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1980년 언저리
제15화 곰소댁과 최사장(1)
“팔지 않겠다는디 도대체 왜 그러쇼? 나가주쇼.”
“아니! 손님이 밥을 달라는데 아무 이유도 없이 식당 주인이 내보내는 법도 있어?”
“좌우지간, 나는 당신 같은 사람에게 밥을 팔고 싶은 생각이 없단 말이요”
곰소댁의 좌판 바로 건너편에는 최사장이 운영하는 “고향 순대국밥집”이 있는데 아침부터 매우 소란스러워 곰소댁은 아까부터 식당 안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밥을 달라고 하는 사람을 자세히 보니 전 영등포 시장 상인연합회 회장을 지냈던 박사장이다. 그는 영등포 시장에서 청과물 도매상을 하면서 상당한 돈을 벌었고, 그 덕분에 상인연합회 회장까지 지낸 사람이다. 그런데 곰소댁이 생각하기에 박사장에게 최소한의 염치가 있다면, 최사장네 집에 가서 식사를 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다. 그런데 어떻게 새벽 댓바람부터 최사장에게 억지를 부리는지 곰소댁은 어이가 없었다.
“아무런 합리적인 이유 없이 식당 주인이 손님을 거절하는 것은 불법이고 부당한 행위 아냐?”
“나는 고런 고상헌 말은 잘 모르겄고, 나에게도 손님을 거절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응게 당장 나가주쇼.”
“그 권리가 어떤 이유로 나한테만 발생하느냐 이거야?”
“반말하시지 마시고 얼릉 나가쇼. 아침부터 술 냄새 폴폴 풍기면서 우리 식당 영업을 빙해허는 것이 바로 내가 손님을 거절할 수 있는 정당한 이유랑게요.”
“아니, 술 마신 사람은 식사도 못 한다는 법이 있느냐 말이야?”
“난 못 배운 사람이라 법 나부랭이 거들먹거려도 알아먹지를 못 헝게, 다른 사람들 식사 허시는디 방해허지 마시고 나가쇼.”
곰소댁이 가만히 들어보니 박사장의 혀는 상당히 꼬부라져 있다. 필시 밤새도록 어디에선가 퍼마시고, 영등포 시장에서 가장 맛있다고 소문난 최사장네 피순댓국밥이 당기니 해장하러 온 것이리라.
최사장은 곰소댁과 오랫동안 친하게 지내 온 사람이다. 고향이 김제 원평이라 곰소댁과 동향이어서 평소 오빠처럼 살갑게 대해주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먼저 나서서 도와주던 사람이며, 시장에서 사람 좋기로 소문이 난 사람이다. 그런데 최사장은 영등포 시장에서 식당업을 하기 전 구로공단 봉제공장에서 재단사로 일했다. 구로공단 봉제공장의 환경은 수출 중심의 경제 성장을 위해 노동력 착취가 극심할 정도로 열악한 상황이다. 특히, 봉제 산업은 젊은 여성 노동자들이 대거 투입되는 대표적인 분야이므로 이들의 노동 환경과 생활상은 더욱 비참하다. 곰소댁도 시장에서 일하기 전 봉제공장에서 ‘시다’로 일한 적이 있어서 그런 환경을 누구보다 잘 안다.
구로공단 봉제공장 내부의 작업 환경은 매우 열악하여 장시간 노동, 낮은 임금, 그리고 기본적인 편의 시설의 부족이 일상적이다. 예를 들어, 공장의 생산 목표를 맞추기 위해 노동자들이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일하는 것은 기본이고, 강제적인 잔업과 특근이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여성 노동자의 경우, 남성이 2교대일 때 여성은 3교대로 투입되는 등 남성 노동자보다 차별 대우를 받고 있다. 그리고 작업장은 환기가 잘 안 되고 먼지가 많은 환경이며, 노동자들은 재봉틀이 빽빽하게 들어선 비좁은 공간에서 일해야 한다. 기본적인 위생 시설이나 휴식 공간 또한 매우 부족하다. 또한 화장실과 같은 기본 시설에 대한 접근성이 부족하고, 심지어 노동자들의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회사가 의도적으로 수도와 전기를 끊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게다가 여성 노동자들은 동일 직급이라도 남성 노동자보다 훨씬 낮은 임금을 받고 있다. 이처럼 여성은 '부차적인 생계유지자'라는 가부장적 사회 규범으로 인해 정당화되고 있고, 남성 노동자들은 이를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뿐만 아니라 여성 노동자들은 작업장에서 신체적, 성적 학대를 포함한 폭넓은 인권 침해와 괴롭힘에 노출되어 있다.
구로공단의 봉제공장에서는 성별에 따른 역할 분리가 매우 뚜렷하다. 이는 가부장적 사회 구조와 기업의 효율 논리가 결합한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봉제공장은 여성 노동자, 흔히 ‘여공’이나 멸칭인 ‘공순이’라고 불리는 이들이 전체 노동력의 대다수를 차지하며, 핵심적인 생산라인을 담당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의 주요 업무는 재봉틀을 이용한 봉제, 실밥 정리, 포장 등 손이 많이 가는 지극히 단순하고 반복적인 일들이다. 또한 이들은 대개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미혼 여성들이며, 가족의 생계비나 남성 형제의 학비를 책임지기 위해 고향을 떠나 도시로 온 경우가 많다. 그러나 여성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생계의 주된 책임자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는 ‘부차적’으로 취급받고 있고, 인권 의식의 부재로 인해 낮은 임금과 열악한 대우를 감수하는 것을 아주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극한의 착취 환경은 역설적으로 정희가 근무하고 있는 일동방직 사건에서 보는 것같이 한국 노동운동의 선구적인 역할을 여성 노동자들이 맡게 하는 중요한 배경이다.
한편, 남성 노동자들은 여성 노동자들과 비교할 때 그 수가 적지만, 상대적으로 다른 대우를 받고 있다. 그들의 주요 업무는 생산 라인보다 기술직, 숙련직, 기계 관리, 감독과 관리직 등인데, 주로 여성 노동자들이 수행하는 핵심 생산 업무를 지휘하고 감독하는 역할이다. 회사 측은 남성 노동자들에게 비교적 더 나은 임금과 대우를 제공하며 노동조합 내에서도 여성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무시하거나 갈등을 조장하는 분열 전략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남성 노동자와 일부 남성 중심의 노조 지도부는 여성 노동자의 권익 문제에 소극적이거나 심지어 사측의 폭력적인 탄압에 동조하는 일도 많다.
최사장은 봉제공장에서 일하는 동안 다른 남성 노동자들과 달리 이러한 차별적 대우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기에게 불리한 일이 발생될 것을 알면서도 여성 노동자들 편을 드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한 탓에 회사 측에서 볼 때 최사장은 눈엣가시였고 어떤 사람들은 여성 노동자들에게 인기나 얻으려는 행위로 폄하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최사장은 천성적으로 착한 심성을 가진 자다. 그런데 어느 날 감독직을 맡고 있는 조승현이라는 사람이 야간작업을 마치고 돌아가는 여성 노동자를 성폭행하려는 것을 목격했다. 최사장은 그 상황을 회사 측에 자세히 설명하였고, 피해자도 그 상황을 상세히 설명했으나 회사 측에서는 어떤 일인지 가해자를 두둔했고, 사건을 조사한 경찰도 회사 측 편을 들면서 사건을 마무리해 버렸다. 피해자는 ‘미스리’라고 불리는 ‘이금자’다. 미스리는 회사 측으로부터 여러 차례 회사 측에 협조하라는 회유를 받았는데, 더 편한 자리로 옮겨주고 월급도 올려준다고 했으나 이를 거절하고 퇴사했다. 그 남성의 끈적끈적한 눈빛이 언제든지 또 사건을 저지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최사장은 납득할 수 없는 사유로 해고당했다.
그 사건 이후, 최사장과 미스리는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가리봉동 오거리의 ‘벌방’에서 결혼식도 올리지 않은 채, 살림을 차리게 되었으며, 최사장은 고향에서 엄마가 자주 해주시던 피순댓국밥 기술을 전수받아 영등포 시장에서 국밥집을 운영하게 되었다.
김제 원평의 피순대 국밥은 여느 국밥집과는 사뭇 다른, 가마솥에 뼈와 부속 고기를 넣어 끓이기에 수십 년의 세월을 응축한 듯한 뽀얗고 진하며, 구수하면서도 묵직한 돼지고기 육수의 향이 감돈다. 잡내 하나 없이 깊고 개운하여, 처음에는 그저 맑은 국물 본연의 맛을 즐기다가 취향에 따라 새우젓과 들깻가루, 매콤한 다진 양념을 풀어 넣는 식이다. 특히 거칠게 빻은 들깻가루를 듬뿍 넣으면, 국물은 순식간에 고소하고 구수한 맛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하지만 이 국밥의 진정한 주인공은 단연 '피순대' 그 자체다. 원평 피순대는 흔히 보던 투명한 당면순대와는 생김새부터 다르다. 겉은 깨끗하게 손질된 돼지 막창으로 감싸여 있고, 속은 선지가 주를 이루어 진한 흑갈색을 띤다. 이 순대소는 신선한 돼지 피인 선지에 찹쌀, 메밀가루, 잘게 다진 돼지고기, 그리고 쪽파와 배추 같은 채소들을 넉넉히 버무려 만들기에, 일반 순대에서는 느낄 수 없는 깊은 풍미를 가진다. 그리고 막 삶아져 나온 피순대를 한 점 집어 들면, 그 폭신하고 부드러운 질감에 놀라게 된다. 씹었을 때 속이 빡빡하지 않고 촉촉하게 녹아내리는 듯한 부드러움이 일품이다. 입안 가득 퍼지는 고소함과 선지 특유의 깊은 맛은 비릿함이 아닌 구수한 감칠맛으로 다가온다. 이 피순대를 즐기는 방식 또한 전라도 특유의 정취를 담고 있다. 다른 지역처럼 소금이나 새우젓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빨갛게 무친 초고추장에 곱게 간 들깻가루를 섞어 만든 ‘들깨 초장’에 콕 찍어 먹으면, 새콤함이 순대의 고소함을 극대화하며 맛의 정점을 찍는다. 뜨거운 국밥 한 그릇 속에서 피순대가 육수와 어우러지며 풀어지는 순간, 원평의 소박하지만 깊이 있는 맛이 비로소 완성된다. 그것은 단순한 음식을 넘어, 가난한 시절에도 넉넉한 인심을 잃지 않았던 시골 장터의 정서가 담긴 진한 위로와 같다.
그런 탓에 최사장네 가게는 손님이 아주 많아지면서 영등포 시장 안에서 해장을 위해 한잔, 아침, 점심, 그리고 저녁 식사로 한 끼를 먹으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돈을 조금 벌게 되면서 작은 집도 마련했다. 그래서 최사장은 그동안 고생한 미스리에게 쉴 수 있는 여유를 주고 싶은 마음에 주방일은 자기가 도맡아 하고, 미스리에게는 주로 카운터 업무와 손님 접대를 맡겼다. 그런데 문제는 미스리가 상당한 미모의 소유자라는 데 있었다. 최사장은 식당에 들르는 남자 중에서 미스리에 대해 추파를 던지는 사람들이 아주 많은 것에 불만이 많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전 상인연합회 회장인 박사장은 아주 심한 편에 속했다.
“어이! 미스리, 이리 와 앉아서 한 잔 따라봐”
“아이! 무슨 말씀이세요. 저 술 따르는 사람 아니에요.”
“아니 식당 주인이 영업을 위해 손님에게 한 잔 따를 수도 있는 것이지. 그게 뭘 대수라고?”
그럴 때마다 같이 온 상인연합회 회원들은 ‘와’하는 소리를 내며 박사장 편을 들었다.
시장상인연합회는 주로 개별 시장 상인 조직(상인회 또는 조합)들의 상위 협의체 역할을 하며, 시장 전체의 공동 발전과 정책적 대응에 중점을 둔다면, 시장상인조합(또는 상인회)은 주로 개별 전통시장 내 상인들을 중심으로 조직되며, 상인들의 공동 이익 증진과 시장 운영에 직접적으로 관여한다는 차이가 있다. 그러다 보니 박사장은 시장 내에서 완장을 찬 사람 중에 가장 강력한 권한을 가졌던 자로서 아주 많은 돈을 만지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비록 그가 그 자리를 물러났지만, 연합회 회원들 역시 그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고 자기도 한 자리 차지하기 위해서는 전회장에게도 잘 보이도록 노력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최사장에게 이런 상황은 아주 곤혹스럽고 싫은 일이다. 공장을 떠난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싶기도 하고, 설마 미스리가 저런 불량한 놈들에게 넘어가랴 싶은 생각에 주방일에만 몰두하려고 노력하지만,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최사장은 미스리의 행복이 자기의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충남 서천이 고향인 미스리의 고향 부모님에게도 최선을 다했다. 추석이나 설날을 맞이하여 고향에 내려갈 때도 호남선 열차를 타고 가다 바로 김제역에서 내리면 될 일이지만, 서천에 계신 미스리의 부모를 만나 뵙기 위해 서천(장항)에서 군산으로 가는 정기 여객선(도선)인 금강호를 타고 군산으로 가서 그곳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다시 김제행을 갈아타고 가곤 했다. 미스리의 부모님도 최사장이 그틀과 비슷한 말투를 가지고 있어 특별히 애정이 가고, 그동안 미스리로부터 최사장에 관한 이야기를 누차 들었던 터라 아예 사윗감으로 생각해서 최사장이 집에 가면 “우리 사위 왔다.”라고 하면서 반기고, 언제나 씨암탉을 잡아 대접했다. 심지어 동네 사람들도 둘이 곧 혼인할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최사장은 그날도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서둘렀다. 그가 이 시간에 서둘러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국밥 장사는 재료의 신선함과 육수의 시간에 철저히 지배된다.
첫째는 돼지 뼈 육수다. 전날 밤 불을 줄여 놓고 온 거대한 가마솥의 육수는 지금쯤 가장 중요한 숙성 과정을 거치고 있을 것이다. 그는 가게에 도착하자마자 불의 세기를 조절하고, 밤새 우러나온 불순물을 걷어내는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 단 몇 분이라도 이 과정을 놓치거나 타이밍을 맞추지 못하면, 뼈가 품고 있던 깊은 맛 대신 잡내가 올라와 그날 국밥의 명운을 망치게 된다. 순대국밥의 개운하고 진한 맛을 지키기 위한 이 시간 싸움 때문에 그는 항상 발이 달아오른다.
둘째는 신선한 재료 확보다. 국밥에 들어가는 내장과 머리 고기는 그날 사용할 만큼만 아침 일찍 들여와 삶아야 최고의 식감과 맛을 낼 수 있다. 다른 상인들보다 한두 시간이라도 먼저 움직여 최상급의 부속 재료를 떼어오고, 피순대의 상태를 점검해야만 손님들이 찾는 잡내 없는 깔끔한 맛을 유지할 수 있다. 남들이 5~6시에 시작하는 하루를 그는 4시 30분에 시작해야만, 지금까지 영등포 시장에서 지켜온 명성을 유지할 수 있다.
최 사장은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잠시의 망설임은 그의 국밥 맛에 대한 죄책감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는 차가운 세수를 마치고, 출근복을 챙겨 입는다.
“좀 더 자다가 7시까지 식당으로 나와 잉! 나는 국물 보러 가야 헝게.”
그는 미스리의 이마에 가벼운 키스를 했다. 최사장의 일상은 항상 이러했다. 그리고 미스리의 일상도 그러했다.
그런데 그런 미스리의 일상에 조금씩 생채기가 나기 시작한 것은 상인연합회 간부인 경자 아줌마 때문이다. 경자 아줌마는 수시로 최사장네 국밥집에 와서 밥도 먹고 술도 마시면서 미스리와 친해졌다. 시장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그녀는 춤도 잘 추고 노래도 잘한다고 했다. 미스리는 그녀의 그런 모습이 너무 좋았다. 남자라고 해봐야 평생 처음으로 만나 사랑에 빠진 최사장 이외에 아무도 없고, 1년 내내 국밥집과 최사장과 같이 사는 집을 왕래하는 것 외에 어떤 취미생활도 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경자 아줌마는 남자들에게 매우 인기가 많고 명랑해서 내성적인 미스리에게는 마치 신세계에서 만난 여왕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미스리는 몇 번 경자 아줌마를 따라 술도 마시러 가고 춤도 배우게 되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건 모두 박사장이 그녀를 유혹하려고 꾸민 계략이었다. 그녀가 발을 빼기에는 너무 늦었고, 거기서 느끼는 재미를 거부할 수 있을 정도로 이성적이지 못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오빠!, 나, 오늘 저녁에 구로공단에 있을 때의 친구들 좀 만나고 오면 안 될까?”
그녀는 아직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카운터는 누가 보란 말이여?”
“변 씨 아줌마에게 부탁하면 안 될랑가? 일당 좀 더 주고 말이여, 친구들 본지가 너무 오래되었잖여.”
최사장은 난감했다. 카운터는 아무에게나 맡길 수 있는 곳이 아니고, 금고에 다른 사람의 손이 타는 것도 꺼림칙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미스리에게 쉬는 날이 거의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래! 그렇지만 변 씨 아주머니 계산 틀리지 않도록 훈련을 시켜서 문제가 없도록 해놓고 나가야 혀, 그리고 몇 시에 들어올 텐가? 내가 걱정하지 않게 일찍 들어오면 좋겄는디.”
“알았어, 걱정하지 마”
그러나 그날 저녁에 나간 미스리는 새벽이 되어서야 귀가했다. 돈을 좀 벌어 양평동에 있는 작은 단독 주택을 마련해서 이제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큰 꿈을 꾸게 되었나 싶어 행복한 날들의 연속이었는데, 오늘 밤, 최사장은 미스리가 들어오기까지 한숨도 이루지 못하고 뜬눈으로 지새웠다.
미스리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고, 연락할 방법도 없으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혹시 교통사고라도 난 것은 아닐까? 몹쓸 놈들에게 붙들려 곤욕을 치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만 가지 생각에 입술은 바짝바짝 타고, 가슴은 두근거리며, 머리는 터질 것만 같았다.
그녀는 최사장의 출근 시간이 임박한 새벽 3시 50분경에 집에 들어왔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녀에게서 술 냄새가 확 풍겼다.
“어디에 있다가 이제야 들어오는 것이여?”
최사장은 화를 억누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워메? 꼭 남편처럼 야그 허네? 우리가 부부는 아니잖여?”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최사장은 잠시 할 말을 잊었다.
“말은 바로 하랬다고 우리가 법적 부부는 아니잖여, 그런데 오빠는 시방 나를 마누라처럼 추궁하는 거 아녀?”
“지금 이 사람이 내가 알던 평소의 미스리란 말이여?” 최사장은 혼자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극도의 혼란에 빠진 자신을 정상으로 되돌릴 방도가 생각나지 않았다.
“지금 술이 덜 깨서 그런가 보네, 나는 국물이 중요헝게 먼저 출근할게. 술 깨면 가게로 나와서 야그허자”
그녀는 오후 5시쯤에나 가게에 나왔는데 잔뜩 짜증이 난 태도라 말을 걸기가 매우 조심스러웠다. 그리고 저녁 5시에 박사장 일행이 가게로 와서 술을 마시고 갔다. 그리고 카운터에서 돈을 계산하고 나가던 박사장이 미스리의 엉덩이를 툭 치면서 미스리의 귀에 대고 “어제 즐거웠어”라고 작은 목소리로 말하고 갔다.
그날 이후로 미스리는 최사장과의 잠자리를 피하기 시작했고, 매일 짜증을 내고 신세 한탄을 했다.
“언제쯤 나도 이 국밥집 카운터를 벗어나 자유롭게 살 수 있을까?”
그녀는 틈만 나면 가게를 벗어날 궁리를 했다.
그리고 최사장 주변 사람들로부터 그녀가 춤바람이 났고 춤바람을 나게 한 상대가 박사장이라는 소문이 조금씩 최사장의 귀에 들려오기 시작했다.
박 사장은 과거 시장 전체의 권력을 쥔 실세였고, 항상 번듯한 양복에 포니 자동차를 타고 다녔다. 박 사장이 국밥집을 처음 찾은 날, 그는 미스리에게 “이렇게 아름다운 분이 곰팡내 나는 시장에 박혀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은데”라고 말한 적이 있다. 최사장은 박사장이 미스리의 미모를 칭찬하는 것으로만 알았기에 별로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미스리도 그 상황에서 그저 ‘픽’하고 웃었을 뿐이다. 그런데 시장에 은밀한 소문이 퍼졌다. 최 사장이 새벽 국물을 고집하며 고독하게 순대소를 다듬을 때, 미스리는 박 사장과 함께 나이트클럽이나 고급 술집에서 춤을 추러 다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최사장의 추궁에 그녀는 딱 잡아떼며 “지금 사람 의심하는 거냐? 남자가 쩨쩨하게 굴지 마라.”라고 소리쳤다. 둘 사이에는 어느 순간부터 확실하게 선이 그어진 듯했고, 하루하루가 살얼음 같은 날들이었다. 최사장은 뼈만 남을 정도로 말라갔다.
최사장은 도저히 견디지 못할 것 같아서, 어느 날 밤, 소주 한 병과 순대 몇 점을 놓고 앉아 그녀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정말 힘들다. 나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솔직히 말해줄 수 있는가?”
“내가 싫다면 붙잡지 않을거여.”
“이 세상에 가장 견디기 힘든 것 중의 하나가 사람 싫은 거여. 그러니 솔직히 말해줘.”
그녀는 아무 말이 없었다.
“상대가 누구여? 내가 알면 안 되는 거여?”
그녀가 한참이나 뜸을 들이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오빠에 대한 내 사랑이 식었을 뿐,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건 아녀”
“매일매일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가게를 지켜야 하는 삶에 지쳐서 그런 것일 거여”
“오빠가 나에게 얼마나 잘해주었는지 너무나 잘 알어, 오빠 같은 사람 아마 이 세상에 없을 거여”
“그럼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없는 거여?”
“아녀! 이제 내가 떠나야 할 것 같혀. 그래야 오빠가 힘들지 않고 더 좋은 여자 만나 행복할 수 있을 거여”
“금자야, 오늘은 우리 잠을 자고 내일 아침에 일어나 국밥 한 그릇 먹으며 다시 한번만 생각해 보자”
최사장은 처음으로 미스리의 이름을 부르며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 말이 없이 천장만 바라봤다. 최사장은 대폿잔에 소주를 따라 연거푸 다섯 잔을 마셨다. 그리고 쓰러져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새벽, 잠에서 깬 최사장은 머리맡에 놓인 쪽지를 보았다.
“오빠 진심으로 사랑했어. 내 남은 짐은 버려줘. 그리고 부디 행복해야 해.”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장 사람들 사이에 미스리가 박사장의 첩이 되어 신길동에 있는 한옥집 하나를 받아 살고 있다는 말들이 돌기 시작했다. 일부일처제가 확립되어 축첩계약이 무효가 된지 언제인데, 첩이라니 그럴리가 있느냐며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미스리가 그런 식으로 살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박사장이 취해서 최사장 가게에서 행패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이게 사람으로서 할 짓이라고 보쇼?”
벽력 같은 소리에 박사장이 움찔한 표정을 지었다.
“남의 눈에 눈물 내면 제 눈에는 피눈물 나는 벱이여”
“내가 가만히 보고 있응게, 이런 천하의 개잡놈이 있는가 싶어서 왔구먼.”
박사장은 갑자기 술이 깬 듯 곰소댁에게 대들 모양이더니 그녀의 목소리가 워낙 크고 시장 사람들이 다 모여들어 자신이 구경거리가 되었음을 깨닫고는 얼른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침부터 여자가 재수 없게 지랄이야.”
“뭣이여? 재수가 없어? 이 새끼가 시방 사람을 뭘로 보고 이러는 거여? 오늘 너 죽고 나 죽자!”
평소 예쁜 얼굴이지만, 성이라도 나면 살집 있는 몸매가 무기가 되는 곰소댁이다. 그녀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삿대질을 하며 다가서자, 박사장은 앗 뜨거라 싶었는지 꽁무니를 뺐다. 그 모습이 싸우다 벼슬이 찢어져 도망치는 수탉모양으로 비루하기가 짝이 없었다.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전형적인 토강여유(吐剛茹柔)형 인간이었던 것이다.
최사장의 곰소댁을 바라보는 눈에 살짝 이슬이 맺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