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목교

1978년-1980년 언저리

by 서완석

제11화 정선생과 마을 사람들

영석은 숙희가 뛰어와서 전달한 말이 더 슬프게 느껴졌다. 의사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영석은 어린 시절 전깃불이 들어오지 않는 시골 마을에 살았다. 호롱불이나 촛불을 켜고 살았고, 밤에 이웃 마을 마실이라도 가려면 관솔에 불을 붙여 들고 가야 했다. 그래서 촛불이 꺼지기 직전의 상황을 너무나 잘 안다.

심지가 닳아 재가 된 끝부분은 이리저리 흔들리며 마지막 남은 기름을 빨아올린다. 평소 안정적인 물방울 모양을 유지하던 불꽃은 위아래로 길게 늘어지거나, 좌우로 흔들리며 마치 춤을 추듯 불안하게 떨린다. 불꽃의 가장자리는 더욱 붉고 흐릿해지며, 푸른빛의 중심부가 흐릿해진다. 이와 동시에, 심지 끝에 남아있는 왁스가 타들어 가는 소리가 평소보다 더 거칠고 작게 ‘치직’ 거리는 소리를 낸다. 이는 심지에 남은 연료가 거의 소진되었음을 의미하며, 불꽃을 유지하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다. 불꽃의 밝기는 점점 약해지다가 순간적으로 아주 짧게 ‘푸르르’하며 빛을 발한다. 이는 마지막 연료를 한꺼번에 태우려는 불꽃의 마지막 노력으로,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듯 순간적으로 강렬하게 타오르는 현상이다. 그 짧은 순간의 빛이 사라지면, 불꽃은 갑자기 ‘픽’하는 소리와 함께 위로 솟구치다가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완전히 사라진다. 연기는 잠깐 공중에서 미세하게 맴돌다가 이내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타다 남은 심지와 뜨거웠던 기억의 냄새와 축축한 촛농의 흔적만 남는다.

숙희가 달려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곰소댁의 통곡 소리가 들려왔다.

영석과 누나는 숙희의 손을 잡고 숙희네 집으로 갔다. 이미 상당히 많은 마을 사람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만큼 정선생과 곰소댁이 마을 사람들에게 덕을 쌓고 살아온 덕분일 것이다.

“숙희야, 아빠한테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3시간 정도는 우리들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다더라”

마을 사람 중 누군가가 숙희에게 말했다.

“아빠, 미안해, 매일 아빠한테 숙제해 달라고 하고, 아빠라고 부르지도 않고, 상냥하게 말하지 않았어, 용서해 줘”

숙희가 닭똥같은 눈물을 흘리며 정선생의 파리한 손을 잡고 하는 말에 주위에 모였던 사람들 모두가 울음을 터뜨렸다. 누나도 영석이도 마찬가지였다.

영석도 여러 사람의 죽음을 경험한 바 있다. 그리고 그런 자리에서 사람이 죽어도 3시간 동안 청력은 유지된다는 말을 들었다. 신기해서 의학적 근거가 있는지 찾아보았으나 그냥 속설에 불과하다고 적혀 있었다. 다만 ‘임상적 사망’(심장과 호흡이 멈춘 상태) 이후에도 뇌세포는 즉시 죽지 않고 잠깐 전기적 활동을 보인다고 한다. 즉 “임종 직전까지는 청각이 비교적 오래 유지되는 감각이므로 소리를 듣는 듯한 반응”이 관찰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망 후 장시간 동안 청력이 유지된다는 증거는 없다고 한다. 영석이 생각해도 뇌세포는 산소 공급이 끊기면 수 분 내에 빠르게 손상되므로 뇌 기능, 특히 청각처럼 복잡한 정보처리는 사망 직후 수 분 내로 정지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과학적 합리성에 맞을 것 같았다.

그러나 정선생의 죽음 앞에서 그런 과학적인 근거를 들이대서 조금이라도 더 망자와 같이 있고 싶어 할 곰소댁과 숙희의 마음에 생채기를 낼 필요는 없는 일이다.


“니 염쟁이 아이가! 정 선생 염 함 치러야 안 되겄나?”

영석은 시골에서 어른들로부터 염에 대해서 들은 바가 많았지만, 누군가 하는 말 중에 “염 함 치러야 안 되겄나”가 무슨 의미인지 몰라 흘낏 방금 말한 60대로 보이는 남성을 쳐다보았다. 밀러 신부님께서도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의식한 것인지, 그는 신부님을 바라보며 “정 선생 염을 해주라꼬 하는 거라예”라고 말했다.

“우리 고향에서는 시신을 깨끗하게 정리해서 수의 입히고, 수습하는 것을 ‘염 치른다’라고 표현하거든 예.”

“제 고향이 유교 의식 철저한 안동 아이니 껴”

언젠가 영석이 경북 안동지역 출신의 친구가 해준 말에 따르면, 안동의 장례식은 5일장, 길게는 7일장까지 치르기도 하는데, 이는 상주들이 망자의 죽음을 온전히 애도하고, 모든 친지들이 충분히 조문할 수 있는 시간을 갖기 위함이라고 했다. 그리고 유교적 예법을 철저히 지키며 염습과 입관 절차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고 했다.

“그럼 예법을 잘 아시는 분들이니 두 분께서 장례 절차를 끝까지 좀 도와주실 수 있는지요?”

신부님이 다시 물었다.

“당연히 그라니더”

“그라몬 초혼(魂) 절차부터 밟읍시다 카이.”


자신의 이름이 권정택이라는 사람과 김충호라는 사람이 발 벗고 나섰다.

“곰소댁, 망자의 옷 한 벌 주이소”

곰소댁은 정선생이 평상 위에서 늘 입고 있던 윗도리 하나를 권 씨에게 내줬다.

“원래는 장남을 초혼자로 선정하고 그가 지붕 위로 올라가야 하는 긴데, 자식이 없고 판잣집이라 허접하니, 제가 초혼자로서 대문 밖에서 의식을 진행하겠십니더”

권 씨는 정선생의 옷가지를 들고 대문 밖으로 나가 왼손으로는 옷깃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옷자락을 흔들며 북쪽 하늘을 향해 “정선생! 고복(皐復), 정선생! 고복, 정선생! 고복”하고 세 번을 외쳤다. 그리고 다시 방으로 들어와, 정선생의 몸에 온기가 돌아왔는지를 확인했다. 온기가 돌아올 턱이 없으니, 이제 정선생의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다.

초혼 절차는 떠난 망자의 혼을 다시 불러온다는 의식으로 영석은 어린 시절 할아버지로부터 장례 절차와 혼인 절차에 대해 귀가 따갑게 들은 바가 있어 권 씨 아저씨가 하는 행위가 무엇인지 잘 이해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께서는 ‘고복’에서 고(皐)’는 높고 넓은 땅, ‘복(復)’은 돌아옴을 뜻하는데, “혼이 머물던 집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뜻이라고 하셨다. 즉, 초혼 이후, 불러낸 혼이 집으로 되돌아와 시신과 합한다는 의미로 이어지는 절차로서 상징적으로는 떠난 혼을 붙잡아 가족과 함께 마지막 예(禮)를 나누도록 하는 것이고, 실제로는 슬픔을 형식화하여 공동체가 함께 애도하는 장치이다.

초혼 의식을 마치고 돌아온 권 씨 아저씨는 들고 들어 온 정선생의 윗도리를 잘 접어서 곰소댁에게 건넸다.

“나중에 고인의 시신 위에 덮을 것이니 잘 보관하이소.”

“곰소댁만 남고 다른 분들은 다 나가이소. 인자 염습할라카이”

영석이 할아버지로부터 들은 바에 따르면, 염습(斂襲)은 고인의 시신을 깨끗이 닦아 수의를 입히는 절차라고 한다. 이 절차는 시신 닦기로부터 시작되는데, 이는 살아생전의 더러움을 씻어내고, 정갈한 모습으로 다음 세상으로 가시기를 바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시신이 굳어지면서 흐트러지지 않도록 고인의 손과 발을 가지런히 모아 묶어두는 수족 결박 절차를 진행한 후, 준비된 수의(壽衣)를 고인에게 입혀드리는 절차가 진행된다고 한다. 수의는 고인의 생전 지위나 연령 등에 따라 정해지며, 삼베나 명주와 같은 천연 소재로 만들어진다. 이 절차는 고인이 편안하고 품위 있는 모습으로 마지막 길을 떠나도록 돕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제 숙희도 들어 온나, 신부님도 들어 오이소, 입관(入棺) 절차를 진행할낍니더”

언제 준비했는지, 동네 사람들은 관까지 준비해 놓은 모양이었다.


영석은 네 살 때인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큰어머니 등에 업혀서 아버지가 노란 옷과 노란 모자를 쓰고 네모난 상자에 누워있고, 사람들이 아버지 입에 동전을 물려주던 기억이 있다. 나중에 들은 바에 따르면, 당시의 노란 옷은 삼베옷이었다. 그리고 할아버지와 큰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입관식에 참석한 적이 있는데, 관 바닥에 깨끗한 솜이나 이불을 깔아 고인이 편안하게 누울 수 있도록 준비한 후, 염습이 끝난 고인을 관에 정중히 모셨다. 이때 시신이 흔들리지 않도록 주변에 남은 솜이나 천을 채워 넣어 고정하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인을 관에 모신 후, 관 뚜껑을 덮고 못을 박아 밀봉하는 결관(結棺) 절차가 있었다. 못을 박는 것은 고인이 더 이상 이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않고 편안히 떠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고 했다. 즉 입관은 고인의 육신을 관이라는 공간에 안치하여 이 세상과의 물리적 단절을 상징하는 의식인 셈이다.


이렇게 입관 절차가 끝나자 정선생의 관은 곰소댁 안방 윗목에 놓였고, 동네 사람들이 준비한 낡은 병풍으로 가려졌다. 그리고 곰소댁은 비로소 문상객들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영석은 깜짝 놀랐다. 이 동네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나 싶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문상을 하러 왔다. 흰색 상복을 입은 곰소댁과 머리에 하얀색 리본을 꽂고 역시 흰색 상복을 입은 숙희가 손님을 맞이했는데 숙희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이자, 곰소댁은 영석에게 숙희를 부탁하고 자기만 손님을 맞았다. 사람들은 비록 얼마 안 되는 돈이라도 들고 와서, 문상을 하고 갔다. 돈이 없는 사람은 두부 한모라도 보태려 했다. 영석은 그들의 따뜻한 마음씨에 눈물이 나왔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동네 아주머니들은 각자 집에서 가져온 쌀과 김치로 부엌을 채우고, 솥에 밥을 안치고 뜨끈한 김치찌개를 끓여냈다. 냄새는 좁은 복도를 타고 흘러나와, 문상객들의 허기를 먼저 위로했다. 동네 남자들은 검은 옷 대신 칙칙한 작업복 그대로, 혹은 그나마 깨끗한 셔츠를 걸치고 와서 영정 사진을 나르고 조문을 받았다. 봉투 속의 얼마 안 되는 부의금은 각자의 형편을 말했지만, 그 봉투를 건네는 손만큼은 진심으로 떨렸다. 밤늦도록 빈자리를 지키는 것도, 술잔을 채워주며 "고생 많았지" 하고 건네는 말도 모두 오목교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슬픔은 화려한 꽃으로 치장되지 않았다. 소박한 밥과 따뜻한 국, 그리고 그보다 더 따뜻한 눈빛과 말 한마디가 그들의 부의금이었고, 조의였다. 그렇게 오목교 사람들은 서로의 어깨를 기대며, 또 한 사람의 이웃을 떠나보내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가장 인간적인 장례식이 치러지고 있었다.


영석은 수험생으로서 장례식에 끝까지 참여할 수 없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정선생은 병원에서 밀러 신부님으로부터 신부가 축성한 기름을 정선생의 이마와 손에 바르며 기도하는 병자성사(Unctio infirmorum)를 받아 경기도에 있는 천주교 묘원에 묻혔다고 하였다. 영석에게 정선생 장례 절차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천주교 신부가 한국적·유교적 장례 절차를 거리낌 없이 받아들인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영석은 장례가 끝나고 나서 밀러 신부님께 이에 관해 여쭈어보았다. 신부님은 1939년에 교황청이 중국의 제사·유교 예절인 ‘중국 전례’를 부분적으로 허용하였고, 1965년 바티칸 공의회 이후 한국천주교회도 전례의 토착화를 적극 추진하고 있다고 했다. 다만 국화 헌화, 절, 향, 위패 없는 분향 같은 유교적 형식을 변형하여 수용하더라도 제사, 신위 모시는 행위, 국, 부적 등은 금지하는 편이라고 했다.


곰소댁은 마치 우울증에 걸린 사람처럼 며칠간 장사도 안 나가고, 밥도 안 먹고, 정선생이 앉아 있던 평상에 앉아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숙희는 그런 엄마가 낯선 것인지, 엄마 눈치를 보며 엄마가 앉아 있는 평상 주위만 빙빙 돌았다.

곰소댁은 정선생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것은 단순히 한 존재의 부재가 아니라, 자신의 세계가 무너지는 경험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눈앞에서 모든 것이 그대로 있는 듯 보였지만, 그 순간부터 사물들은 의미를 잃었을 것이다. 그가 쓰던 평상, 그가 쓰던 밥그릇, 수저와 젓가락 마저 자신을 향해 “그는 이제 없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말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영석은 자신의 일기장에 정선생을 보낸 마음을 유추하여 다음과 같이 적어놓고서는 “내가 사랑이 뭔지를 안다고 글 쓰는 사람을 흉내 내고 있지?” 하는 생각에 혼자 피식 웃었다.


처음에는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마치 그가 지금이라도 문을 열고 들어와 무심히 웃으며 말을 걸 것만 같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정선생의 부재는 점점 더 선명하게 그녀를 조일 것이다. 그의 빈자리는 차갑게 남아있고, 그와 나누던 대화가 끊긴 자리는 어떤 말로도 메울 수 없을 것이다. 슬픔은 파도처럼 밀려왔다가도, 갑작스레 고요히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고요 속이 더 괴로울 것이다. 울고 나면 잠시 가벼워질 줄 알았지만, 그리움은 오히려 더 무겁게 내려앉을 것이다. 그리고 죽음은 단절이 아니라, 끝없는 그리움의 시작임을 알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웃고 떠들고, 시간은 흐르지만, 그녀 안의 시간은 그가 떠난 순간에 멈추어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는 것은 단지 한 사람을 잃는 게 아니라, 자신의 삶 일부가 찢겨나가 다시는 되돌아올 수 없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일이니까.


영석은 갑자기 수아가 간절하게 그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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