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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목교

1978년-1980년 언저리

by 서완석

제19화 영석이와 미팅

안림 교수의 강의가 끝난 후, 영석은 쏟아져 나오는 학생들에 휩쓸려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그는 문과대학 건물 앞 작은 벤치에 앉았다. 이른 봄의 오후 햇살이 차가운 벤치 위로 비스듬히 떨어지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강의실에서 옆자리에 앉았던 친구 태종이가 슬쩍 건넨 쪽지 한 장이 쥐어져 있다. 태종이는 출석 체크를 한 후, 영석에게 쪽지만 건네주고 강의실을 빠져나갔었다.

이번 주 토요일 오후 3시. 종로 2가 ‘아폴로’에서 미팅이 있음. 꼭 참석 바람. 숙대 다니는 여자 친구가 성대 다니는 동생을 통해 여학생을 섭외하여 데리고 나올 예정임.

‘아폴로’, ‘메트로’, ‘세느다방’ 등은 최근 영석이가 친구들에게서 가장 많이 듣는 모임 장소다. ‘아폴로’와 ‘메트로’는 종로 2가 사거리 근처에 있으며 거의 붙어 있다. 그리고 ‘세느다방’은 YMCA 건너편에 있고 그 근처에는 ‘희다방(포크송)’, ‘칸토(팝/록)’, ‘르네상스(클래식)' 등 장르별로 특화된 음악 감상실이 모여 있다. 종로 2가는 지식과 낭만이 교차하는 청년 문화의 심장이다. 학생들은 종로서적에서 책을 산 뒤, 근처 세느다방이나 아폴로, 메트로 같은 다방과 음악 감상실에서 정치적 고민이나 문학적 열정을 나누며 하루를 보낸다. 음악 신청은 손 글씨로 쓴 메모지에 사연과 신청곡을 적어 DJ 뮤직 박스의 작은 구멍으로 밀어 넣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데, 이렇게 DJ에게 신청곡을 부탁하는 행위는 청년들에게 은밀한 위로이자 수줍은 고백의 통로이고, 엄혹한 시대를 넘어 서로에게 위로와 희미한 희망을 전하는 소통방식이다. 따라서 종로의 다방은 단순한 찻집이 아닌, '청년 문화'를 상징하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곳을 찾는 젊은이들은 사회의 억압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자유와 낭만을 갈구했던 지식인이자 예술 애호가들이라 할 수 있겠다.


남성들은 단속에도 불구하고 장발을 고수하며 저항 의식을 드러내고, 통이 넓은 나팔바지 형태의 블루진(청바지)을 선호한다. 여성들은 미니스커트, 판탈롱 시대를 지나 이제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롱스커트나 꽃무늬 블라우스를 즐겨 입으며, 유행하는 통굽 구두를 신는 것이 멋이다. 이들은 이런 수수한 차림으로 낡은 다방에 모여 앉아, 양희은이나 김민기의 노래를 들으며 시대의 우울함을 달랜다. 영석은 재수생 시절에 그들의 문화가 너무나 부러웠다. 그래서 과외가 없는 날 종로서적에서 타임지를 사 들고 하루만이라도 온전하게 종로의 하루를 즐겨보고 싶다.

태종이는 교육학과에 다니는데 용모가 귀공자 스타일로 잘 생겨서 여학생들에게 아주 인기가 많다. 친구들은 태종이를 ‘카사노바’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친구네 집은 아버지가 유명 제과점을 소유하고 계실 정도로 부유하다. 항상 멋진 패션 감각을 자랑하고, 입고 다니는 옷도 그렇게 멋이 있을 수가 없다. 과거 영석이가 종로에서 잠깐 입시학원 다닐 때 알던 친구인데 요즘 들어 부쩍 자주 영석에게 연락을 해서 술을 마시자고 한다. 법대 선배들은 법대생이라면 고시 공부를 시작하기 전, 청춘의 낭만을 즐겨야 마땅하다고 한다. 그러나 쪽지를 쥔 그의 손은 묵직한 돌을 쥔 것처럼 무겁다. 수아 때문이다. 남들 다 하는 미팅을 꼭 한번 경험해보고 싶은데, 수아를 배신하는 것만 같아 영석의 마음은 편치 않다.

구겨진 쪽지를 쥔 영석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토요일 저녁의 ‘아폴로’는 지극히 정상적인 청춘의 권리이지만, 지금 그에게는 수아의 순수한 믿음을 짓밟는 가장 비열한 유혹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다른 여자’를 만나는 행위 자체가, 강제 징집당한 수아 오빠의 고통과 거리에서 얻어맞는 동료들의 피를 외면하고 나 홀로 안락한 섬에 피신하려는 비겁함의 증거처럼 생각된다. 그리고 “나도 다른 친구들처럼 대학 신입생으로서의 삶을 살아보고 싶다.”라는 가슴속 갈망은 “지금은 때가 아니다”라고 나약하게 속삭이던 기성세대의 목소리와 다름없어, 스스로에게 내리는 뼈아픈 형벌처럼 영석을 짓눌렀다. 또한 수아에게 ‘정의롭고 따뜻한 사람’으로 남고 싶지만, 미팅 제의 앞에서 흔들리는 자신의 나약함이야말로, 그가 가장 두려워했던 ‘경계인의 비겁함’을 증명하는 것 같아 영석은 숨이 막힌다.

영석은 고개를 숙였다. 구겨진 쪽지 위로 비치는 오후 햇살은 ‘아폴로’의 창가에 앉아 있을 화사한 여학생들의 웃음소리를 환청처럼 들려주는 것 같았다. 영석은 미팅을 거부하는 것이 ‘옳은 길’이라고 이성이 외치고 있음에도, ‘남들 다 누리는’ 청춘의 경험을 영원히 포기해야 한다고 하는 아쉬움에 사로잡혀 갈팡질팡하고 있다. 영석에게 20대의 미팅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대학생들에게 학점이나 고시보다 더 중요한, 인생에서 다시 오지 않을 낭만의 상징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또한 유신 체제 아래에서 언제 자유가 억압당하고 학업이 중단될지 모르는 불안한 현실은, ‘지금 아니면 안 된다’라고 하는 갈급함마저 생기게 한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의 낭만이야말로 다가올 고난을 버티게 해 줄 마지막 탈출구가 아닐까 하는 자기 합리화가 그의 마음을 계속 건드린다. 아울러 수아 오빠처럼 투쟁의 전면에 나설 용기는 없으면서, 그렇다고 고시생처럼 안락한 방에만 갇혀 있고 싶지도 않은 영석에게, 미팅은 가장 안전하고 평범한 ‘대학생’의 모습을 증명하는 길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든다. 영석은 ‘수아에게 진실한 것’과, ‘20대를 온전히 살아내는 것’은 왜 양립할 수 없는 걸까? 시대의 부채 때문에 가장 빛나는 청춘의 권리까지 반납해야 하는 건가?라는 생각에 빠져 교정에 아름답게 피어난 봄꽃들을 감상할 마음의 여유가 없다. 그의 마음은 수아에게 지고 있는 양심의 빚과 스스로에게 지고 있는 청춘의 빚 사이에서 처절하게 갈가리 찢어지고 있었다.

영석은 금잔디 광장 쪽을 돌아봤다. 강의를 마친 학생들이 광장을 가로질러 하숙집이나 도서관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쪽지를 폈다가 다시 힘주어 구겼다. 청춘의 즐거움과 의리, 그리고 시대의 부채. ‘경계인’으로서의 정체성은 가장 사소하고 개인적인 미팅 제의 앞에서조차 용서받을 수 없는 비겁함으로 그는 괴롭다. 그는 구겨진 쪽지를 주머니에 넣지도, 버리지도 못한 채 손에 쥐고 앉아, 대성로를 오르내리는 학생들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고만 있다.

“안 돼. 수아를 생각한다면 그럴 수 없는 일이야.”

영석은 벤치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하늘을 한번 바라보았다. 그는 수아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고, 둘째 오빠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다면 미팅에 나가서 평범한 20대를 연기하는 것은 자신을 기만하는 행위라는 결론을 내렸다. 양심의 짐은 청춘의 낭만보다 더 무거웠다.


영석은 망설임 없이 법대 건물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수강 신청을 해놓은 ‘민법총칙’ 강의를 들으러 가야 했기 때문이다. 고시 공부에 매몰된 선배들과는 달리, 그는 시대의 중심에 있는 지식인이 되기를 원했고, 그 첫걸음은 지금 바로 책상 앞에 앉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문과대학에서 법과대학으로 가는 돌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야! 김영석!”

뒤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종이었다. 강의실에서 쪽지를 건네주고는 어디론가 사라졌었는데 다시 나타난 것이다.

“너 강의 중간에 나가길래 화장실 간 줄 알았더니 어디 갔던 거야?”

“야! 이 찬란한 봄을 어떻게 그냥 보낼 수 있냐?”

태종이 역시 재수를 통해 교육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사실상 교육학에 전혀 관심이 없는 친구다. 이 학교에는 재수생이나 삼수생으로 입학한 학생들이 너무 많아서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입학한 학생을 찾는 편이 훨씬 더 빠르다. 과거 경기, 경복, 서울, 용산, 경동 등 서울의 5대 공립과 배재, 보성, 양정, 중앙, 휘문 등 5대 사립고등학교 출신들이나 경남고, 부산고, 경북고, 광주일고, 전주고, 대전고, 청주고, 춘천고 등 지방 명문고 출신들이 대부분이다 보니 도서관에 가면 수학의 정석이나 성문종합영어를 펼쳐 놓고 있는 학생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내년에 다시 서울대학교 입학시험을 치르려는 생각을 가진 학생이다.

태종이는 다시 삼수해서 대학을 가려는 학생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현재 다니고 있는 학교나 학과에 만족하는 학생도 아니다. 아버지의 성화에 못 이겨 재수했지만, 자신이 원하는 학과가 아니므로 그저 청춘을 즐기다 졸업하고 아버지 사업을 이어받으며 인생 즐겁게 살다 가면 그만이라는 사고방식을 가진 친구다. 그래서인지 매일 밤, 종로 2가의 ‘스타더스트’ 클럽에 가서 춤을 추고 여자를 만나며 그렇게 ‘하루 사랑’에 빠져 사는 친구다. 언젠가 응암동에 있는 그의 집을 가본 적이 있는데, 2층에 있는 그의 방에 여자 친구가 놀러 와 있었다. 태종이는 영석에게 귓속말로 그녀가 밤에 술집에 나가 일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나 아래층에 계신 그의 어머니는 그녀가 집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른다고 해서 영석은 아연실색한 일이 있다. 알고 보니 쪽문을 통해 들어올 수 있고, 2층으로 올라오는 계단이 따로 있었다. 영석은 태종이를 볼 때마다 너무도 다른 환경에서 자란 친구가 왜 자신같이 가난한 사람을 친구라고 좋아해 주는지 알 수가 없었다.


“태종아! 넌 이렇게 부유한 집에서 살면서 나처럼 가난한 놈을 왜 친구라고 하는 거니?”

어느 날 영석은 태종에게 그동안 궁금했으면서도 묻지 못했던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친구가 되는 것에도 이유가 있니?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을 가지고 있어서 좋다 인마! 뭐 잘못된 거라도 있냐?”

“네가 가지지 못한 게 뭔데?”

“제일 먼저 넌 가난을 경험했거나 경험하고 있잖아. 그래서 넌 달라. 순수해. 그게 특별한 거야. 보다시피 난 썩어도 너무 썩은 사람이잖아?”

“더 솔직히 말할게. 나는 네가 가진 그 ‘진짜’가 부러워. 우리 집은 돈은 많아. 그렇지만 그 돈 때문에 나한테 다가오는 관계는 늘 계산적이고 가짜 같았어. 그런데 너는 전혀 그렇지 않아. 너는 내가 가진 배경이 아니라, 그냥 ‘나’라는 사람 자체를 봐주잖아. 그리고 너는 늘 부족한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꿋꿋하게 꿈을 향해 달려가잖아. 네가 가진 그 열정과 생명력이 나한테는 너무 멋있어. 나는 그 진심과 순수함을 찾고 싶어서, 네 옆에 있고 싶어. 네가 나를 쉬게 해주는 것 같거든.”

“네 주위에는 매일 예쁜 여자애들이 붙어 있잖아. 그런데 뭐가 부족해서 그래?”

“야! 저 계집애들 단 한 명도 나를 진실하게 대해준 애가 없어. 내가 맨날 이야기했잖아 ‘하루 사랑’이라고.”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도 믿기지 않거니와 가난하면 순수하다는 말에도 동의할 수 없어서 영석은 태종이의 답변이 크게 와닿지 않았다. 그러나 태종이가 오랫동안 자신을 친구로 생각해 준다는 것은 적어도 ‘하루 친구’가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고, 태종이가 근본적으로 나쁜 친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동안 친한 친구로 지내왔다.


태종이가 영석의 어깨를 덥석 붙잡고는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야, 너 지금 어디 가냐? 법학이 너한테 술 한 방울 먹여줄 것 같으냐?”

“나랑 지금 당장 막걸리 마시러 갈래, 아니면 수업 끝나고 피네 다방 골목에 있는 ‘홍성집’으로 올래?”

“수업은 들어야지.”

영석은 애써 태종의 손길을 뿌리치며 말했다.

“야 인마! 1학년 때는 좀 즐겨. 네 평생 이런 시절은 다시 오지 않아.”

“내가 아는 선배들 1학년 때 열심히 놀고 2학년 때부터 열심히 공부해서 사법고시 잘만 붙더라. 그리고 짭새들이 저렇게 가득 깔렸고 애국청년들은 유신철폐를 부르짖으며 고생하고 있는데 너는 편안하게 강의실에서 수업을 듣겠다는 거야?”

태종이가 멀리 금잔디 광장이나 문과대 앞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는 정보과 형사들을 가리키며 영석의 아픈 곳을 심하게 건드렸다. 사실 영석이가 입학한 후 제대로 된 수업을 들은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다. 데모가 일어나는 날이 많고, 교수님들도 수업 시간에 사용하는 교재의 1/3 정도만 진도를 나갈 뿐이며, 학생들 역시 학점에는 관심이 별로 없고, 사법고시에 합격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늘도 학교 분위기가 아무래도 데모가 일어날 것 같다. 학생 자치권 확보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유인물이 학내 여러 곳에서 눈에 띄고, 정보과 형사들의 움직임이 기민해졌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영석이가 태종이의 유혹을 뿌리치고 법과대학 현관으로 들어가려는데 문과대학 석조건물에서 수십 명의 학생들이 쏟아져 나오며 ‘유신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성로를 따라 정문 앞으로 무리를 지어 달리기 시작했다. 지나가던 학생들도 길을 비켜주면서 같이 구호를 외쳤다. 이렇게 된다면 오늘 수업도 제대로 이루어질 리가 없다. 조금 있으면 최루탄이 터질 것이고 교문에서 가장 가까운 법대 건물은 최루탄 가스로 뒤덮일 것이다.

“잠깐 기다려봐. 강의실에 가보고 올게.”

“가보나 마나야.”

태종이를 뒤로 하고 영석은 2층 강의실로 뛰어 올라갔다. 고상룡 교수님께서 출석을 부르고 있는데 학생이 겨우 다섯 명 정도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영석도 출석 체크를 하고 앉아 있는데 곧 ‘펑’ 소리가 나며 최루탄 터지는 소리가 들리고, 곧 강의실 안으로 매캐한 최루탄 가스가 들어왔다. 교수님이고 학생이고 손수건을 꺼내 눈물 콧물을 닦다가 모두 강의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교수님께서도 더 이상 수업을 진행할 수 없다고 생각하셨는지 강의를 중지하셨다.


“거 봐 인마!” 어느새 태종이가 강의실까지 올라와 있었다. 그의 눈도 빨갛게 충혈이 되고 계속 기침을 해대며 영석의 손을 끌고 건물 밖으로 뛰쳐나갔다.

“영석아! 우리 중앙도서관 쪽 측문으로 나가자.”

태종이는 영석을 데리고 문과대학을 지나 교수회관과 중앙도서관 사이에 있는 샛길을 이용해 와룡동 쪽으로 내려갔다. 정문은 난리가 난 상황이라서 태종이는 경신고등학교 쪽 언덕길을 오르다가 다시 삼선교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삼선교 부근의 ‘나폴레옹 제과점’ 뒤에 있는 허름한 전집에 들어갔다.

“아줌마! 여기 막걸리 한 주전자와 녹두빈대떡 한 장 주세요.”

“야, 김영석. 너 진짜 바보냐?”

태종은 찌그러진 양은주전자에서 따른 막걸릿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켜고는 ''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네가 방금 저 짭새들 피해서 도망쳐 나온 이유가 뭐야? 지식인이 되기 위해서? 아니면 뭐, 고시에 합격해서 정의를 실현하려고?”

태종의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졌지만, 이내 특유의 장난기 어린 빛으로 돌아왔다.

“영석아! 생각해 봐. 이 난리 통에 민법총칙 강의 들으러 갔으면 뭐가 달라졌을 것 같아? 결국 최루탄 가스 마시고 뛰쳐나왔잖아. 이게 현실이야. 이 시국에 교재 1/3도 못 나가는 수업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태종은 빈대떡 한 조각을 집어 영석의 막걸릿잔 앞에 놓인 접시에 툭 던져 넣었다.

“네가 아무리 고결하게 앉아서 책을 본들, 저 독재자 놈들이 바뀌겠어? 아니면 네가 지난번에 말한 수아 오빠 같은 사람들이 고통받는 게 멈춰?”

영석은 말없이 막걸릿잔만 만지작거렸다. 태종의 말이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 허무함, 무력감. 이것이 강의실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그러나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했던 자신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봐. 너도 알고 있잖아.”

태종은 다시 막걸릿잔에 막걸리를 가득 따르면서 말을 이어갔다.

“지금 우리 같은 젊은이들이 이 시대에 할 수 있는 건, 딱 두 가지야. 하나는 저 광장으로 뛰쳐나가 목이 터지라고 민주주의를 외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답답한 현실 속에서 우리만의 '숨통'을 트는 거야.”

태종의 목소리가 낮아지며 영석의 귀에 속삭이듯 닿았다.

“광장으로 나가는 건, 너도 알고 있잖아. 쉽지 않은 일이야. 나도 그렇고. 그런데, 그렇다고 강의실에만 처박혀 있으면 뭐가 달라지는데? 그냥 썩어가는 거지. 이 찬란한 20대를 썩히는 건, 이 빌어먹을 시대에 대한 또 다른 형태의 패배 아니냐?”

영석은 목이 타는 것 같아 앞에 놓인 막걸릿잔을 단숨에 비웠다. 태종은 영석의 막걸릿잔을 다시 채워 영석에게 건네주었다.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웃고, 마시고, 춤추고, 그리고 사람을 만나는 거지.”

그의 눈빛이 의미심장하게 빛났다.

“솔직히 말해봐. 네가 왜 그렇게 수아한테 얽매여 있는 거냐? 네가 수아 오빠 대신 군대 가는 것도 아니고, 감옥 가는 것도 아니잖아. 네가 미팅 한 번 나간다고 해서 수아를 배신하는 게 아니라고.”

“수아도, 어쩌면 네가 이렇게 꽉 막혀 있는 것보다, 밝게 웃고 자기 인생을 즐기는 모습을 더 바랄지도 몰라. 네가 이 시대의 아픔에 공감하는 건 알아. 그 마음 변치 마. 나도 그런 네가 좋으니까. 하지만 그걸 핑계 삼아 네 청춘을 스스로 가두지 마. 네 청춘은 네 거야. 누구도 그걸 마음대로 할 수 없어. 독재자도, 심지어 수아조차도.”

“숙대생들 이래. 어때? 설레지 않냐? 이 어두운 시대에도 피어나는 꽃들 같은 존재라고. 그 꽃을 감상할 줄 아는 것 역시 지식인의 덕목 아니겠냐?”

그는 능글맞게 웃었지만, 그 웃음 속에는 영석에게 보여주고 싶은 '자유'에 대한 간절함이 엿보였다.

“미팅에 나간다고 네가 갑자기 변절자가 되는 것도 아니야. 그냥 잠시, 아주 잠시, 이 지옥 같은 현실에서 벗어나 아름다운 그림 한 폭을 감상하는 것이라고 보면 되는 거야. 그림 속에는 웃음과 낭만이 있겠지. 네가 돌아와서 다시 이 현실을 마주할 때, 그 그림 한 폭이 너를 지탱해 줄 힘이 될 수도 있는 거라고. 안 그렇니?”

태종은 영석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았다.

“영석아! 청춘의 낭만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다가올 고난을 버티게 해 줄 마지막 탈출구가 아니라, 유일한 생존 전략일 수도 있어. 네가 이 미팅 한 번으로 수아에게 ‘정의롭고 따뜻한 사람’이 아닐 것 같아? 아니야. 진짜 ‘비겁함’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을 가두는 거야. 지금 너한테 필요한 건, 용기가 아니라 숨 쉴 틈이야.”

그는 다시 막걸릿잔을 채워 영석에게 건넸다.

“어때? 토요일 오후 3시. 종로 '아폴로' 나랑 같이, 이 썩어가는 세상에서 잠시라도 숨 좀 쉬어보지 않겠냐?”

영석은 태종이 건넨 막걸릿잔을 받아 들었으나, 잔을 입술로 가져가지 못하고 그저 맑은 액체 속을 하염없이 들여다보았다. 희미하게 떠오르는 녹두 빈대떡의 기름기와 전집의 습한 공기, 그리고 태종의 능글맞은 얼굴이 막걸리 표면에 일렁였다.

태종의 말은 논리적이었다. ‘숨통’, ‘유일한 생존 전략’. 강의실의 무력함을 막 경험한 영석에게 그 말들은 도피의 합리화가 아닌,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외침처럼 들렸다. 그래, 이 지옥 같은 시대에 우리에게 허락된 것은 단 두 가지뿐일지도 모른다. 처절하게 투쟁하거나, 아니면 잠시나마 숨을 쉬는 것. 태종은 후자를 택하라고 종용하고 있었다.


“태종아!”

영석이 입을 열었으나 목소리가 생각보다 작게 나왔다.

“네 말 이해해. ‘숨통’이 필요하다는 거 나도 알아.”

그는 막걸릿잔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그 숨통이라는 게, 나한테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외면하는 대가처럼 느껴진다. 너는 그게 ‘개인의 권리’라고 하지만, 나한테는 일종의 ‘비겁함’이야. 강의실에 들어가지 않고 막걸리를 마시는 건 괜찮아. 어차피 수업은 무산됐으니까. 하지만 ‘아폴로’는 달라. 거긴….”

영석은 잠시 말을 멈췄다. 종로 2가 ‘아폴로’는 그에게 단순한 미팅 장소가 아니라, 순수한 믿음을 배신하는 행위의 상징처럼 느껴졌다.

“거긴 수아의 순수한 믿음과 그리고 오빠의 고통이 비집고 들어올 틈조차 없는 너무 안락한 섬이야.”

영석은 고개를 숙였다.

“네 말대로, 내가 미팅에 한 번 나간다고 이 시대가 바뀌지 않아. 수아 오빠의 고통이 멈추지도 않지. 하지만 내가 미팅에 나가는 순간, 나는 나 스스로에게 패배하는 거야. 수아에게 ‘정의롭고 따뜻한 사람’으로 남고 싶은 영석이가, 가장 평범한 유혹 앞에서 무너지는 거잖아.”

그는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구겨진 쪽지를 무의식적으로 매만졌다. 쪽지의 딱딱한 감촉이 손끝에 전해졌다.

“너는 날 친구라고 하지만, 내가 가진 게 ‘가난과 순수함’이라고 했지? 그런데 태종아, 그 순수함이라는 게, 수아에 대한 미안함 없이는 지킬 수 없는 짐이야. 내가 그 짐을 버리고 ‘나만의 낭만’을 찾는 순간, 너는 나를 더 이상 순수하다고 봐줄까? 나도 내가 가진 ‘진짜’를 잃을까 봐 두려워.”

영석은 창밖의 희미한 햇살을 바라보았다.

“네 말대로 시대는 우리에게 너무나 큰 짐을 지웠고, 청춘의 권리마저 반납하라고 강요하는 것 같아. 나도 ‘남들 다 하는’ 낭만을 누리고 싶어. 하지만 그 낭만의 입구에서 수아가 나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는 환영이 보여. 내가 그 문을 들어서는 순간, 나는 그녀를 배신하는 것이고, 이 시대의 아픔에 침묵하는 거라는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

태종은 말이 없었다. 빈대떡을 뒤집던 아줌마의 묵직한 손길 소리와 기름 끓는 소리만이 전집 안에 가득했다. 영석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으나, 그의 어깨는 여전히 무언가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듯 굽어 있었다. 영석의 침묵과 고뇌가 막걸릿집의 습하고 무거운 공기를 더욱 짓눌렀다. 태종은 영석의 말을 들으며, 평소의 가벼운 카사노바가 아닌, 부유한 환경 속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진짜’를 고민해 온 지식인의 얼굴을 드러냈다. 그는 영석의 ‘미안함’을 정면으로 받아치되, 그 미안함의 방향을 돌려놓는 논리를 전개했다.


태종은 빈대떡을 한 입 크게 베어 문 뒤, 조용히 씹었다. 그리고 막걸릿잔을 들어 영석의 잔과 가볍게 부딪쳤다.

“영석아, 네가 수아에게 미안한 거, 네가 이 시대의 고통에 무감각해지는 게 두려운 거, 다 알아. 그래서 네가 순수한 거고, 내가 널 좋아하는 이유지.”

태종은 고개를 끄덕이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런데 잘 들어봐. 나는 네가 ‘아폴로’에 나가는 게 수아를 배신하는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그녀를 지키는 행위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영석이 고개를 들었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네가 말하는 미안함과 죄책감. 그게 네가 이 시대와 수아에게 지고 있는 부채라고 치자. 그런데 너는 그 부채를 갚기 위해 뭘 하고 있니? 법대 수업에 들어가려 했지. 지금처럼 벤치에 앉아 쪽지 잡고 괴로워하고 있지. 너는 너 자신을 스스로 고립시키고 있어.”

태종은 빈대떡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봐. 네가 지금 막걸리 한 잔을 마시는 것도 사치고, 이 따뜻한 전집에 앉아 있는 것도 사치라고 생각한다면, 넌 이미 네 청춘 자체를 부채 덩어리로 만들고 있는 거잖아. 그 부채가 너를 짓눌러서, 너는 숨도 못 쉬고 있지.”

그는 목소리를 낮추었으나, 단어 하나하나에 힘을 주었다.

“네가 그렇게 네 자신을 짓누르고, 고립시키고, 결국 지쳐 쓰러져 버린다면, 그게 수아한테 도움이 될 것 같아? 네가 가진 ‘진짜’가 소진되도록 방치하는 게, 수아의 믿음에 보답하는 길일까?”

“많은 것을 경험하지 않으면 나중에 내가 보는 세상은 지극히 좁지 않을까?”

태종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영석에게 가장 깊은 곳을 찌르는 질문을 던졌다.

“수아 오빠가 너에게 만약 ‘정의롭고 따뜻한 사람’이 되어 달라고 했다면, 그 정의가 너를 숨 쉬지 못하게 만드는 것까지 포함하는 걸까?”

태종은 미팅의 본질을 ‘휴식’이 아닌, ‘자아 회복’의 문제로 치환했다.

“미팅은 도피가 아니야. 네가 말한 것처럼, 이 지옥 같은 현실에서 잠깐이나마 ‘평범한 20대’의 모습을 되찾는 일이야. 네가 온전한 ‘청년 김영석’으로 잠시라도 돌아가야 다시 현실로 돌아왔을 때 부채 의식에 짓눌리지 않고 꿋꿋하게 설 수 있는 힘을 얻게 돼. 그게 바로 ‘생존 전략’이야.”

“토요일 오후 3시, ‘아폴로’. 거기서 네가 숨을 쉬고, 웃고, 잠깐의 낭만을 가슴에 채워 와야 해. 그 낭만이 네 고통을 짓누르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버텨낼 힘이 될 거야.”

“네가 미팅에 나가는 행위는, 네가 지키고 싶은 수아의 믿음, 동료들의 고통과 같은 모든 것들을 더 오래, 더 힘 있게 지키기 위한 일종의 ‘재정비’라는 말이다. 네가 무너지면, 네가 지키려 했던 모든 것도 무너져. 그게 수아에게 더 큰 미안함 아닐까?”

태종은 빙긋이 웃으며, 영석의 막걸릿잔에 다시 술을 채웠다.

“그러니까, 죄책감 같은 것 갖지 마. 이 시대에 대한 고민을 멈추라는 게 아니야. 단지, 그러한 고민으로 네가 가진 ‘진짜’를 태워버리지 말라는 거지. 숨 쉬자, 영석아. 그래야 오래 싸울 수 있어.”


태종의 설득은 묘하게도 영석의 양심의 짐을 덜어주는 동시에, 미팅 참석에 대한 논리적 근거를 제공하는 것 같았다. 이제 미팅 참석을 ‘비겁함’이 아닌, ‘책임을 다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된 것 같기도 했다.

“네가 미팅에 나가서 애프터 신청을 하고 다른 여자를 만나는 건 정말 수아에 대한 배신이라고 할 수 있어. 그러나 그저 사람 만나는 거야. 그리고 강의실에서 배울 수 없는 요즘 청년들의 고민도 들어보면서 그들과 대화하고 삶의 방향을 재정비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돼. 그리고 수아에게 일부러 미팅에 나간다고 이야기할 필요는 없어. 그거야말로 과도한 자기 억압이야. 그리고 수아 오빠에 대한 미안함도 버려. 수아 오빠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네 인생까지 던질 필요는 없어. 암울할수록 낭만을 잃지 않아야 해. 우리 시대의 암흑 속에서 밝은 것을 잊지 않는 것, 그것이 진정한 저항일 수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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