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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의 손이 이끈 여정

by 서완석

미국 유학 시절, 여행은 꿈도 못 꾸던 내게 중학교 동창 흥룡이가 LA 왕복 비행기표를 보내왔다. 그것은 지하철 Red Line 종점인 메릴랜드주 Glenmont 역에서 학교가 있는 워싱턴 DC의 Tenleytown 역까지 쳇바퀴 돌던 나의 삶에 한 줄기 청량한 바람이었다. 그 덕분에 LA와 라스베이거스를 여행한 기억은 두고두고 잊을 수 없었다. 그 후 흥룡이는 미국에서 제일 큰 김치공장을 운영하다가 이를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 팔았는데, 내게 언제 다시 미국에 올 거냐고 자주 물었다. LA에 사는 또 다른 고등학교 친구 항렬이도 그랬다. 흥룡이가 비행기만 타고 오면 모든 걸 책임진다는데 고생스러웠던 유학 생활이 떠오르고 장시간의 비행도 걱정스러워 대답을 미루고 있었다. 그런데 맏딸이 마일리지를 이용해 6개월 전에 예매하면 왕복 35만 원에 다녀올 수 있다니 갑자기 친구들이 그리워졌다. 참말로 요망스러운 게 인간 심사다.


드디어 지난 2월, 25년 만에 다시 LA 공항에 도착했는데 항렬이가 마중을 나왔다. 은퇴한 초로의 친구를 보니 별놈의 생각이 다 들었다. 언제부터인가 은행직원이 아버님에서 어르신으로 바꿔 부르기에 속으로 “고객님이라 부르면 될 것을 굳이 저렇게 부르는 이유는 뭐람” 하고 괘씸하게 생각했는데 친구 모습을 보니 내가 참 속 좁은 인간이었다. 여하튼 항렬이 집으로 가서 그의 아내와 딸들을 보니 너무나 반가워 살짝 흥분한 내게 친구는 말 많은 게 제 마누라 닮았노라고 구시렁거렸다. 말 없는 놈이 몇십 년 말 많은 아내와 살았으면서 오랜만에 본 친구의 수다는 왜 못 견디는 것일까? 자꾸만 “난 미쿡 놈이야”라고 하는 것도 귀에 거슬렸다.


흥룡이의 92세 어머니는 아직도 고우셨고, 아내는 여전히 쉬지 않고 집안일을 하고 있었으며, 아이들은 훌쩍 자라있었다. 친구가 낯선 미국 땅에서 자리 잡고 풍족한 삶을 살 수 있게 된 데에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성질 급한 친구를 도닥여 가며 살아온 속 깊은 아내의 도움이 가장 컸으리라. 귀찮을 법도 한데 내게 극진한 대접을 해준 은혜를 어찌 갚을까 싶다. 흥룡이는 내게 용돈도 두둑히 주었는데, 아깝고 미안해서 쓸 수가 없었다. 나중에 남은 돈을 돌려주었더니 쇼핑센터에 가서 옷과 약 등을 잔뜩 사주며 “네 돈 네가 쓴 거야”라고 말했다.


항렬이가 마련한 3대 캐년 리무진 버스 투어로 1일 차에 간 라스베이거스는 과거에 비해 훨씬 더 화려하고 볼 것도 많아졌다. 2일 차에 이르러 유타 사막의 붉은 바위와 먼지 날리는 평원을 달릴 때는 곧 존 웨인이 말을 타고 나타날 것만 같았다. 유타주 남서부 끝에 위치하고, ‘신의 정원’이라 불리며 신비한 자연경관과 함께 거대한 사암 절벽들로 둘러싸인 웅장한 자이언 캐년(Zion Canyon), 침식암 기둥인 후두(Hoodoo) 지형으로 유명한 브라이스 캐년(Bryce Canyon), 나바호 인디언들이 관리하는 사진작가들의 성지로서, 사암의 오랜 침식 작용으로 만들어진 물결모양의 협곡 색과 빛이 어우러져 그 신비함을 필설로 다 표현할 수 없었던 앤틸로프 캐년(Antelope Canyon), 말굽 모양으로 콜로라도강이 깎아지른 붉은 절벽을 안고 흐르며 만들어 낸 한 폭의 거대한 수묵화 같았던 홀스슈 벤드(Horseshoe Bend) 등은 신의 존재를 의심할 어떠한 구실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역시 압권은 그랜드 캐년(Grand Canyon)이었다. 신이 빚은 지상 최대의 조형물,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관광지 1위, 그보다 더 적절한 말을 찾을 수 있을까? 매더 포인트(Mather Point)에 섰을 때,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붉은빛과 황금빛의 협곡 아래로 바람이 흐르고, 그 장엄한 자연의 침묵은 어떤 말보다 깊었으며, 내 안의 소란도 잠잠해졌다. 경비행기를 타고 하늘에서 바라본 경관은 영겁의 한숨이 대지를 갈라놓은 듯했고, 사소한 나의 고민은 한낱 먼지에 지나지 않을 뿐이었다. 그리고 흥룡이와 함께 갔던 LA 산불 지역은 맑은 하늘 아래 끝없이 펼쳐진 아름다운 남부 캘리포니아 해변과 묘한 대조를 이루면서 다시 한번 자연의 거대한 힘을 실감케 했다. 또한 항렬이와 그의 딸 부부가 안내한 유니버셜 스튜디오에서는 시간의 레일 위에 올라 아이처럼 놀라고 웃으며 현실을 잊어버리는 마법을 경험했으며, 게티(Getty) 미술관에서는 예술이 세대를 건너 이어주는 침묵의 유산을 원 없이 감상했고, 퇴역한 미드웨이호가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샌디에이고에서 흥룡이가 사준 해산물 요리를 먹을 때는 태평양이 한나절 동안 익힌 풍경 한 조각을 먹는 것 같았다.


어느 날, 흥룡이는 자주 사용하지 않는 자동차 한 대를 자신의 시니어 하우스에 가져다 두어야 한다면서 내게 테슬라 자율주행자동차를 운전해 따라오라고 했다. 상당히 먼 거리인데 운전대를 놓고 가만히 있어도 되는지, 신호등 앞이나 앞차가 섰을 때 적절한 간격을 두고 진짜로 차가 설 것인지, 우회전, 좌회전, 골목길마저 스스로 찾아갈 수 있을는지 겁이 났다. 그러나 자동차는 마치 훈련된 운전자처럼 침착하게 반응했다. 신호등이 바뀌면 부드럽게 정차하고 앞차와의 간격은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상상에 불과했던 미래가 성큼 다가와 있었다.


귀국을 앞두고 흥룡이네 집 정원에서 바비큐 파티가 열렸다. 흥룡이 부부와 항렬이 부부, 그리고 온 가족이 다 모였다. 흥룡이의 요청으로 언제 다시 볼지 모르는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최성수의 ‘해후’와 백설희의 ‘봄날은 간다’를 불렀다. 어머니도 따라 부르시는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언제 다시 뵐 수 있을까? 65세 이상에게 주어지는 이중국적 취득을 위해 같이 귀국한 항렬이 부부가 이번에 영주 귀국한 친구 봉하처럼 다시 미국으로 가지 말고 오래도록 이 땅에서 같이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 욕심일까?

이글은 2025년 수필문학추천작가회 제33호 사화집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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