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한평생 바라보는 모든 강물은 사실 레테의 강의 지류가 아닐까? 시간과 함께 수많은 기억을 휩쓸어 망각 속으로 밀어 넣는 강물. 하지만 망각할 수 없는 기억, 혹은 망각해서는 안 될 삶의 무게는 결국 우리를 동양의 황천강이나 삼도천처럼 혹은 서양의 요단강처럼, 건너야 할 큰 강 앞에 세운다. 황천강의 불빛이 어떠하든, 우리는 생의 마지막 여정에서 각자의 강을 건너야 한다. 이 네 개의 강은 단순히 신화 속 공간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버릴 것인가'를 묻는 내면의 강이기도 하다.
인간이 죽음을 맞이한 후 건너는 강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현세와 내세를 가르는 경계이자, 영혼의 정화 또는 심판을 상징한다. 레테의 강, 요단강, 황천강(黃泉江), 그리고 삼도천(三途川)은 모두 이러한 역할을 하지만, 각기 다른 문화권과 종교적 배경에서 유래하여 그 의미와 역할에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우선 ‘레테(Lethe)의 강’은 그리스 신화 속 지하 세계인 하데스(Hades)에 흐르는 강 중 하나로 이 강물을 마신 영혼은 현세의 모든 고통과 기억을 모두 잊고 환생하거나 저승 생활을 시작함으로써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강은 심판보다는 ‘정화와 재시작’을 의미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요단(Jordan)강’은 실제로 존재하는 이스라엘과 요르단 국경의 강이지만, 영적인 의미가 더 많다. 성경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 생활을 마치고 약속의 땅(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건넌 강이다. 기독교에서는 세례(Baptism) 의식을 상징하며, ‘죄를 씻고 구원을 향해 나아간다’는 의미를 지닌다. 흔히 세간에서 “요단강을 건넌다”고 하는 표현은 죽음을 의미하지만, 이는 고통의 현세에서 구원의 천국으로 통과한다는 긍정적인 의미, 즉 통과와 약속을 의미한다.
황천강은 동양의 민속 신앙과 불교적 세계관에서 이승과 저승(황천)을 가르는 경계이다. 특별한 심판 기능보다는 저승 세계의 입구를 상징하며, 영혼이 이 강을 건너는 순간 현세의 인연은 완전히 단절된다고 믿는다. 우리나라의 경우, 망자가 저승으로 가는 길목에 존재하는 것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저승의 입구, 즉 영혼이 이승과 완전히 단절하고 저승(황천)으로 들어서는 경계를 의미한다.
그리고 삼도천은 일본 불교의 지옥 개념에 뿌리를 두고 있는 강으로서 영혼이 이 강에 도착하면 생전에 지은 업보(선악)에 따라 선업(善業), 즉 선행을 많이 쌓은 사람이 건널 수 있는 유교도(有橋渡), 죄가 가벼운 사람, 즉 업보(業報)가 보통인 사람이 건너게 되는 잔잔한 물길인 산수뢰(山水賴), 그리고 악업(惡業)을 많이 쌓은 사람, 즉 죄가 무거운 사람이 건너게 되는 깊은 물의 급류인 강심연(江心淵) 등 생전의 업보에 따라 건너는 방식이 세 가지로 달라지며, 영혼의 업(業)을 시험하는 심판의 강이다.
이처럼 배경과 역할은 다르나 위 네 개의 강은 첫째, 경계선(Boundary), 즉 모두 산 자의 세계(현세)와 죽은 자의 세계(저승, 천국, 하데스)를 물리적 또는 영적으로 구분 짓는 최종적인 경계의 역할을 한다. 둘째, 강을 건넌다는 행위가 현세의 모든 인연과 삶의 방식으로부터 영원히 단절(Severance)됨을 의미한다. 영혼이 이 강을 건넘으로써 새로운 존재가 되거나 새로운 운명을 맞이하게 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 강들은 단순한 지형이 아니라, 영혼이 새로운 단계(환생, 구원, 심판)로 진입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궁극적인 통과의례(Rite of Passage)의 장소로 인식되고 있다. 결국 각 문화권은 이 강들을 통해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인간의 근원적인 불안과 희망을 투영하고 있다.
인생에서 ‘강을 건넌다'는 말만큼 돌이킬 수 없는 결단을 상징하는 표현이 또 있을까? 그 강이 단순히 지리적인 경계를 넘어 이승과 저승을 구분할 때, 그 의미는 더욱 무겁고 신비로워진다. 망자들의 영혼은 각각의 신화 속에서 레테의 강에서 기억을 비우고, 요단강에서 구원을 바라며, 황천강과 삼도천에서 자신의 과거를 정산하며 건너야 한다. 이 네 개의 강은 단순히 종교와 문화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을 넘어서 ’죽음 이후‘라는 인류 공통의 질문에 각기 다른 답을 제시하는 네 갈래의 철학적 통로처럼 보인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가르는 강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의 상상력 속에서 끊임없이 흘러왔다. 레테의 강이 지상의 모든 기억을 지우는 망각의 물을 품고 있다면, 기독교의 요단강은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희망의 물줄기다. 동양의 황천강과 삼도천은 망자가 이승의 업을 씻고 건너야 할 심판의 강으로 묵묵히 흐른다. 이 네 개의 강은 결국 인간의 삶은 되돌릴 수 없는 흐름이며, 죽음은 '또 다른 세상으로 건너간다'라는 하나의 진실을 말한다. 우리는 망각할 것과 기억할 것, 심판받을 것과 구원받을 것을 생각하며 평생 강가에 서서 강 건너편을 응시하는 존재가 아닐까?
그러나 이 신화 속 강들은 죽음을 기다리는 공간이 아니라, 오히려 현재 우리 삶의 방향타 역할을 한다. 우리가 평생 강가에 서서 강 건너편을 응시하는 존재라면, 그 응시는 곧 '무엇을 건너갈 것인가'를 묻는 결단이 된다. 즉, 이 네 개의 강은 과거의 짐을 씻어내는 '레테의 강', 새로운 목표로 나아가기 위한 '요단강', 그리고 매 순간 선악을 저울질하는 '삼도천의 심판대'로서 우리 내면에 항상 흐르고 있는 셈이다. 나는 최근 이 내면의 강들을 어떻게 건너고 있는지 깊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나는 가끔 과거의 잘못이나 실수가 떠올라 거세게 고개를 흔들고, 나를 괴롭히는 타인의 모습이 떠올라 고통스러울 때가 있다. 그래서 나는 요즘 나만의 레테의 강물을 마시는 행위, 즉 '용서와 망각'의 연습을 통해 과거로부터 나를 해방시키는 연습을 하고 있다. 예를 들어, 내가 피해자였다는 사실은 당연한 과거의 사실로 객관화하고. 현재와 미래를 준비하는 생존자로 사는 것이 남는 장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끔찍한 실패'나 '배신'을 '값비싼 교훈'으로 그리고 '완전한 복수'를 '인간적인 연민'으로 바꾸어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글쓰기는 이러한 훈련방법 중에서 최고인 것 같다.
또 다른 한편, 나는 요즘 '돌아갈 다리를 불태우는 연습' 즉, 현세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황천강/요단강을 미리 건너는 결단'을 행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예를 들어, 불필요한 연락처 정리를 통한 '사람 다이어트'가 그것이다. 이것만으로도 나 스스로 정화가 되고 해방되는 느낌을 경험하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또한 '삼도천의 심판을 대비하는 태도'로서 내가 베푼 선행이 우리 딸들의 삶에 긍정적인 대가를 가져다 줄 것이며, 내가 이만큼 살고 있는 것도 내 부모가 베푼 업(業)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했더니 아까울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완벽주의를 버리기로 했다. 100%가 아닌 80%만 준비되면 이를 실천하고, 결과가 80% 이르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즉 브런치 스토리에 글을 올릴까 말까 고민스러울 때 80% 정도 만족스러우면 그냥 올려놓고 나중에 생각이 떠오를 때 수정하기로 했더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동양에서는 이를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즉 "모든 것은 마음 먹기에 달렸다"라고 했고, 고대 그리스-로마의 스토아 철학에서는 "We are not disturbed by what hapoens to us, but by our thoughts about what happens" 즉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일어난 일이 아니라 그 일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