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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목교

1978년-1980년 언저리

by 서완석

제17화 영석이의 대학 입학


1979학년도 대학입시에서 문교부는 예비고사의 중요성을 강화하기 위해 모든 대학에 예비고사 성적을 50% 이상 반영하도록 지침을 내렸다. 이는 입시 과열과 본고사 중심의 선발 방식을 개선하고자 하는 정책의 일환으로, 예비고사의 공신력을 높이기 위한 조치라고 한다. 이에 따라 대학들은 내신과 본고사 외에 예비고사 성적을 입시 전형에 본격적으로 반영한다고 하며, 특히 서울 소재 주요 대학들의 경우, 예비고사 반영 비율이 60% 이상으로 높아졌다. 그리고 일부 대학은 예비고사 성적만으로 학생을 선발하는 '특차 무시험 전형'을 운영하여 반영 비율을 100%로 설정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 전형은 본고사를 치르지 않고 예비고사 성적으로만 학생을 선발하는 방식으로, 특히 인기 대학과 학과에서 두드러졌다. 이는 예비고사의 중요성이 절대적인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연세대와 고려대 등은 본고사보다 예비고사 성적에 더 큰 비중을 두는 전형을 운영한다고 하며, 일부 학과는 사실상 예비고사 점수로 합격 여부가 결정되는 상황이다. 이러한 경향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예비고사 성적이 대학 입시의 핵심 요소로 자리 잡을 것 같다.


예비고사 성적은 체력장 점수 20점을 포함해서 340점 만점이다. 영석은 체력장 점수가 16점인지라 본고사에서 어떻게라도 만회를 해야 하는데, 예비고사 반영비율이 높아져서 불리하다. 영석은 아침 일찍 남산도서관에 가서 자리를 잡아야 하므로 항상 잠이 부족해서 얼굴에 핏기가 없고, 부석부석했다. 그래서 남산 밑에 사는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영석은 오늘도 새벽 버스를 타고 서울역에 내려 부지런히 남산길을 올랐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데도 오직 자리 하나 잡을 마음으로 죽을힘을 다해 계단을 오르고 있다. 그런데 이미 많은 학생들이 줄을 서 있다. 새벽 5시부터 시작되는 자리 잡기 경쟁은 아주 치열하다. 도서관 문이 열리자마자 입장권은 순식간에 동이 난다. 남산도서관은 입시생, 대학생, 공무원 시험 준비생, 고시준비생들로 붐비는 데다가 주말에는 직장인이나 공무원들까지 진급 또는 승급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몰려들기 때문이다.


영석은 도서관 앞에 늘어선 긴 줄의 마지막 자리에 섰다. 입장권 900장은 곧 사라질 것이기 때문에 어디쯤에서 줄이 잘릴지 모른다. 자리를 잡지 못하면 자칫 '메뚜기'신세가 되어 자리 주인이 잠시 자리를 비우는 틈을 이용하여 이리 저리 옮겨 다녀야 한다. 빠른 속도로 줄이 줄어드는데 영석의 마음은 너무나 초조하다. 그때 누군가 영석의 팔을 툭 쳤다. 영석이 뒤돌아보니 수아가 손짓을 하며 이리 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영석은 순간 수아가 반가우면서도 어찌해야 할지를 몰라 앞을 바라봤다가 다시 수아를 바라봤다. 기다리다 못한 수아가 영석을 줄 밖으로 끌어냈다. 그리고 영석을 도서관 귀퉁이로 데려갔다.

"삼춘! 창가에 있는 괜찮은 자리를 잡아놓았어. 좌석번호가 57번이야. 그 자리에 앉아서 공부해. 내가 자리 주인이 있다는 표시를 해놓았으니 가서 공부해. 파이팅!"

수아는 주먹을 꽉 쥐고 팔을 들어 올리며 소리 죽여 외쳤다.

"그리고 삼춘가방 이리 줘. 내가 가방도 그 자리에 갖다 놓을 테니 잠시 바람 쐬다가 들어가서 공부해. 난 바로 집에 갈 거야. 알았지? 본고사 볼 때까지 내가 자리 잡아줄게. 우리 집은 여기서 가깝잖아. 아무 걱정 말고 공부만 해. 알았지?"

"그렇지만..."

영석은 한편으로 양심에 찔리는 바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 수아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쉿"

수아가 자신의 검지손가락을 영석의 입술에 대면서 영석의 어깨에서 가방을 낚아채어 도서관 안으로 사라졌다.


영석은 자신도 '도자기(도서관 자리 잡아주는 자기)'의 짝꿍이 이 되었나 싶어 뿌듯하기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자리를 잡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한없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 한편에서 "넌 집이 멀잖아"라고 하는 자기 합리화의 유혹이 계속 꼬리를 쳤다. 영석은 남산길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도서관 입장이 끝날 때쯤 도서관 안으로 들어갔다. 57번 자리에는 수아가 펼쳐놓은 것으로 보이는 영어, 수학 참고서와 새 필통과 보온도시락이 놓여 있었다. 필통 속에는 모나미 볼펜 몇개와 연필깎이로 매끈하게 깎은 연필 몇개가 들어 있고, 참고서는 수아가 사용하던 책인 듯 수아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영석은 책장을 넘기며 수아의 체취를 맡아 보려고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수아에 대해 한없는 고마움을 느꼈다.


그렇게 영석은 수아의 도움을 받으며 열심히 공부했으나 전기에 실패하고, 후기 명문인 성균관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에 1979학년도 신입생으로 입학했다.

영석이 입학식을 치른 날, 영석은 수아와 종로에 있는 '그리 그리'라는 경양식집에서 처음으로 맥주를 마셨다. 소주를 마셔 본 적은 있지만 맥주는 처음이라 무슨 맛인지 궁금했는데 달콤 쌉싸름한 맛이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삼춘! 법대를 갈 때는 무슨 꿈이 있어서 갔을 거 아냐? 그 꿈이 뭐야?"

"응! 난 될 수만 있다면 교수가 되고 싶어. 그리고 더 넓은 세계를 보기 위해 외국으로 유학도 가고 싶어."

수아는 한동안 영석을 아무 말 없이 지긋이 바라보았다.

"다른 법대생들은 사법고시나 행정고시를 준비하던데? 그럴 생각은 전혀 없는 거야?"

수아가 다시 물었다.

"그런 생각도 많이 해봤어. 고생하시는 우리 엄마를 생각한다면 어쩌면 그 길이 최선일지 몰라. 그런데 난 교수라는 직업이 너무나 매력적으로 느껴져서 자꾸만 그쪽으로 마음이 쏠려."

영석은 생맥주 한잔을 더 시켰다.

"오늘은 내가 한잔 살게. 마음대로 마셔."

영석이 조금 취기가 도는 목소리로 큰 소리를 쳤다.

"삼춘! 대학에 합격하니 돈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기라도 한 거야?"

"응! 다음 주부터 도곡동에서 과외하기로 했어."

"과외? 무슨 과목?"

"영어!"

"돈 많이 준대?"

"봉급쟁이 월급의 몇 배 정도는 되는 것 같아."

"정말?"

수아는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삼춘! 오늘 우리 삼청공원에 놀러 가서 쪽쪽새나 볼까?"

화려한 종로거리를 뒤로하고 영석이와 수아는 낙원극장 앞을 지나 가회동을 거쳐서 중앙고등학교 정문을 지났다.

"여기가 성대 후문으로 가는 길이야."

수아는 영석이 학교의 지리에 대해 영석이보다 더 많이 알고 있었다. 영석이는 성대 정문은 가봤지만 후문은 아직 가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는 감사원이야. 이 길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성북동 부자동네 가는 길이 있고 왼쪽으로 가다 보면 국무총리 공관과 청와대가 있어."

영석에게는 모든 것이 신기했다.

"조선시대에는 아마도 이 부근에 관리를 비롯한 부자들이 많이 모여 살았을 거야."


수아는 영석이를 이미 어두워진 삼청공원으로 이끌었다.

"여기가 바로 내가 지난번에 이야기한 삼청공원이야. 어때? 좋지?"

어두워지고 있는데 팔짱을 낀 젊은 데이트족들이 아주 많은 것에 영석은 새로운 세계를 보는 신기하기만 했다..

"삼춘! 이리 와봐"

"여기는 환하지? 그런데 저기는 컴컴하지?"

정말로 한쪽은 가로등이 환한데 다른 한쪽은 그렇지 않았다.

"저기에 쪽쪽새들이 살아. 가보자!"

"쪽쪽새라는 새가 있어? 처음 들어보는 새 이름인데?"

영석은 대단히 궁금했다.

"쪽쪽새는 철새가 아닌 텃세야. 한국에만 사는데 올빼미처럼 밤에만 활동을 하는 새라고 하더라고."

수아가 손을 내밀었다. 영석은 어두운 길을 더듬더듬 찾아가는 수아의 손을 잡고 뒤를 따라가다 여기 저기에 부딪치는데 걔 중에는 사람도 있었다.

"여기에 앉자"

영석은 수아가 이끄는 대로 앉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사물이 보이기 시작하고 두런거리는 사람들의 소리도 들렸다.


"삼춘! 하나만 물어보자."

"뭔데?"

"돈이 없으면 불편하지 않아?"

"매우 불편하지."

"그럼 돈 많이 버는 쪽으로 목표를 삼는 건 어때?"

"나도 그러고 싶어. 그런데 난 정말 교수가 되고 싶어. 한번 사는 세상 재미있게 살아야 하지 않겠어? 나는 강단에 서 있을 때, 그리고 글 쓸 때 가장 재미있고 행복할 것 같거든."

"그렇구나. 우리 집 식구들은 돈이 많으면 행복하다는데..."

"그럼 수아도 그렇겠구나."

"솔직히 난 잘 모르겠어. 그러나 가난은 싫어."


영석의 눈이 어둠에 적응하면서 주변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데 혼자 앉아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쪽쪽새 본다고 하지 않았어?"

"안 보여? 난 많이 보이는데?"

"내 눈에는 안 보이는데? 모양이 어떻게 생긴 새인데?"

"삼춘은 순진한 거야? 아니면 멍청한 거야?"

진짜 영석이 눈에는 새가 보이지 않았다. 서로 껴안고 키스를 하는 데이트족들이 보일 뿐이었다. 어둠 속에서 수아가 영석의 손을 더듬어 잡았다.

영석이의 심장이 주책없이 뛰면서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영석은 그 소리를 감추기 위해 크게 심호흡을 했지만 그럴수록 숨만 더 가빠졌다.

수아가 고개를 기울여 영석의 어깨에 기댔다.

수아의 머리카락에서 더할 나위 없이 상큼하고 향긋한 샴푸 냄새가 풍겼다. 영석의 심호흡은 더 가빠지고 그럴 때마다 수아의 머리가 크게 들썩거렸다. 그래도 수아는 아무렇지 않은 듯 가만히 있었다.

어둠 속에서 실루엣처럼 보이는 사람들의 얼굴이 겹쳐졌다 떨어졌다를 반복했다.


"내려가자."

수아가 갑자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조용하고 참 좋다. 우리 또 한 번 올까?"

영석이도 수아를 따라 일어서면서 말했다.

"됐어! 한 번이면 됐지 뭐 하러 또 와? 밝은 대낮이면 모를까. 밤에 뭐 하러 또 와?"

수아가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고, 영석이는 수아의 똑 쏘는 소리에 영문을 모른 채, 무안한 마음을 추스르며 가만히 수아 뒤를 따를 뿐이었다.

수아가 이번에는 삼청공원에서 다시 언덕길을 향해 걷지 않고 바로 직진하더니 왼쪽길로 접어들었다. '한국금융연수원'이라는 건물이 보이고, 조금 지나니 국무총리 공관도 보였다. 조금 더 가니 우측으로 경복궁 담벼락이 보였다.

수아는 아직까지 말이 없다. 영석은 수아가 화가 난 것 같았지만 그 이유를 몰라 아까부터 안절부절이다.


수아는 경복궁 지날 즈음 갑자기 왼쪽 건물로 들어갔다. 그 건물 옆에는 '앙드레김 의상실'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고 아주 멋진 옷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수아가 들어간 건물에는 '불란서 문화원'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는데 들어서자마자 진한 커피냄새가 확 풍겼다. 각종 팸플릿이며 프랑스 관련 서적들이 전시되어 있다보니 마치 프랑스에 와 있는 느낌이 들었다.

수아가 문화관람료 100원을 주고 티켓 두장을 샀다. 그리고 말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영석은 아까부터 말이 없는 수아가 왜 그런지 몰라 불안한 마음에 따라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자그마한 극장이었고 영화가 상영 중이었다. 영화제목은 'Le Sucre'라고 씌어 있는데 영어 자막을 보니 '설탕'이란 뜻을 가진 영화로 보였다.

코가 비뚤어지고 못생긴 남자배우인 브로커가 은퇴한 세무공무원을 가격이 폭등하던 설탕투기에 끌어들였으나 갑자기 설탕가격이 폭락하는 바람에 전재산을 잃은 세무공무원이 자살을 시도하게 된다. 이에 양심에 가책을 느낀 브로커가 복수극을 펼치는 영화인데 영석은 상당히 감명을 받았다. 영화가 상영되는 중간에 들어갔기 때문에 영화 전체를 보지 못한 것이 매우 아쉬웠다.


영화가 끝나고, 이름 모를 프랑스어로 된 이름이 적힌 자막이 계속 나올 때 영석은 수아에게 그동안 헌신적으로 도와준 고마움과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이 뒤섞이는 감정 때문에 갑자기 수아의 볼에 뽀뽀를 하고 말았다. 수아가 아무 말없이 영석의 손을 꽉 쥐었다.


불란서 문화원을 나오며 수아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남자 주연배우가 누군지 알아?"

"모르는데?"

"프랑스 국민배우 제라르 드 빠르뒤에야. 알아둬. 앞으로 여기 자주 오게 될 테니."

수아가 통통 발을 구르며 동십자각을 향해 앞장서 걸어갔다.













이 글은 제가 제주도에서 잠시 쉬며 스마트폰을 이용해 작성하다가 저장을 누른다는 것이 발행을 눌러버리는 바람에 이미 쓴 부분이 아까워 버리지도 못하고 조금씩 쓴 글입니다. 오타가 있어 수정하고 또 글내용도 수정하다보니 문제가 아주 많았습니다. 용서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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