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과 부끄러움 너머, 사람에 대한 사랑
*윤동주 시의 일반적 독법, 즉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프레임을 통해 시를 읽는 것에서 벗어나 최대한 텍스트 내적으로 해석하려고 노력했다. (2021-2 현대시읽기 수업)
간판 없는 거리
정거장 플랫폼에
내렸을 때 아무도 없어,
다들 손님들 뿐
손님 같은 사람들 뿐,
집집마다 간판이 없어
집 찾을 근심이 없어
빨갛게
파랗게
불붙는 문자도 없이
모퉁이마다
자애로운 헌 와사등에
불을 켜놓고,
손목을 잡으면
다들, 어진 사람들
다들, 어진 사람들
봄, 여름, 가을, 겨울,
순서로 돌아들고.
첫 연에서 화자가 서있는 공간은 정거장이다. 정거장은 어디론가부터 와서 어디론가로 떠나는 익명의 집합체이다. 늘 사람이 가득 찬 공간이지만 "아무도 없어"라고 표현하는 것은 사실적 표현이 아닌 마음을 둘 이가 아무도 없다는 의미에 가까울 것이다. 이러한 화자의 외로움 혹은 소속되지 못한 붕 뜬 기분은 2연에서 구체화되어 ‘손님’이라는 시어로 집약된다. 그렇다면 간판이 없다는 뜻은 찾는 사람이 없고, 화자도 찾을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간판 없는 거리’라는 제목은 서로의 유대감이 사라진 사회 혹은 집단이다. 여기서 푼크툼은 “집 찾을 근심이 없어”라는 대목으로 보인다. 집에 간판이 없는 현상이 집 찾을 근심이 없다는 감정으로 연결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5연에서 "자애로운 헌 와사등"에 의해 분위기의 전환이 이루어진다. 4연까지 묘사된, 서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정이 없는 냉정한 풍경과는 달리 와사등은 ‘자애로운’ 따뜻한 분위기로의 전환을 이루어낸다. 간판이 간판의 상업적이고 명료한 빛과는 다른, 무언가를 밝히기 위한 따뜻하고 어스름한 불빛이다. 이타적인 등불을 켜고 난 후에, 손님 같던 사람들은 ‘어진 사람들’이 된다. "손목을 잡"는 행동을 통해서 그들의 유대감은 물리적으로 확장되고 있다. 화자는 "다들, 어진 사람들"이라는 싯구를 반복해 강조하는 동시에, 계절이 지나고 시간이 지나도 이 유대가 계속 되기를 염원하는 듯하다.
맥락적/상관적 의미를 분석하기 위해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자애로운 헌 와사등’이라는 표현이다. 왜 손님 같은 사람들은 어진 사람들이 되었나, 그것은 ‘와사등’의 등장 이후다. 간판이 없는 사실이 왜 “집 찾을 근심이 없”는 정서로 연결되는 것인가? 간판은 상업시설의 표지이기도 하지만, 개별적인 가게를 구별하는 기준으로 볼 수도 있다. 다름은 개성이 될 수도 있으나, 각자가 분리되어 있다는 점에서 고립으로 느껴질 수 있다. 화자는 간판을 배척하고 와사등을 지향점으로 삼는다. 와사등은 구분 없이 길을 지나는 모두를 밝히는 등불이다. 이 지점에서 윤동주 시인의 개인적 맥락을 살펴보자면,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점을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기독교는 공동체윤리를 강조한다. 물론 청년 윤동주가 기독교를 삶의 지침으로 삼지는 않았더라도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더 강하게 가졌을 수 있다. 기독교적 관점으로 더 들어가본다면 ‘자애로운 헌 와사등’은 신의 사랑과 자비로움으로, ‘어진 사람들’은 신의 은총을 받는 인간들로 해석해볼 수도 있겠으나 이 해석은 보조 텍스트가 없어서 근거가 부족하다.
종합적 해석을 해보자면, 이 시는 이름 없는 사람들을 구별 없이 감싸 안는 보편적 사랑을 지향하며 서로가 따뜻함을 나누기를 소망한다고 볼 수 있다.
아우의 인상화
붉은 이마에 싸늘한 달이 서리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발거리 멈추어
살그머니 애딘 손을 잡으며
“너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사람이 되지”
아우의 설은 진정코 설은 대답이다.
슬며─시 잡았든 손을 놓고
아우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 본다.
싸늘한 달이 붉은 이마에 젖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첫 연과 마지막 연의 유사성이 눈에 띈다. 1연에서는 붉은 이마에 서리던 달이 4연에서는 이마에 젖는다. 붉은 색의 뜨거움과 ‘싸늘한’, ‘달’의 차가움이 대비되어 충돌이 일어나는 이미지이다. 앳된 아우는 자라서 사람이 되겠다 말한다. 사람은 사람으로 태어나기는 했지만, 사람이 된다는 의미는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여기서 시적 푼크툼은 “설은 진정코 설은 대답”이 될 것이다. 사람이 자라서 사람이 된다는 것이 왜 설은 말인가? 그것은 순진하고 어린 아우에 대한 화자의 걱정으로 읽힐 수 있지만, ‘사람이 된다는 것’의 어려움을 이미 체감한 화자의 슬픔으로 볼 수도 있다. 자라나 인간이 되는 것, 삶을 견디는 것, 젊음이 산화되어 성숙으로 나아가는 시간을 살아내는 것은 단순히 나이 먹는 의미 그 이상이다.
인간이 되는 것의 어려움은 이 시 내부뿐만 아니라 윤동주 시인의 시 세계를 통해 맥락적 의미를 파악해볼 수 있다. 윤동주 시인이 많은 시에서 보여 왔듯이 그는 인간다운 인간이 되는 것,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사는 것을 중요시했다. 아우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투영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늘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던(<자화상> 등) 윤동주의 시선이 타인으로 옮겨온 것이 인상적이다. ‘아우의 인상화’라는 제목은 맥락상 아우가 그린 그림이 아니라, 아우의 얼굴을 인상화처럼 바라보는 화자의 시각을 표현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인상화는 화자의 아우에 대한 인상을 그린 것이다. 마지막 연에서 (아우의) 붉은 이마가 아닌 싸늘한 달이 주체가 된 이유는 달과 이마의 동화로 볼 수도 있지만, 문장의 주체가 생물(아우의 이마)에서 무생물(달)로 바뀌는 장치는 아우의 주체성을 희미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시대적 맥락을 살펴보았을 때, 식민지 국민으로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자유를 잃고, 죽어있는 ‘슬픈 그림’으로 존재하는 것을 슬퍼한다고 볼 수도 있다. 동생을 보며 그가 느끼는 감정은, 젊음을 지나 ‘사람이 되는’ 성장통을 거쳐가야만 하는, 그리고 자명한 그 고통을 오롯이 견뎌내야 할 대상에 대한 슬픔일 것이다.
병원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 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金盞花)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소설인 듯, 일기인 듯, 운율적 면보다 회화적인 면이 강조된 시이다. 1연에는 외부에 초점을 맞추어 병원에서 우연히 마주친 젊은 여자의 일광욕을 관찰하고, 2연에서는 내부로 들어와 여자와 비슷한 자신의 처지를 되돌아본다. 3연에서는 다시 시선이 여자에게로 옮겨져 병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묘사하며 자신의 소원을 빈다. “그 여자의 건강이 ─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 둘은 함께 아파하고 있다는 깨달음에 가닿는다. 젊은 여자와 젊은이인 ‘나’는 같은 아픔을 공유하고 있으며, 이 ‘병’은 늙은 의사가 이해할 수 없는 미지의 아픔이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는 대목에서는 그간의 시(<자화상>, <소년> 등)에서 보였던 부끄러움이나 죄책감, 내면으로 들어가는 온순한 기질 대신 반어적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모습을 보인다. ‘가슴을 앓는다’는 여자의 병은 시의 화자도 공유하고 있음을 2연의 시작 부분에서 관찰할 수 있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굳이 의사 앞에 ‘늙은’을, 화자를 ‘젊은이’로 강조하여 대비시킨 이유가 있을 것이다. 늙음은 극복되어야만 할 무언가로 상정된다.
그렇다면 늙은 의사가 모르던 ‘병’은 무엇일까. 윤동주 시가 일반적으로 읽히는 대로 해석해보자면 식민지 치하의 암울한 현실일 수도 있겠으나, 이러한 독법은 개인을 시대의 매몰된 자로 평면화시키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우선은 시의 내적 정합성만을 따져 해석해 본다면 젊은 여자도, 젊은이인 ‘나’도 앓고 있었던 ‘병’은 젊음 그 자체일 수 있다. 젊은 시절에 우리는 사춘기의 열병을 겪기도 하고 방황하며 작은 일에도 크게 기뻐하거나 슬퍼한다. 이러한 병을 늙어버린 의사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화자가 이 병을 고쳐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으로 보아(“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라는 대목에서 확인할 수 있다) 병을 젊음으로 보는 해석은 근거가 부족하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병’은 늙은 세상에서 생생히 깨어있는 젊음의 고통이다. 하지만 젊은이들의 병은 진정한 병이 아니다. 이 시에서 화자가 지적하는 병은 생각의 낡음, 타성에 젖는 것, 병든 사회를 모르는 (혹은 모르는 척 하는) 늙음이다. 늙음이라는 병을 앓는 이가 오히려 의사라는 권위를 가지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는 대목을 통해 화자는 아파하는 여자와 자신의 처지를 중첩시키지만, 직접 행동에 나서지는 못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니 젊은 여자와 자신의 건강이 회복되기를 바라는 것도, 그들의 젊음이 기성세대로 원만히 편입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의 젊음이 회복되기를 바라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늙은 의사를 부정적 존재로 상정하긴 하였으나 그 또한 한 개인보다는 병들어버린 늙은 사회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인간 보편에 대한 애정이 잘 드러나는 시로 보인다. 또한 그러한 타성을 경계하는 생생한 젊음이 느껴진다는 점에서, 윤동주 시가 왜 청춘을 상징한다고 분석되는지 이해가 가는 시 중 하나였다.
위로
거미란 놈이 흉한 심보로 병원 뒤뜰 난간과 꽃밭 사이 사람 발이 잘 닿지 않는 곳에 그물을 쳐놓았다. 옥외 요양을 받는 젊은 사나이가 누워서 치어다보기 바르게 ─
나비가 한 마리 꽃밭에 날아들다 그물에 걸리었다. 노란 날개를 파득거려도 파득거려도 나비는 자꾸 감기우기만 한다. 거미가 쏜살같이 가더니 끝없는 끝없는 실을 뽑아 나비의 온몸을 감아버린다. 사나이는 긴 한숨을 쉬었다.
나이보담 무수한 고생 끝에 때를 잃고 병을 얻은 이 사나이를 위로 할 말이─거미줄을 헝클어버리는 것밖에 위로의 말이 없었다.
앞서 분석한 <병원>과 굉장히 유사한 시로 보인다. 병원에서 젊은 여자에 대해 공감하고 연민을 느꼈듯이, 화자는 또 다른 연민의 대상을 발견한다. “옥외 요양을 받는 젊은 사나이”가 그것이다. 젊은이를 공감과 연민의 대상으로 상정하였다는 것은, 화자의 정체성에 젊음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병원>에서 늙은 의사가 그랬듯, <위로>에서 나비에 자신의 처지를 의탁한 젊은 남자가 보며 한숨을 내쉬는 대상은 거미이다. 또한 <병원>에서와 비슷하게 그림을 그리는 듯한 소설적 서술로 이루어진 세 연의 구조가 동일하다. 첫 번째 연에서는 거미가 거미줄을 쳐놓은 광경을 바라보는 젊은이가, 두 번째 연에서는 나비가 거미줄에 걸리는 모습을 보고 한숨을 쉬는 젊은이, 마지막 연에서는 그러한 젊은이를 위로하는 ‘나’의 모습이 묘사된다.
거미와 나비는 자연의 약육강식 구조에서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잡아먹을 수밖에 없는, 그것이 자연스러운 관계이다. 사실 잡아먹는 거미나 잡아먹히는 나비는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않고, 슬픔이나 분노를 느끼는 것은 그 장면을 바라보는 인간이다. 젊은 남자와 ‘나’는 먹이의 운명을 타고난 나비에 자신들의 감정을 부여한다. 젊은이는 거미에게 붙잡히는 나비를 보고 한숨을 쉬고 말지만, 그런 젊은이를 바라보는 화자는 더 나아가 거미줄을 헝클어버린다. 그것은 타인을 위로하는 행동이자, 화자의 시선이 내면으로의 침잠을 탈피하고 외부로의 시선을 전개하는 시작점이다. <병원>에서 젊은 여자의 위로가 스스로 따서 꽂은 금잔화였다면, <위로>에서 ‘나’의 행동은 더욱 적극적으로 변모하여 직접 행동에 나선다.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봄으로써 상대에게 공감을 표하던 화자는 “거미줄을 헝클어버리는”, 상대를 위한 물리적인 행동을 보인다. 이는 앞서 분석한 대목인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에서 관찰되는 내면으로 침잠해버린 소극적 분노를 극복하고, 마음껏 화낼 수도 없는 현실에 대한 분노가 행동으로 발현된 적극적 감정 표현이자 의지의 표명이다. <병원>은 연희전문 졸업 당시 발표한 것이고, <위로>는 일본 유학 때 쓴 시이므로 시기적으로 더 이후이다. 그 사이 많은 것을 경험한 윤동주의 시의 사유가 한층 성숙하고 깊어졌다고 해석할 수 있다.
윤동주 시에서는 ‘나’가 많이 등장하고 스스로 다짐하거나 부끄러워하는 성찰이 많이 보인 데 비해 이 시에서는 자신이 아닌 타인을 관찰하고 있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고통 받는 자아에서 시선을 넓은 곳으로 돌려, 또 다른 고통 받는 타자를 발견한다는 점에서 자아성찰의 시보다 더욱 성숙한 면모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내적 성찰로 침잠하는 소극적 태도에서 벗어나 작게나마 행동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강한 에너지가 느껴지는 시였다.
눈감고 간다
태양을 사모하는 아이들아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
밤이 어두었는데
눈감고 가거라.
가진바 씨앗을
뿌리면서 가거라.
발뿌리에 돌이 채이거든
감었든 눈을 와짝떠라.
이 시는 아이들에게 말을 걸고 있다. 그들은 “태양을 사모”하며 “별을 사랑”하고, ‘태양’과 ‘별’은 자연적인 광원(光源)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따라서 이 시의 지향점은 빛 혹은 밝음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배경은 긍정적이지 않다. 시간적으로 어두운 밤인데, 지향하는 빛과 현실의 어둠 사이 괴리에서 멜랑콜리가 발생한다. 그러나 시에서는 그런 슬픔이 드러나지 않는다. 어두운 현실보다 가지고 있는 ‘씨앗’에 집중한다. 씨앗은 가능성이지만, 무엇의 가능성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특히 아이들은 아직 젊음에도 이르지 못한 작은 존재들이다. 그들은 남은 나날들이 모두 ‘씨앗’으로, 무궁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씨앗을 뿌리면서 길을 걷는 것은 밤일지라도 자신이 가진 가능성을 최대한 실현하면서 살아내는 일이다. 발뿌리에 돌이 채이는 사건은 구체적인 의미를 알 수 없지만 어떤 역경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눈감고 가거라”라는 대목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아 눈에 띄며, 인식의 전환을 일으키는 푼크툼으로 볼 수도 있다. 어두운 상황에서 눈을 더 크게 뜨는 것이 아니라 ‘어두운데’ 눈을 감으라는 건 화자가 의도한 바가 있을 것이다. 눈을 감는 행동은 발뿌리에 돌이 채이는 상황을 위한 것이다. ‘어두우니’가 아닌 ‘어두었는데’로 쓰인 이유를 분석해보아야 할 것이다. 전자의 경우라면 어두워서 눈을 굳이 뜰 필요가 없어 눈을 감는 것이다. 시에서 쓰인 의미는 눈을 떠야할 상황이지만 눈을 감으라는 것이다. 어둠이 아이들에게 너무나 슬픈 현실이라서 그런 것인가? 그 것을 확인해보기 위해서는 시대적 맥락을 불러와야 할 것이다.
윤동주가 마주했던 식민지 시대를 시에 적용해보면, 어둠은 일제 치하의 암울한 현실일 것이나 그 어둠에 대해 눈을 감으라는 뜻이 현실을 외면하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둠에 좌절하지 않고 씨앗을 뿌리기 위한 행동에 가깝다. 씨앗을 뿌리며 나아가다가도 발에 돌이 채이면 눈을 뜨라는 말은, 자신의 꿈과 미래를 향해 열심히 살아가야 하지만 부당한 것에는 눈감지 말라는 조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식민지 치하라는 국가적 비극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국가에 개인의 삶이 지워지는 것 또한 비극일 수 있다. 윤동주는 아이들에게 식민지 국민이라는 현실을 외면하지 않되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라는 응원을 보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조금은 과감한 해석으로 시 분석을 마친다.
나가며
이 다섯 편의 시들은 윤동주 시에 보편적으로 씌워진 내면에 집중한 시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다른 사람들을 향한 시이다. 시를 지배하고 있는 슬픈 정서는 그러나 내면에 침잠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외부의 대상에 대한 연민으로 나아간다. 대상은 병원에서 만난 젊은 여자와 남자, 아우, 아이들, 그리고 ‘어진 사람들’이다. 시의 대상이 된 이들은 모두 약자이며, 어떤 종류의 어두움을 바라보고 있는 자들이다.
보조 텍스트로 윤동주의 산문 <화원의 꽃이 핀다>를 살펴보자.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가을, 코스모스가 홀홀히 떨어지는 날 우주의 마지막은 아닙니다. ... 우리는 서릿발에 끼친 낙엽을 밟으면서 멀리 봄이 올 것을 믿습니다.” 이러한 산문과 가을을 배경으로 한 또다른 시 <별 헤는 밤>을 참고하면 윤동주에게 가을의 의미가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다. 가을에 봄을 기다리는 것은, 곧 봄이 올 겨울에 봄을 기다리는 것과 다르다. 곧 겨울이 올 것이 자명하나 그것도 지나면 봄이 올 것이라는, 한 단계 더 나아간 희망이다. 그는 아득한 젊음을 가을의 시간으로 여긴 듯하다. “여기에 화원이 있습니다. 한 포기 푸른 풀과 한 떨기의 붉은 꽃과 함께 웃음이 있습니다. ... 우리 화원 속에 모인 동무들 중에, 집에 학비를 청구하는 편지를 쓰는 날 저녁이면 생각하고 생각하던 끝 겨우 몇 줄 써 보낸다는 A군, 기뻐해야 할 서류(통칭 월급 봉투)를 받아든 손이 떨린다는 B군, 사상적 당착에 자살을 기약한다는 D군 나는 이 여러 동무들의 갸륵한 심정을 내 것인 것처럼 이해할 수 있습니다.”(154) 윤동주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원의 꽃이 핀다’고 믿는다.
윤동주 시에서 시공간적 배경은 부정적으로 설정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어두운 밤이라는 배경은, 현실을 극복하고픈 의지를 드러내기 위한 장치로 보인다. 청춘의 시간은 밤이다. 갈 길은 멀고 오늘을 버텨내기도 아득하다. 아직은 부끄럽고 부족한 미완의 운동이지만, 완성을 향해 가는 운동은 그 자체로 아름다우며 의미가 있는 것이다. 윤동주는 시에서 이러한 젊음의 본질을 포착하여 방황하는 청춘에 공감과 위로를 보내고 있다. 언젠가 자신이 동경하는 모습이 되기를 바라며, 하지만 완성시키지 못한 채로, 젊은 시를 남긴 윤동주는 그 자신도 젊은 나이에 별이 되어 영원히 청춘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