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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목교

1078년-1980년 언저리

by 서완석

제14화 수아와 남산


영석은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중앙극장에서 '토요일 밤의 열기'를 보던 날 밤, 어둠 속에서 수아의 따뜻한 손이 영석의 손을 스치듯 잡았을 때, 영석은 마치 전기에라도 감전이 된 듯 짜릿했고,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극장 안이 어둡기 망정이지, 밝은 대낮이라면 영석의 속내가 수아에게 고스란히 드러났을 뻔했다. 영석의 가슴은 눈치도 없이 쿵쾅거리고 숨을 쉬기가 곤란했지만, 수아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아주 조금씩 호흡을 하느라 힘이 들었다. 그 순간만은 오목교 판자촌에 사는 재수생이 아니라 세상 전부를 가진 부자가 된 것만 같았다. 수아는 겉으론 툴툴거리고 장난기가 많아 보이지만, 그의 미래를 진심으로 응원해 주는 사람인 것 같았다. 남산도서관에 정성껏 싸 온 도시락, '공부 열심히 하라'는 짧지만 힘이 되는 말들, 그리고 그 손길까지. 영석은 수아에게 받은 이 모든 것이 꿈이 아닐까, 곧 사라질 신기루가 아닐까 두려웠다.


새벽의 오목교 판잣집은 이제 뼛속까지 시리다. 누나는 아침 일찍 출근했다. 영석은 남산도서관에 가기 위해 서둘러 청소를 시작했다. 자기보다 더 일찍 귀가할 누나가 힘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오늘 세상 돌아가는 모습은 어떤지 알아보기 위해 TV를 켰다. TV에서는 중공의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을 할 것 같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뉴스를 진행하는 아나운서는 남색 정장 차림으로 미국과 소련의 군사 동향을 전하고 있다. 그리고 화면이 바뀌면서 중공에 대한 보도를 내보내기 시작했다.


“최근 중공의 덩샤오핑은 이른바 ‘개혁과 개방’을 부르짖으며 내부적으로 심각한 혼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공산주의 계획 경제가 결국 한계에 부딪혔으며, 자본주의의 효율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공산 정권의 내부적 모순을 보여주는 증거라는 분석입니다.”

아나운서의 말은 계속되었다.

“현재 중공 지도부의 핵심 실세로 떠오른 덩샤오핑은 지난 수십 년간 공산주의의 근간이었던 마오쩌둥의 교리를 사실상 부정하며, 개인과 시장의 효율성을 강조하는 발언을 거침없이 쏟아내고 있습니다. 특히 덩샤오핑은 경제를 살리는 것이 최우선적인 목표라며, 이른바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을 공공연히 주창하고 있습니다. 즉, ‘쥐를 잡는 것이 중요할 뿐,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무슨 상관이겠냐’는 것입니다. 이를 다시 풀어 해석하자면, 공산주의를 하든 자본주의를 하든 인민들이 잘 먹고 잘살면 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는 국가의 정체성이자, 혁명의 근본인 공산주의 사상을 사실상 도외시하고 자본주의의 생산 방식을 도입하겠다는 파격적인 선언으로 해석됩니다. 전문가들은 이 흑묘백묘론이 장기적으로 중공 체제의 이념적 기반을 약화하게 만들고, 결국은 체제 내부의 혼란과 동요를 가속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화면에는 덩샤오핑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흐릿한 사진과 함께, 공산당 간부들이 모인 회의장의 모습이 짧게 지나갔다. 아나운서는 이들이 ‘사상적 일탈’을 하고 있으며, 이는 곧 체제의 실패로 이어질 것이라는 투의 해설을 덧붙였다.


“거짓말.” 영석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영석은 가판대에서 사서 읽은 신문을 통해 덩샤오핑이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외치며 수천 년간 닫혔던 나라를 경제라는 실리를 위해 열어젖히려 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저들은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변화를 선택하려 하는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영석은 불안한 눈빛으로 다시 텔레비전을 힐끗 보았다. 그리고 저 텔레비전 속 ‘개혁과 개방’이라는 단어가 희망이 아닌 또 다른 공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들이 유신체제, 곧 박정희 일당독재 체제 유지를 위해 ‘빨갱이’를 만들어 내는 동안, 정작 진짜 공산주의 국가인 중공은 이념의 껍데기를 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영석이가 살고 있는 이 나라는 아직도 ‘빨갱이’라는 허상을 방패 삼아 누나의 동료들에게 똥물을 뿌리고 입을 막고 있는데, 텔레비전 속의 세상은 벌써 다음 장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영석은 밖으로 나가 오목교를 바라보며 크게 심호흡했다. 그리고 오목교 위로 차가운 아침 햇살이 비치는 것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그 빛은 희망처럼 밝았지만, 그 빛 아래의 현실은 여전히 암담했다.


영석은 어제 배달된 수아의 편지를 다시 꺼내 읽었다. 오늘 혹시 시간이 허락된다면 수험생을 위해 영양 보충을 해주겠다는 내용의 편지였다. 영석은 분홍색 편지지에 정갈하게 쓴 수아의 편지를 다시 곱게 접어 가방 속에 넣었다. 수아는 오후 6시에 한국은행 앞에서 만나자고 했다. 영석은 깨끗하게 다려 입은 옅은 하늘색 체크무늬 셔츠에 최대한 촌스럽지 않아 보이는 바지를 골랐다. 남대문 시장 입구는 오늘도 왁자지껄한 모습이다. 영석은 남산도서관에 가방을 둔 채, 정확히 6시에 한국은행 앞에 도착했다. 5분 정도 지났을까 싶을 때, 수아의 모습이 보였다. 여전히 보이시한 커트 머리에 딱 떨어지는 데님 재킷을 걸치고, 발에는 굽 낮은 운동화를 신은 모습이 시장의 낡은 활기와 묘하게 대비되며 튀었다. 영석에게는 청색 재킷이 그녀의 성격과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춘! 또 늦었지? 미안해!"

수아는 넉살 좋게 영석의 팔을 툭 쳤다. 영석은 수아의 그 시원스러운 태도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아직도 여전히 낯설었다.

"아냐, 나도 방금 왔어. 여긴 왜 오자고 했어?"

"가방은 도서관에 두고 왔나 보네? 그래 오늘은 내가 영양 보충을 해주기로 했으니 얼른 먹고 들어가서 다시 공부해? 알았지?"


수아는 영석의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시장 깊숙이 걸어 들어갔다. 그곳은 온갖 냄새와 소리가 뒤섞인 거대한 미로였다. 구수한 풀빵 냄새, 생선 비린내, 사람들이 고함치는 소리, 손수레 위에서 “골라, 골라”를 외치며 손뼉을 치는 사람들, 엄청난 무게의 짐을 어깨에 메고 와서 트럭에 싣는 사람들이 뒤섞여 만들어 내는 인간다운 것들로 가득했다. 늦가을인데도 사람들의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수아는 익숙한 듯 능숙하게 좌판 사이를 헤집고 다녔다.

“삼춘. 늘 도서관에만 틀어박혀 있었으니 이런 곳도 와보면서 삶의 활력을 느껴봐”

수아는 멈춰 서서 좌판에 쌓인 수입 물건들을 흥미롭게 구경했다. 그녀의 눈빛은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그러더니 낡은 셔츠들을 파는 가게 앞에서 멈췄다.

“삼춘, 이리 와 봐. 이거 어때?”

수아는 푸른색 줄무늬가 있는 옥스퍼드 셔츠를 집어 들었다. 영석은 옷이 예쁘다고 생각했지만, 왠지 모르게 비쌀 것 같아 주춤거렸다.

“나?, 나한테 좀 클 것 같은데…”

“크면 어때. 소매 걷어입으면 되지. 그리고 그 촌스러운 옷들 좀 벗어던져. 옷이 날개라고 했어. 내가 삼춘 서울 사람 만들어 줄게. 아줌마, 이거 얼마예요?”

영석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촌스러운 옷’이라는 말이 살짝 영석의 가슴에 생채기를 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아가 자신을 위해 뭔가 해주고 싶어 한다는 사실에 더 마음이 흔들렸다. 계산을 마친 수아는 영석에게 억지로 셔츠를 들게 했다.


“삼춘, 내가 저녁으로 삼춘에게 무엇을 먹일까 고민했는데, 설렁탕이나 곰탕, 갈치조림, 그리고 칼국수 중에서 골라봐”“

그렇지 않아도 시장 골목에 들어서니 멸치 육수 냄새가 진동하고 있어서 칼국수 한 그릇을 먹고 싶었다. 그리고 구수한 설렁탕 냄새도 영석의 마음을 빼앗았다. 그러나 역시 엄마가 가끔 해주시던 갈치가 너무나 먹고 싶었다.

“갈치조림 어때?”

“좋았어! 갈치조림 먹으러 가자”

시장 깊숙한 곳, 갈치골목은 늦가을에도 후끈했다. 골목 위로는 낡은 양철 지붕이 낮게 드리워져 있었고, 그 아래 좁은 흙바닥은 온종일 오간 사람들의 발자국과 붉은 양념 자국으로 질척거렸다. 골목 전체는 연탄재 타는 냄새, 생선 비린내, 그리고 매콤한 고춧가루가 뒤섞인 김으로 자욱했다. ‘원조’를 내건 작은 식당들이 어깨를 맞대고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식당 앞 평상에는 아줌마들이 쭈그리고 앉아 갈치의 내장을 손질하며 부지런히 움직였다. 쉴 새 없이 자글자글 끓는 찌개 소리와 왁자지껄한 대화 소리가 뒤섞여, 골목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아궁이 같았다.


수아를 따라 낡은 식당 안으로 들어서자, 좁은 1층 홀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 숨이 막힐 듯했다. 주인아주머니의 손짓을 따라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밟고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은 천장이 매우 낮고 좁은 다락방 구조였다. 창문도 없이 어둡고 환기가 잘되지 않아 1층보다 냄새는 더 진했지만, 낮은 합판 칸막이와 테이블 몇 개가 전부인 이 공간은 1층의 소란스러움으로부터 잠시 벗어난 은밀하고 아늑한 위안감을 주었다. 허리를 숙여 작은 상 앞에 앉자, 세상의 복잡함과는 잠시 단절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잠시 후, 낡은 양은 냄비가 상 중앙에 놓였다. 냄비 바닥에서는 양념이 걸쭉하게 졸아 뜨거운 김을 뿜었고, 다락방 공기를 단숨에 후끈 달아오르게 했다. 조림은 눈으로 보기에도 강렬했다. 굵게 빻은 고춧가루와 양념이 두툼하게 썰린 갈치 토막들을 완전히 뒤덮고 있었으며, 뭉텅뭉텅 썰어 넣은 무와 파가 그 위에 얹혀 있었다. 숟가락으로 국물을 맛본 순간, 짜릿한 매콤함이 혀끝을 강타하며 온몸의 피로를 씻어냈다. 투박한 고춧가루의 얼얼함 뒤로는 갈치와 멸치에서 우러나온 깊고 짭조름한 감칠맛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잘 익은 갈치 살은 단단하고 쫀득했으며, 바닥에 깔려 푹 무른 무는 달큼한 국물을 잔뜩 머금어 영석의 입안에서 스르르 녹아내렸다. 이 갈치조림은 단순히 한 끼 식사가 아니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밥에 양념을 비벼 먹는 순간, 매콤하고 든든한 맛은 팍팍한 시대를 버텨낼 가장 원초적이고 확실한 삶의 힘을 공급해 주는 듯했다.

“어때?”

“응! 너무 맛있어! 우리 엄마가 해주시던 바로 그 맛!”

“오! 그렇다면 오늘 성공적인 선택이었네”

“어때? 영양 보충이 된 것 같아?”

“아무렴 그렇지”

“갈치는 지방 함량이 적고 살이 부드러워 소화가 잘되는 고품질 단백질을 다량 함유하고 있대. 그래서 잦은 야근이나 공부로 지친 수험생 및 직장인의 체력 유지와 회복에 큰 도움을 준다는 거야. 그리고 흰살생선인 갈치에는 특히 DHA(도코사헥사엔산)와 EPA(에이코사펜타엔산) 등 오메가-3 지방산이 풍부하대. 이 성분들은 뇌세포의 기능을 활성화하고 기억력과 학습 능력을 높여주어 수험생에게 매우 중요한 영양소라는 거지”

“아니! 그런 걸 어떻게 알았어?”

“응, 가정 시간에 배운 것도 있고, 오늘 남대문 시장에 오기 전에 수험생에게 어떤 음식이 좋을지 사전 조사를 했지”

“아! 그렇구나”

영석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여기 껌있어. 나는 롯데껌 3총사 중에서 쥬시후레시껌을 제일 좋아해. 삼춘은 후레시민트, 그리고 스피아민트 중에서 어떤 걸 좋아 해? 난 빨강색이나 파랑색 보다 노랑색이 좋아서."

"응! 나도 쥬시후레시가 좋아. 난 계절 중에 봄이 가장 좋은데 노랑색이 봄을 나타내는 색같아서 말이야."


“이제 도서관까지 걸을까?”

수아는 걷기와 비 맞기를 좋아한다고 여러 번 말했다. 이제 영석에게 수아와 걷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졌다. 영석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수아가 구두를 신은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남대문 시장 갈치골목을 빠져나온 후, 늦가을 해는 벌써 서쪽 남산 너머로 자취를 감춘 뒤였다. 영석과 수아는 어둠이 짙게 깔린 거리를 걸었다. 시장 어귀의 숨 막히는 열기와 왁자지껄한 소란은 그들이 남산 쪽으로 방향을 틀자마자 차가운 공기 속에 빠르게 묻혔다.

“대학생들이 자주 이용하는 길이야. 늦게까지 가로등이 켜있지만, 대학생들은 용케도 어두운 곳을 찾아 몰래 키스를 하기도 한 대. 그런 곳은 여기 말고도 삼청공원에도 있다더라. 삼청공원 절반은 아예 가로등이 없다고 하더라고” 수아가 속삭이듯 말했다.

영석은 그녀의 데님 자켓과 짙은 코듀로이 바지가 어둠 속에서도 왠지 모를 단단함을 풍긴다고 생각했다. 영석은 어릴 때 엄마가 ‘고리땡’이라고 부르던 것이 사실은 ‘골덴’의 일본식 발음이고, 골덴은 프랑스어 코듀로이(Corde du Roi)의 잘못된 발음이라고 하는 것을 들은 바 있다. 그리고 ‘코듀로이’는 ‘왕의 밭이랑’ 뜻을 가지고 있다는데 영석이가 생각해도 코듀로이 천이 밭이랑의 모습을 닮은 것 같아 신기했다. 따라서 영석은 코듀로이 바지만 보면 언제든지 이러한 생각에 빠지곤 한다. 그런데 오늘 또 수아의 바지를 보며 또 잠시 생각에 빠져 수아가 무슨 말을 했는지 놓치고 말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혹시 내 이야기를 듣고 잠시 엉큼한 생각을 한 거 아냐?”

“아냐, 아냐!”

영석은 당황해 두 손을 내저으며 도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냐는 태도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면 듣고도 짐짓 모른 체 하는 건가?”

수아는 갑자기 가던 길을 멈추더니 영석의 눈을 똑바로 보겠다는 듯이 영석의 두 팔을 붙잡아 돌려세우고는 영석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수아의 얼굴이 바로 눈앞에 있다는 사실에 영석은 아찔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아냐! 아냐! 수험생이 그래서는 안 되지, 항상 맑은 정신으로 공부해야지”

수아는 세차게 제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리고 성큼성큼 앞장서 걸어갔다.


남산도서관으로 향하는 도로는 가파르고 어두웠다. 가로등은 듬성듬성했고, 그 빛은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잔뜩 웅크린 채 땅바닥만 비추는 듯했다.

“아! 나도 대학생이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영석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잠시 오르막길 중간에 멈췄다. 영석이 고개를 들자, 서울 시내의 불빛이 발아래로 펼쳐졌다. 차가운 늦가을 공기가 영석의 폐 속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다. 눈앞에 보이는 도서관의 육중한 건물이 그의 ‘수험생활’을 지탱하는 거대한 위장막처럼 느껴졌다. 평범한 재수생의 불안과 달콤한 남녀관계가 남산의 어둠 속에서 차갑다가 뜨거워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저쪽이 강남이지? 저곳은 불이 꺼지지 않는군”

영석이가 한남대교 건너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불빛이 아니라, 돈의 속도가 보이는 거지. 저 불빛들은 땅 투기로 번 돈, 그리고 노동자들의 피를 짜내 쌓아 올린 공장의 이윤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졸부들이 득실득실하니까”

“경기고, 휘문고, 서울고, 중동고, 세종고, 숙명여고, 경기여고 등 여러 고등학교들이 박통 지시로 저쪽으로 옮겨 갔잖아”

“우리 큰오빠도 작년에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로 이사 갔어. 내년 9월에 한양쇼핑센터 영동점‘이 문을 연다고 하더군?”

“우리 큰오빠가 앞으로 강남이 강북보다 훨씬 발전할 거라고 했어. 개포동에서 돼지 키우던 사람들이 떼부자가 되었다는 거야”

영석에게는 모두 꿈같은 이야기였다.


“우리 아빠와 큰오빠가 저놈의 강남을 놓고 심하게 다툰 적이 있어”

“왜?”

영석이 물었다.

“우리 큰오빠는 박통이 강남을 개발하는 이유를 몇 가지로 설명했는데, 첫째, 박통은 인구 분산과 도시 가능 재배치를 가장 큰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다는 거야. 1960년대 이후 서울로 인구가 급격히 집중되면서 강북 지역은 심각한 과밀화와 주택난, 교통난에 시달리고 있잖아. 따라서 강북 지역의 인구 집중을 막기 위해 정부는 백화점, 제조업 시설, 대형 요식업소 등의 신설 및 증설을 금지했어, 그리고 그 대안으로 논밭이 대부분인 한강 이남, 즉 강남 지역에 대규모 주택 단지를 조성하고 인구를 이주시키려는 목표를 세우고 최종적으로 서울 인구 비율을 강북 40%, 강남 60%로 분산시킬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거야. 둘째, 안보 및 군사적 필요성인데, 북한 무장 공비가 청와대 코앞까지 침투했던 1968년의 1.21사태를 겪으면서 강북 도심의 기능이 북한의 공격에 너무 취약하다고 판단했다는 거야. 그리고 이 사건 이후로 미군이 강남으로 기지를 이전하는 것을 막기 위해 마구 아파트를 지으라고 했대. 유사시에 행정 기능이 마비되고 인구가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 도심의 기능을 한강 이남으로 분산시켜야 할 군사적 필요성 때문이라는 거지. 제3한강교 건설 역시 군사적 이동 경로 확보라는 측면이 강하다는 거야. 마지막으로 이러한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인구를 강남으로 빠르게 끌어들여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서울 시민의 교육열을 정책적으로 활용할 필요성이 있고 그래서 1970년대 중반부터 명문고등학교를 강남으로 강제 이전시키고 있는 거래"


“그래서 큰오빠가 먼 미래를 바라보며 강남으로 이사하신 것이네”

“우리 큰오빠는 아주 실리적인 사람이고 돈 냄새를 아주 잘 맡아”

“그런데 아버지가 왜 큰오빠와 다투었다는 거야?”

“우리 아빠는 장사를 오래 하신 분이지만 우직하신 분이고 박통을 아주 싫어하며 비판적인 입장을 가진 분이야. 앞에서 말한 모든 문제는 박통의 중앙집권화 정책으로 인해 생긴 것이라고 보고 있기 때문이지”

“우리 아빠는 강남 개발의 이면에는 정치 자금이나 경제 개발 자금 마련이라는 엉큼한 속내가 숨어 있다고 보고 있어. 정부는 강남 지역의 토지를 개발하면서 토지를 구획하고 기반 시설을 건설하여 가치를 높인 후, 상승한 가치만큼 일부 토지를 정부가 환수하여 매각하는 방식인 환지 방식을 통해 막대한 개발 이익을 얻으려 하고 있대. 아빠는 이 과정에서 부동산 투기가 횡행하고 있고, 정부는 이를 통해 얻은 이익의 일부를 개발 독재 체제 유지를 위한 정치 자금이나 다른 경제 개발 사업의 자금으로 활용할 것이 뻔하다고 보고 계셔."

”그리고 앞으로 강남 개발이 경제적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계급 문제를 발생시킬 거라고 하셨어. 즉, 강남 개발은 공정하게 부를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의 개발 정보와 특혜를 미리 알고 투자한 소수에게 막대한 이익을 몰아주어 벼락부자, 다시 말해, 졸부를 양산하고 이는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와 서민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줄 것이며, 부의 대물림을 통해 계층 간의 불평등을 고착화시킬 것이라고 말씀하셨어. 또한 정부가 토지 구획 정리 사업 등을 통해 부동산 투기를 사실상 묵인하거나 조장하여, 부동산을 ’투기 수단‘으로 변질시키는 국가 주도 투기사업이며, 이는 주택을 ‘인간다운 삶을 위한 거주 공간’이 아닌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비윤리적인 정책이라고 생각하고 계셔.”

영석에게 수아는 엄청난 분석력과 기억력을 가진 사람으로 보였다. 아무리 오빠와 아빠의 이야기를 전달한다고 하지만 어떻게 저렇게 논리정연하게 말할 수 있는지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공부를 못했다는 것도 거짓말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 아빠는 개발은 강남에 집중되면서 강북 서민들의 삶의 터전은 오히려 황폐해진다는 비판도 하셨어. 인구를 강제로 분산시키기 위해 강북의 상업 시설 신설을 억제하고 명문 학교를 강제로 이전시키는 것은, 수십 년간 형성된 강북의 도시 기능과 서민들의 공동체를 파괴하는 행위라는 거야. 전통적인 삶의 터전인 강북을 쇠퇴시켜 서민들을 강남의 높은 주거 비용 아래로 밀어 넣는 서민 생존권 침해라고 보고 계신 거지. 또한 사대문 안의 역사적인 서울이 가진 정체성과 문화적 가치를 무시하고, 단순히 새로운 아파트와 도로만을 지향하는 개발은 서울의 역사성을 말살하는 것이라 비판하셨어. 그리고 앞으로 강남 사람들은 강북 사람들을 무시하고 자기들만의 세상을 만들어 자기들만의 리그에 갇혀 살 것이라고 했어”


“그런데 우리 아빠가 가장 화를 내시는 부분은 유신체제 하에서 강남 개발이 시민들의 의견 수렴 없이 독단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야. 대규모 국토 개발 계획을 수립하면서 시민의 참여나 공론화 과정 없이, 군사정권의 상명하달식으로 정책을 밀어붙이는 것은 민주적 절차를 위반한 거래. 그리고 안보와 인구 분산이라는 명분 뒤에, 실제로는 정치 자금을 마련하고 권력 실세들의 부동산 투기 기회를 제공하는 등 권력층의 사익 추구가 숨어 있다고 강하게 비판하고 계셔. 결국 개발 정책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겉만 바꾸는 눈 가리고 아웅식이라는 거야. 예를 들어, 강북의 판자촌을 철거하면서 서민들을 강남 외곽이나 성남 등으로 강제 이주시키려다가 일어난 광주 대단지 사건은 주거 빈곤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라, 그 장소만 옮겨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거지. 또한 진정한 경제 성장은 노동자의 임금 현실화와 분배 정의를 통해 이루어져야 하는데, 정부는 노동자를 억압하면서 겉으로는 화려한 신도시를 건설하는 것으로 가난과 불평등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가리려 한다고 하셨어.”

영석은 수아의 이야기를 들으며 마치 대학교 교수님으로부터 강의 세 시간을 들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그걸 다툼이라고 표현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 오히려 건전한 토론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영석이 물었다.

“그렇게 토론만 한다면야 무슨 문제가 있겠나? 큰오빠가 강남에서 사업을 한다고 막대한 돈을 내놓으라고 아빠를 윽박지르니까 문제지”

“큰오빠는 아빠가 돌아가시면 자기가 받을 몫을 미리 내놓으라는 거야”

“어, 그래?”

영석은 그럴 수가 있느냐는 표정으로 수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한테도 빨리 시집을 가라고 했어”

“우리 큰오빠는 내가 결혼하면 '시댁'의 사람이 된다는 ‘출가외인’의 명분을 만들어 우리 아빠의 재산에 대한 상속권을 내가 스스로 포기하도록 압력을 넣기 쉬울 것이라고 보고 있는 거야. 즉, 시집가서 잘 살 것이니, 친정 재산에는 더 이상 관여하지 말라는 거지.”

영석은 자신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서울에서는 이루어지는구나 싶어 우울해졌다.

“그래서 일찍 시집을 가려고?”

영석은 초조한 마음으로 물었다.

“삼춘은 내가 시집을 가면 좋겠어?”

영석은 무척 당황해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대답해 봐. 삼춘은 앞으로 꿈이 뭐야?”

“응! 나는 대학교수”

“그래? 나도 사모님이 한번 돼볼까?”

영석은 몽롱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우리 아빠가 큰오빠에게 재산 많이 주고 쌍문동으로 이사 가시려나 봐”

“그리고 우리 아빠가 자꾸 나한테 잠실에 땅을 가지고 있다가 부자가 된 아빠 친구 아들에게 시집을 가라는 거야”

영석은 천국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하는 기분이었다.

영석은 그저 “나이가 아직 너무 어린데?”라고 말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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