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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놈

by 서완석

Ⅰ. 〈만남〉

많은 일들은

나도 모르게,

갑자기 시작되지.


비 내리던 날,

우산이 하나뿐이어서

어깨가 스쳤을 뿐인데.

그때는 몰랐지.

그게 처음의 시작이었다는 걸.


눈빛이 머물렀고,

말이 늦게 떨어졌고,

그 짧은 망설임 사이로

무언가 내 안으로 스며들었지.


그놈은 늘 그렇게 시작하지.

아무 일 아닌 것처럼 슬그머니 다가와

모든 걸 바꿔버리는

그 조용한 한순간의 틈으로.

Ⅱ. 〈흔들림〉


그놈이 내 안에서 뿌리를 내릴 때,

세상의 모든 빛깔이 바뀌었지.


사소한 하루도 특별한 이름이 되었고,

무의미한 기다림마저도 의미가 되었지.


발소리 하나에 심장이 내려앉고,

오지 않는 연락에 창밖만 바라보았지.


나의 시간은 그놈이 나타날 다음 순간에만 있었고,

나의 우주는 그놈의 눈빛 안에서만 돌았지.


위태로운 줄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지.

이 깊은 흔들림이

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착각일지라도,

그때는 영원이라 믿었지.

Ⅲ. 〈기억〉


잊은 줄 알았지.

시간이 다 데려간 줄 알았지.


그런데 문득,

낯선 골목의 냄새나

라디오에 흘러나온 옛 노래가

너를 불러오더라.


그때의 공기,

그때의 햇살,

그때의 우리.


이제는 아무 일도 아닌 것들이

가끔 내 안을 스쳐 가더라.

그리움이라 부를 것도 아니고,

미련이라 하기도 애매한

그냥 오래된 기억 하나가

아직 내 안에 살고 있더라.

Ⅳ. 〈사랑〉


영원할 줄만 알았던 게 잘못이었지.

내 몫일 줄만 알았던 게 잘못이었지.

아름다움이 머물 줄 알았던 게 잘못이었지.

떠돌이 마음인 줄 몰랐던 게 잘못이었지.


떠난 것이 돌아왔다면

그건 아직 완전히 떠난 게 아니야.

다시 온 게 아니라

그냥 미련이 잠시 머문 거야.


추억 붙잡고 울지 마,

다신 전화 같은 거 하지 마.

그건 이미 끝난 이야기야.


그러다 보면 어느 날

유리창의 성에가 사라지고

봄이 왔다는 걸 알게 되겠지.


그놈은,

원래 그런 놈이야.

내일 오후 3시 이전에 '오목교'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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