 되는가? 다른 생명을 죽임으로써만 살아갈 수 있는 생명이라면 그 자체가 악인가? 그렇다면 악의 순환을 끊기 위해 인간은 그 자신을 파괴해야 한다는, 비관적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이에 대해 영혜는 나름대로의 답을 찾는다. 기이해 보이는 영혜의 행위는 인간의 본질적 악을 고려할 때 오히려 도덕적인 선택일 수 있다. 영혜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폭력과 그를 암묵적으로 동조한 가족의 폭력, 결혼 후 남편의 폭력의 희생자로 살아오다가, 식습관의 변화라는 독특한 방식으로 해방을 꾀한다. 인간의 폭력성 안에 편입되지 않으려 하는 자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추방당한다. 이는 서사가 진행됨에 따라 점점 동거인이 줄어드는 우일보다는, 회사 사람들이나 대가족 등 비교적 큰 사회를 맞닥뜨리는 영혜에게 보다 눈에 띄게 나타난다. 남편은 자신이 원하는 틀에 끼워지지 않는 영혜를 광인으로 치부하고, 영혜의 가족은 ‘고기 먹기’로 대표되는 가부장제 의식에 편입되지 않으려는 영혜를 폭력으로 굴복시키려 하며, 은혜의 남편 또한 영혜에 대한 이해에 가까이 다가간 듯하나 예술적 뮤즈로 타자화시킨다. 남편, 형부, 언니 은혜의 시선을 중심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대상화된 영혜는 이해하지 못할 광기이자 도망치고 싶은 어둠임에 동시에 이성적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 신비이기도 하다. 추방당한 자는 우울과 광기 사이를 배회하고 정상성에서 배제된다.     


한강, 「채식주의자」
“회식이 있어 늦게 들어온 밤이면 나는 술기운에 기대어 아내를 덮쳐보기도 했다. 저항하는 팔을 누르고 바지를 벗길 때에는 뜻밖의 흥분을 느꼈다.”(p.40)
“‘아버지, 저는 고기를 안 먹어요.’ 순간, 장인의 억센 손바닥이 허공을 갈랐다. 아내가 뺨을 감싸쥐었다. ... 처형이 장인의 오른팔을 잡았다. 장인은 이제 젓가락을 내던지고, 손으로 탕수육을 들고 아내에게 다가갔다.”(p.49-50)

오정희, 「새」
“개에게 물리면 미친다. 미친개가 되어 짖고 돌아다니며 사람을 물게 된다. 상처에 개털을 그슬려 붙이고 그 개를 잡아먹어야 한다. ... 저녁에 그들은 개가죽을 뒤집어쓰고 개 비린내를 풍기며 술에 취해 개처럼 짖으며 돌아왔다. 올여름 모처럼 더위치레를 잘했어. 새끼가 일곱 마리나 들어 있더구먼. 오늘내일 중에 나올 거더라고. 횡재를 한거지.”(p.112-115)
“지렁이 춤을 볼 테냐”(p.118)  


상실에 대응하는 병리적 방법들      

    두 작품에서는 인간의 폭력을 벗어날 이상적인 방식이 제시되지 않으며, 등장인물들 또한 상실의 슬픔을 어떻게 건강하게 분출해야 하는지 모른다. 신의 뜻이라는 보편적 지표가 사라진 상황에서 근대의 개인은 스스로 깨쳐나가며 방황할 수밖에 없다. 이들은 모두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해방을 꿈꾸지만 이는 뒤틀린 방식으로 나타난다. 자신을, 혹은 타인을 향한 폭력(성)과 무력한 관찰이 그것이다. 회복에 대한 욕망이 내면으로는 자신을 향해 자해의 형식으로, 외부로는 타인을 향해 폭력으로 발현된다. 이러한 악순환의 최초에는 인간의 죄악이 도사리고 있고, 이로 인해 인간의 폭력과 상실이 영원히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절망감을 안긴다. 인간은 삶의 의지로도 죽음의 의지로도 서로를 해치는 것이다. 방황하는 개인은 인간의 본래적인 악의 단면을 보여준다. 폭력과 상실의 굴레에 갇힌 인간은 악하고도, 약한 존재다.     


‘나무’와 ‘새’가 되어가는 인간     

    악한 세상에서 살아갈 수 없는 순수한 존재는 사라짐으로써 해방을 꾀한다. 관찰자에게 일면 자해로 보이는 그들의 행동은 그들 자신에게는 해방일 수 있다. 영혜와 우일은 각각 식물과 동물이 됨으로써 폭력에서 떠나는 인물이다. 그들은 명료한 의사소통의 언어가 아닌, 보는 이에게 이해되기 어려운 언어로 이야기한다. 말로 의사소통을 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약자가 마지막으로 선택할 수 있는 의사소통의 방식은 몸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우일과 영혜의 이상향은 꿈이라는 공통적인 상징물로 나타나는데, 우일은 날아다니는 꿈을 꾸고 영혜는 나무가 되는 꿈을 꾼다. 이성의 언어로 이해될 수 없는 꿈을 통해, 말할 수 없는 이들은 말없이 보여준다.

    영혜와 우일의 ‘인간성’ 상실은 들뢰즈의 ‘되기’의 방식으로 나타난다. 영혜의 “밥 같은 거 안 먹어도 돼. 살 수 있어. 햇빛만 있으면. 나 이제 동물이 아니야 언니.”(186) 등의 발언과 우미의 “우일이는 아마 날기 위해 뱃속의 것을 모조리 비운 모양이었다”(162) 등의 진술은 인간을 벗어나려 하는 인간이 다른 존재로 ‘되어가는’ 과정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우일과 영혜는 점점 말라감으로써 ‘해방적 되기’로의 도약을 준비한다. 육식을 거부하는 채식주의자에서 음식을 거부하는 식물적 육체로, 궁극적으로는 나무까지, 영혜는 점점 탈인간적 존재로 나아가고자 하는 비현실적인 욕망을 갖는다. 그 명백한 불가능성은 동물로 태어남으로써 갇히게 되는 폭력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그의 강한 의지를 더욱 도드라지게 만든다. 우일은 어린 아이이므로 영혜의 경우만큼 적극적으로 자신의 운명에 관여했다고 보기 어렵지만,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자기파괴적인 행위를 반복한다는 점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함과 동시에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을 꿈꾼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한강, 「채식주의자」
“꿈에 말이야, 내가 물구나무서 있었는데...내 몸에서 잎사귀가 자라고, 내 손에서 뿌리가 돋아서...땅속으로 파고들었어. 끝없이, 끝없이...”(p.180)
“영혜는 다시 어린아이가 되려는 걸까. 생리는 멎은 지 오래고, 몸무게가 삼십 킬로그램도 안되니 가슴이 남아 있을 리 없다. 모든 이차성징이 사라진 기이한 여자아이의 모습으로 영혜는 누워 있다.” (p.183)
 
오정희, 「새」
“우일이는 언제나 나는 꿈을 꾼다. 잠을 잘 때 심하게 이불을 걷어차고 몸부림을 치고 팔다리를 버둥대는 것은 나는 꿈을 꾸고 있기 때문이다.”(p.96-97)
“그 애는 나날이 말라간다. 나뭇가지같이 불거진 가슴팍 뼈는 가늘게 휘어 있다. 그 애는 아마 날기 위해 가벼워지려 하는지도 모른다. 새는 뼛속까지 비어 있기 때문에 날 수 있는 것이다.”(p.95)


‘되기’를 지켜보는 관찰자     

    은혜와 우미는 각각 영혜와 우일의 언니나 누나로서 홀로 남은 그들을 마지막까지 돌본다. 관찰의 대상이 되는 동생에게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 못하지만, 가장 오랫동안 그들의 곁에 존재하고 그들의 내면 가까이 다가간 이들도 그들이다. 은혜와 우미가 무력한 방관자라고만 볼 수는 없다. 은혜는 아버지의 폭력에 내던져진 영혜를 암묵적으로 묵인한 자신을 비겁하다고 느끼지만, 그도 영혜만큼 적극적이지 못했을 뿐 광기로든 죽음으로든 도망치고 싶어한 피해자였다. 그는 끊임없이 남편을, 자녀를, 동생을 돌보는 굴레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영혜의 경우처럼 극단적으로 치닫지는 못하지만, 그래서 더 안타까운 일반적인 기혼 여성의 삶을 보여준다. 또한 마지막까지 영혜의 곁에 남아 영혜의 깊은 곳에 남아있는 폭력의 뿌리를 발견한 인물이기도 하다. 

    우미는 우일이 당하는 폭력을 관찰할 수밖에 없는 무력함을 보이며 때로는 방관하지만, 무력한 어린아이의 입장에서 당연한 일이다. 그 자신도 우일과 마찬가지로 아버지로부터의 방관과 폭력의 피해자이기도 하다. 무력한 관찰자가 독자에게 일으키는 가장 큰 효과는 반성과 성찰에 있다. 우미의 무기력한 조감과 영혜를 바라보는 타자들의 피상적 관찰은, 독자에게 하여금 해결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는 삶의 문제를 어떻게든 극복해야 한다는 필연성을 일깨운다.      


인간의 운명에 저항하는 법     

    잡식동물의 필연적 슬픔은, 폭력(다른 동물을 죽여서 먹는 행동)을 통해서만 생존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인간의 근원에 악이 있다. 영혜는 그 사실을 인지한 후, 불가능한 ‘되기’를 시도한다. 그는 인간성을 상실하지만, 그 사라짐은 곧 날아감, 해방을 뜻한다. 두 작품은 불가능해보이거나 비현실적이어 보이는 방식을 통해 폭력에 물들지 않는 가능성을 그린다. 인간됨을 탈출한 우일은 ‘새’가, 영혜는 ‘나무’가 된다. 가부장제 아래에서 가장 약자인 아이와 여성은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되어 더 큰 우주의 생명력으로 환원됨으로써 폭력의 악순환에서 탈출한다.

    우미는 우일의 “생명이 빠져나간 자리”에서 빛을 발견한다. 반대로 영혜의 몽고반점은 생명이 깃든 자리에 가깝다. 그 생명은 인간이 태초에 갖고 있다가 자라나며 점점 잃어버리는 순수이다. 푸른색은 죽음과 슬픔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순수를 상징하기도 한다. 태어나는 아기가 지닌 푸른 몽고반점과 죽어가는 몸에 깃드는 푸른 빛이 두 작품에서 비슷하게 사용되었다는 점은 상징적이다. 영혜와 우일의 푸름은 악의 굴레를 벗어날 방법을 제시하는 빛이 된다. 인간의 본래적 악을 자각하고 스스로 바꿔나가려 할 때에 비로소 인간은 필연적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다. 비록 영혜와 우일의 방식은 ‘정상적’인 언어로서 이해되거나 보편적으로 채택될 수 없는 방식이었으나, 존재 본연의 악을 벗어나고자 하는 하나의 작고 무력한 날갯짓 안에 인간의 구원이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한강, 「채식주의자」
“‘...모르겠어요. 난 남들도 모두 그런 줄 알았어요. 그런데 어느날 목욕탕에 가보니까...나 혼자만 갖고 있었어.’ 그는 그녀의 허리를 안은 손으로 반점을 어루만졌다. 낙인같은 이 점을 나눠갖고 싶다고 그는 생각했다.” (p.142)

오정희, 「새」
“온몸으로 푸른 무늬가 넓게 퍼지고 있었다. 팔뚝의 작은 문신에도 팔뚝의 작은 문신에도 푸른 물이 들어있었다. 침을 맞은 자리도 점점이 파랗게 변했다. 숱 많은 머리털 속, 멍든 듯 부풀어오른 한가운데 조그만 상처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 애의 영혼이, 생명이 빠져나간 자리일까.” 
“나는 이제 알았다. 우주소년 토토가 빛의 아이라는 표지, 둥그런 해무리는 이곳에서 나오는 것일 게다.” (p.162-163)


주텍스트     

  오정희, 「새」, 문학과지성사, 2009.

  한강, 「채식주의자」, 창비, 2007.


2021/10/30 작성. 동시대한국문학과세계문학 중간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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