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1980년 언저리
5월 18일, 일요일 아침의 햇살은 담장 너머에서 들려오는 장갑차의 금속성 궤도 소리만큼이나 서늘했다.
영석은 툇마루 끝에 넋이 나간 채 앉아 있었다. 어젯밤 토해냈던 술기운은 가셨지만, 머릿속은 온통 수아의 마지막 뒷모습으로 가득 차 있었다. 택시 뒷유리 너머로 보이던 그녀의 뒷모습이 계속해서 그를 괴롭혔다. 영석에게 지금의 이 세상은 오직 수아라는 이름의 거대한 소용돌이일 뿐, 그 밖의 일들은 배경조차 되지 못했다.
정희는 일요일이라 출근을 하지 않은 관계로 아침 식사 준비에 분주했다. 영석의 아픈 속을 달래주기 위해 새우젓과 송송 썬 김치를 넣고 콩나물국을 끓였다. 영석은 노란 위액까지 토할 정도로 힘들어했다. 동생의 아픈 마음을 위로할 방법을 찾아보려 했으나 뾰족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곤로 위에 밥솥을 올려놓고 밥이 되기를 기다리는 새에 잠시 TV를 켰다.
브라운관이 한참 동안 예열되는 시간을 가지다가 지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화면이 밝아졌다. 화면 상단에는 ‘비상계엄 전국 확대’라는 위압적인 자막이 고정되어 있었다. 이윽고 굳은 표정의 아나운서가 떨리는, 혹은 극도로 절제된 목소리로 국방부 공고와 정부 발표를 낭독하기 시작했다.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정부는 오늘 0시를 기해 제주도를 포함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 선포했습니다. 이에 따라 계엄포고 제10호가 공포되었습니다. 이는 북한의 남침 위협과 국내의 소요 사태로부터 국가를 보위하기 위한 조치입니다. 따라서 모든 정치 활동은 중지되며, 대학에는 휴교령이 발동되고, 옥내외 집회와 시위는 일절 금지되며, 언론・출판・보도 및 방송 제작에 대한 검열이 강화됩니다.”
정희는 국자를 든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뉴스에서는 전날 밤 전국에서 검거된 소위 ‘소요 배후 조종자’들과 정치인들의 명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김대중, 김종필 등 거물급 인사들의 연행 소식과 함께, ‘불법 집회’와 ‘국가 기강 문란’이라는 단어들이 쏟아졌다.
“영석아! 뉴스 좀 봐라. 세상이 어떻게 되려나 보다.”
정희의 떨리는 목소리에도 영석은 고개를 숙인 채 하염없이 땅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나운서는 이어 ‘계엄군 포고문’을 읽어 내려갔다.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됨에 따라 전국 각 주요 도시에는 계엄군이 배치되었습니다. 국민 여러분은 유언비어에 현혹되지 마시고 생업에 종사해 주기 바라며, 위반 시에는 엄중히 처벌될 것임을…”
뉴스 화면은 서울 시내 주요 대학 정문에 배치된 장갑차와 대검을 장착한 소총을 든 군인들의 모습을 비추었다. 정희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 차가운 철모 아래 가려진 군인들의 살기 어린 눈빛이었다.
정희는 화면 속 장갑차의 육중한 강철 궤도를 보며, 불과 며칠 전인 5월 15일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날, 서울역 광장을 가득 메웠던 10만 대학생들의 함성이 여전히 귓가에 쟁쟁했다.
그날 퇴근길에 전철을 타고 가본 서울역은 거대한 인간의 바다였다. ‘비상계엄 철폐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유신 잔당 물러가라’, ‘정치 일정 단축하라’를 외치는 젊은 목소리들이 서울의 하늘을 찌를 듯 진동했다. 서울역 광장뿐만 아니라 주변 도로까지 학생들과 시민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정희는 서울 시내 30여 개 대학 약 10만 명의 학생들과 인파 속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며, 이제 정말 세상이 바뀌는 것이 아닐까 하는 가슴 벅찬 기대를 품었었다. 버스와 트럭 위에 올라타 태극기를 흔들던 학생들의 얼굴에는 공포보다는 새로운 시대를 향한 희망이 더 짙게 배어 있었다. 따라서 주변 사람들은 경찰력으로는 도저히 통제할 수 없는 수준이고 군이 투입될 것이라는 소문을 주고받고 있었다.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서울지구 대학 학생연합회(서대협) 의장단은 서울역에 배치된 시위용 버스 위에서 끝장 토론을 벌이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렸는데 “자금 청와대로 진격하여 담판을 지어야 한다. 여기서 멈추면 다 죽는다”는 강경론과 “밤이 되면 불순분자가 개입할 수 있고, 군이 투입될 명분을 주게 된다. 일단 후퇴하여 정부의 대응을 지켜보자.”라는 온건론이 대립하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밤이 깊어 갈 무렵, 들려온 소식은 허탈하기가 그지없었다. 서울대 총학생회장인 심재철과 서울대 대의원회 의장인 유시민 등 학생 지도부가 “우리는 폭도가 아님을 증명하고,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평화적으로 귀가한다.”, “내일까지 정부의 확답이 없으면 다시 모이자.”라며 자진 해산하기로 했다는, 이른바 ‘서울역 회군’ 소식이었다.
정희는 그날 밤 시위 현장에서 만난 태종이의 어깨가 평소보다 훨씬 더 무겁게 처져 있던 것을 기억한다.
“태종아, 학생들이 다 집으로 돌아갔다면서? 이제 다 잘 해결되는 건가?”
정희의 물음에 태종이는 대답 대신 담배만 깊게 빨아들였었다. 한참 뒤에야 그는 힘없이 내뱉었다.
“누나! 사냥꾼이 덫을 놓고 기다리는데 짐승이 발을 뺐다고 해서 사냥이 멈추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굶주린 사냥꾼을 더 자극했을지도 몰라요. 학생들은 순수하게 평화를 선택했지만, 저들은 그 빈틈을 노리고 더 큰 칼을 휘두를 겁니다.”
당시에는 정희가 태종이의 그 불길한 예감을 다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광장에 모였던 그 많은 학생이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으니, 정부도 더는 강경하게 나오지 못할 것이라 막연히 믿고 싶었다. 하지만 오늘 아침 TV 화면을 가득 채운 ‘비상계엄 전국 확대’ 자막은 태종이의 우려가 잔인할 정도로 정확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결국 이렇게 되려고 그날 다들 돌아간 것이었나.”
정희는 국자를 든 손에 힘을 주었다. 며칠 전 서울역을 메웠던 그 뜨거운 열기는 온데간데없고, 이제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소총에 대검을 장착한 계엄군들의 서늘한 그림자였다. 학생들이 평화를 선택하며 비워준 광장에, 군화 발소리가 주인처럼 들어앉은 것이다.
정희는 국자를 든 채 멍하니 끓어오르는 콩나물국을 바라보았다. 태종이 그날 밤, 서울역 광장의 매캐한 최루탄 냄새 속에서 내뱉었던 말들은 단순한 우려가 아니라 가혹한 예언이었다. 태종은 흩어지는 학생들의 뒷모습을 보며 이렇게 덧붙였다.
“누나, 훗날 사람들은 오늘을 두고 서로 다른 말을 할 겁니다. 누군가는 ‘그날 청와대로 진격했어야 했다’며, 민주주의를 잡을 마지막 기회를 놓친 ‘천추의 한’이자 ‘역사적 실책’이라고 비판하겠지요. 지도부의 우유부단함이 군부에게 재정비할 시간과 명분을 준 꼴이라고 말입니다.”
태종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말을 이었다.
“반면에 다른 누군가는 그날의 결정을 옹호할 겁니다. 무기도 없는 학생들이 군의 탱크와 맞닥뜨렸다면 서울역 광장은 피바다가 되었을 거라고, 그 희생을 막기 위해 지도부가 고뇌 끝에 내린 ‘불가피한 평화적 선택’이었다고 말이죠. 어느 쪽이 정답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오늘 우리가 비워준 이 광장이 내일 어떤 괴물을 불러들일지 아무도 모른다는 겁니다.”
그때는 태종의 말이 너무 거창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아침, 화면을 가득 채운 ‘전국 확대’와 ‘계엄군 배치’라는 글자 앞에서 정희는 소름 끼치는 진실을 마주했다. 광장을 가득 메웠던 10만 명의 대학생이 ‘폭도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평화적으로 흩어졌던 그 선의가, 오히려 저들에게는 가장 손쉬운 먹잇감이 되어 돌아온 셈이었다.
결국 태종의 말대로, ‘서울역 회군’은 한국 현대사에서 지워지지 않을 거대한 논쟁의 불씨가 될 것이 분명했다. 누군가에게는 유혈 사태를 막은 ‘지혜로운 퇴각’으로,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독재의 길을 열어준 ‘뼈아픈 굴복’으로 기억될 터였다.
정희는 끓어 넘치는 냄새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가스 곤로의 불을 줄였다. 화면 속 계엄군의 서슬 퍼런 칼날은 이미 광장을 넘어 신길동의 좁은 골목까지, 그리고 수아가 사라진 서울역의 그 차가운 아스팔트 위까지 길게 뻗어 있었다.
그때 신길동 집으로 보낸 태종이의 얼굴이 번개처럼 뇌리를 스쳤다. 민우는 어젯밤 무사히 몸을 피했을까? 어제 영석이의 주정 때문에 정신이 팔려 민우의 안부를 확인하지 못한 것이 못내 후회스러웠다. 정희는 끓어 넘치기 시작한 콩나물국 냄새 속에서, 이 화창한 일요일 아침이 누군가에게는 피비린내 나는 추격전의 시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정희가 신길동 안가로 보낸 태종의 전갈은 그야말로 간발의 차였다.
뉴스가 전국을 얼어붙게 하던 그 시각, 신길동 골목 끝자락 최 사장의 집 안방에서 민우는 낡은 라디오를 끄고 몸을 일으켰다. 전날 밤, 태종이 헐떡이며 달려와 전한 “비가 많이 새니 이사를 가라”는 정희의 암호는 민우에게 단순한 경고 그 이상이었다. 그것은 곧 거대한 폭풍이 닥칠 것이라는 최후통첩이었다.
민우는 일동방직의 내부 구조도와 투쟁 지침이 담긴 서류들을 아궁이 속으로 밀어 넣었다. 붉은 불꽃이 종이를 집어삼키는 동안, 그의 눈동자에는 착잡함과 단호함이 교차했다. 서울역에서 학생들이 회군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그는 이미 이 순간을 예감하고 있었다.
“결국 올 것이 왔군.”
민우는 검은색 낡은 배낭에 옷가지 몇 벌과 비상금을 챙겼다. 가장 깊숙한 곳에는 수혁의 죽음과 관련된 복사본 서류 일부를 숨겼다. 그때였다. 골목 어귀에서 낮게 깔리는 디젤 엔진 소리와 함께 거친 타이어 마찰음이 들려왔다. 일요일 아침의 정적을 깨는, 불길하고 이질적인 소리였다.
민우는 창살 틈으로 밖을 살폈다. 검은색 지프차 두 대와 군용 트럭 한 대가 골목 입구를 막아서고 있었다. 차 문이 열리며 튀어나온 이들은 군복 차림에 헬멧을 쓴 계엄군이 아니라, 사복 차림에 짧은 머리를 한 사내들이었다.
“김성태! 아니, 함민우! 안에 있는 거 다 안다. 순순히 나오면 목숨은 부지해 주마!”
이상우 부장이 말했던 ‘중정의 정보력’은 생각보다 훨씬 집요했다. 민우는 신발 끈을 단단히 묶었다. 정문으로 나가는 것은 자살 행위였다. 그는 안방 뒷문을 열고 좁은 뒤뜰로 나갔다. 담장 너머는 바로 옆집의 보일러실과 연결되는 비좁은 틈이었다.
“거기 뒤쪽 잡아!”
담장 너머에서 고함이 들렸다. 민우는 담벼락에 몸을 밀착한 채 숨을 죽였다. 수사관들이 구두 발소리를 내며 마당으로 진입하는 소리가 들렸다.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아무도 없습니다!” 하는 외침이 이어졌다.
민우는 그 찰나의 공백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담벼락 위에 놓인 깨진 유리병 조각들에 손바닥이 찢기는 통증을 느끼면서도 악착같이 옆집 지붕 위로 몸을 날렸다. 신길동의 다닥다닥 붙은 집들은 이럴 때 훌륭한 도주로가 되어주었다. 지붕과 지붕 사이를 고양이처럼 소리 없이 건너가던 민우의 눈에, 골목 곳곳을 차단하고 신분증을 검사하는 군인들의 대검이 보였다.
‘서울은 이미 거대한 감옥이 되었구나.’
그는 영등포역 방향을 한 번 바라봤다. 수아와 영석, 그리고 자신을 지켜주려 했던 정희, 이제 그들과의 연결 고리는 이 안개 자욱한 시대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민우는 골목 끝 세탁소 옆 골목으로 뛰어내려 미리 봐두었던 하수도 근처의 어두운 그늘 속으로 몸을 감추었다. 이제 그가 갈 곳은 단 한 군데뿐이었다.
민우는 하수도 옆 덤불을 헤치고 나와 골목길만 골라 대방동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서울을 빠져나가는 길은 그 자체가 거대한 매복지였다. 뉴스가 발표된 직후, 한강의 주요 대교에는 이미 무장한 계엄군들이 초소를 세우고 통행하는 모든 차량의 트렁크를 열어젖히고 있다는 정보를 들은 바 있기에 민우는 번듯한 길을 포기했다.
그는 야간열차나 고속버스를 타는 대신, 경기도 외곽까지 밤새 걸어서 이동한 뒤 농촌으로 향하는 완행버스와 트럭 짐칸을 전전하기로 했다.
천안을 지날 무렵, 민우는 첫 번째 위기를 맞았다. 국도변에서 갑자기 나타난 군경 합동 검문소였다. 민우가 탄 낡은 트럭을 향해 헌병이 정지 신호를 보냈다.
“어디 가는 거요?”
철모를 깊게 눌러쓴 헌병의 눈빛이 날카로웠다. 민우로부터 매수당한 용달차 운전사는 아무 말이 없고, 민우는 만일의 상황을 대비하여 미리 준비한 대로 밀짚모자를 쓰고 얼굴에 잔뜩 흙과 검댕을 묻히고 흙먼지가 잔뜩 묻은 작업복 소매로 얼굴의 땀을 자신의 고향인 충청도 사투리로 대답했다.
“논에 물 대러 가유?” 뭔 일 있슈? 요즘에 뭔 일로 이렇게 검문검색이 심하대유? 귀찮어 죽겄슈.”
헌병은 능청스러운 민우의 대꾸에 빙긋 웃더니 손을 들어 어서 가라는 신호를 했다.
트럭 짐칸에 실린 농기구들이 민우의 변명을 도왔던 것 같다. 헌병은 민우의 거칠어진 손바닥과 손톱 밑의 때를 훑어보더니 혀를 차며 통과시켰다. 민우가 일부러 손톱을 깎지 않고 길러온 덕분에 때가 끼기 쉬워 헌병의 의심을 피하는 좋은 방법이 된 것 같았다. 민우의 손바닥에 배어 나온 식은땀이 신길동 담벼락에서 찢겼던 상처를 따갑게 자극했다.
충청도를 넘어 전북 땅으로 들어설수록 공기는 더욱 무거워졌다. 도계(道界)를 넘을 때마다 검문은 더욱 집요해졌다. 특히 ‘대학생’처럼 보이는 젊은 남자는 무조건 차에서 내려 신분증을 대조하고 소지품을 샅샅이 뒤졌다. 민우는 검문소 수백 미터 전방에서 미리 내려, 산길로 우회했다.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야산을 타고, 가시덤불에 옷가지가 찢기며 몇 시간을 돌아가 다시 길을 잡았다.
어느덧 사흘째 밤, 민우는 마침내 고창 땅에 발을 디뎠다. 곰소만의 비릿한 바다 내음이 서린 바람이 불어왔다. 멀리 도솔산의 거대한 암벽이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선운사로 들어가는 길목인 ‘삼인리’ 마을 입구에도 초소가 있다는 정보를 듣고 민우는 산을 넘어 삼인분교 쪽으로 길을 잡았다. 그리고 혹시 모를 선운사 입구의 검문을 피하려고 산 쪽 길을 따라 걸었다. 새벽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선운사 일주문을 지나 휘어진 길을 따라 걷는 민우의 몰골은 처참했다. 며칠간 제대로 먹지 못해 눈 등이 푹 꺼졌고, 수염은 덥수룩하게 자라 있었으며, 운동화 밑창은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누구십니까, 이 새벽에.”
적막을 깨는 낮은 목소리에 민우가 멈춰 섰다. 천왕문 근처에서 비를 들고 길을 쓸던 젊은 스님이 빗자루를 멈추고 그를 보고 있었다. 민우는 정희가 일러준 대로 합장을 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서울에서 영석이 누님의 소식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잠시 몸을 누일 그늘을 찾고 있습니다."
스님은 민우의 찢어진 옷자락과 피 섞인 땀방울이 맺힌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스님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빗자루를 옆으로 치웠다.
“산 아래는 벌써 난리가 났다더니, 귀한 손님이 오셨구려. 따라오시오.”
민우는 노스님의 뒤를 따라 대웅전 뒤편, 동백나무 숲이 울창하게 우거진 만세루 옆 작은 요사채로 향했다. 서울의 광풍으로부터 수백 킬로미터를 도망쳐왔지만, 민우의 귓가에는 여전히 장갑차의 궤도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만세루 처마 끝에 걸린 풍경이 새벽바람에 ‘챙그랑’ 소리를 내며 울었다. 그 소리는 마치 이 고요한 산사조차 다가올 거대한 비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예고하는 경종처럼 민우의 가슴을 때렸다. 민우는 요사채 문턱에 주저앉으며 비로소 참았던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제 영석과 정희의 고향, 선운사의 깊은 품속으로 민우의 고단한 망명이 시작되고 있었다.
민우는 정희의 고향이 이 부근이고 정희의 어머니가 아직도 이 부근에 살고 계신다는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은 바 있고, 그녀의 고향이 선운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탑정마을이라는 이야기도 들었기에 선운사가 전혀 낯설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다만 정희와 연락을 할 수 없으므로 홀로 이 외롭고 힘든 난관을 헤쳐가야 한다는 사실이 서글펐다. 정희나 영석이와 연락이 닿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그렇지만 정희가 고향 이야기를 할 때마다 정희 어머니가 잘 아시는 스님들 이야기를 많이 했기에 기억나는 태허 스님을 찾아뵙기로 했다.
민우는 요사채에서 하룻밤을 뜬눈으로 지새운 뒤, 이튿날 새벽 일찍 몸을 일으켰다. 몸은 천근만근이었으나 정신은 오히려 날카롭게 깨어 있었다. 그는 젊은 스님의 안내를 받아 선운사 본절에서도 한참을 더 올라가야 하는 깊은 숲 속, 참당암(懺堂庵)으로 향했다. 참당암은 신라 시대부터 이어져 온 유서 깊은 암자로, 세상의 소란과는 담을 쌓은 듯 고요했다. 그곳에는 정희가 입이 닳도록 말했던 태허 스님이 계셨다.
정희는 서울에서 힘들 때마다 “우리 고향 참당암 태허 스님은 내 마음을 빤히 들여다보시는 분 같아”라며 그리움을 표하곤 했었다.
“태허 스님을 뵙고자 왔습니다.”
민우의 청에 요사채 문이 열리고, 서리가 내려앉은 듯 하얀 눈썹이 인상적인 노스님이 모습을 드러냈다. 태허 스님은 민우의 초췌한 몰골을 보고도 놀란 기색 없이 찻잔을 내밀었다.
“서울서 오느라 고생이 많았겠구려. 그 눈동자를 보니 험한 불길을 건너온 모양이오.”
“스님, 면목 없습니다. 서울에서 김정희 씨와 김영석 군으로부터 스님에 관한 이야기를 하도 많이 들었기에 염치 불고하고 찾아왔습니다.”
‘정희’와 ‘영석’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태허 스님의 무심하던 눈매에 온화한 빛이 감돌았다.
“정희와 영석이? 그 아이들이 보낸 손님이라면 내칠 수 없지. 정희 어메가 탑정마을에서 아모레 화장품 가방을 메고 이 산길을 오르내린 지가 벌써 몇 년이나 되었는지 모르겠네. 우리 절 식구들 화장품뿐만 아니라 치약 하나, 비누 하나까지 모두 다 그 양반 손을 거치지 않은 게 없지.”
태허 스님은 찻물을 따르며 빙그레 웃었다. 민우는 그 말에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졌다. 정희가 서울 공장에서 고단한 삶을 버텨내듯, 그녀의 어머니 역시 이 깊은 고창 땅에서 화장품 가방을 메고 억척스럽게 삶을 일궈오고 계신 것이다.
“정희 어메는 지금도 탑정마을 그 자리에 살고 계신다오. 아모레 아줌마라고 하면 이 근방서 모르는 사람이 없지. 하지만 지금 산 아래 분위기가 심상치 않으니 자네가 직접 마을로 내려가는 건 범의 아가리로 들어가는 격이야.”
태허 스님은 잠시 창밖의 짙은 녹음을 응시하다가 나직하게 덧붙였다.
“언제쯤 정희 어메가 절에 물건을 들고 오기로 되어 있는지 모르겠네만 그때 내 비밀리에 자네와 만날 수 있게 자리를 마련해 보겠네. 정희 소식을 전해 듣는다면 그 양반도 무척이나 반가워할 거야. 그때까지는 여기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운을 기다리게나.”
민우는 태허 스님의 배려에 깊이 고개를 숙였다. 서울의 장갑차와 중정의 감시망을 피해 도망쳐온 길 끝에서, 정희의 향취가 묻어나는 어머니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민우는 비로소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꼈다.
참당암 처마 밑으로 산바람이 불어와 민우의 헝클어진 머리칼을 스치고 지나갔다. 정희의 고향,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 민우는 이제 혼자가 아니라는 묘한 안도감과 함께, 이 인연이 자신을 어떤 운명으로 이끌지 생각하며 깊은 잠을 청하지 못한 채 산사의 밤을 맞이했다.
민우는 요사채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이튿날 새벽 젊은 스님의 안내를 받아 선운사 본절의 소란을 피해 더 깊숙한 곳에 자리한 동운암(東雲庵)으로 자리를 옮겼다. 본래 대웅전이 있는 본절에 머무르려고 했으나 그곳은 왕래하는 신도들이 많아 눈에 띄기 쉽다는 태허 스님의 판단 때문이었다. 동운암은 규모는 작지만, 숲이 울창해 몸을 숨기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태허 스님의 말씀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민우의 청에 동운암의 낡은 목조문이 열리고, 서리가 내려앉은 듯 하얀 눈썹이 인상적인 노스님이 모습을 드러냈다. 노스님은 민우의 초췌한 몰골을 보고도 놀란 기색 없이 따뜻한 찻잔을 내밀었다.
“서울서 오느라 고생이 많았겠구려. 그 눈동자를 보니 험한 불길을 건너온 모양이오.”
“스님, 면목 없습니다. 서울에서 김정희 씨와 김영석 군으로부터 동운암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태허스님의 말씀도 있었기에 염치 불고하고 찾아왔습니다.”
‘정희’와 ‘영석’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노스님 역시 밝게 웃으셨다.
“정희와 영석이? 아모레 아줌마도 내가 잘 알지.”
동운암에서의 그날 밤, 민우는 노스님이 내어준 작은 방에서 눅눅한 솜이불을 덮고 누웠으나 잠은 오지 않았다. 산사의 정적은 오히려 서울에서 가져온 불안을 증폭시켰다. 그때, 밖에서 나지막하게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함 선생, 아직 깨어 있소? 내 법현이라고 하오.”
문을 열자, 낮에 그를 안내했던 젊은 법현 스님과 또 다른 수행자인 법만 스님이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의 품에는 신문지로 싼 뭉치 하나와 작은 라디오가 들려 있었다. 노스님의 묵인 아래, 젊은 스님들이 외부의 소식을 민우에게 전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었다.
법만 스님이 방 한가운데에 라디오를 놓으며 주파수를 맞추자, ‘치지직’ 거리는 잡음 사이로 해외 단파 방송이 흘러나왔다. 법현 스님은 품에서 신문지 뭉치를 풀었는데, 그것은 누군가 광주에서 목숨을 걸고 가져온 듯한 조잡한 등사판 유인물들이었다.
“이게 다 뭡니까?”
민우가 떨리는 손으로 유인물을 집어 들자, 법현 스님이 비장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광주입니다. 지금 광주가 피바다로 변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어제 5월 18일 오전부터 전남대 정문에서 학생들과 계엄군이 충돌했는데, 군인들이 대검으로 학생들을 찌르고 곤봉으로 머리를 박살 내고 있다고 합니다. 길 가던 시민들까지 무차별로 때려잡아 트럭에 싣고 간다더군요.”
민우는 유인물에 적힌 내용을 눈으로 훑어 내려갔다. ‘계엄군은 물러가라’, ‘내 형제를 살려내라’는 처절한 문구들이 활자마다 박혀 있었다.
“스님, 그렇다면 지금 광주는 어떻게 됐습니까? 시민들은 가만히 있답니까?”
“가만히 있을 리가 있겠소?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걸 본 시민들이 하나둘씩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있답니다. 하지만 총칼 앞에 맨손인 시민들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고창에서도 광주로 가는 길목은 이미 공수부대원들이 쫙 깔렸다는 소문입니다.”
“그런 와중에 이런 유인물은 어떻게 구하신 건가요?”
“광주를 벗어나는 루트가 있습니다만 처사님은 이곳 지리를 잘 모르시니 자세한 설명은 드릴 수 없고, 여하튼 상대적으로 검문이 덜 심한 루트를 이용해 빠져나온 사람들이 가져온 것들입니다. 정문인 일주문으로 들어오는 것은 위험하므로 사찰 뒤편 산줄기를 타고 참당암이나 도솔암 같은 암자로 숨어들어온 분들이 가져온 것들이지요.”
민우의 심장이 터질 듯이 뛰기 시작했다. 자신은 목숨을 부지하려 이 고요한 동운암에 숨어들었는데, 남도의 심장인 광주에서는 동지들과 시민들이 고립된 채 죽어가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바닥의 찢긴 상처가 다시 터졌는지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다.
“이곳 산세가 깊다 한들, 광주의 피비린내를 막아주지는 못할 것입니다. 스님, 모레 정희 누님의 어머니를 뵙고 나면, 저를 광주로 가는 가장 빠른 산길로 안내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두 젊은 스님은 서로 쳐다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너무 위험합니다.”
“그래도 꼭 가고 싶습니다. 도와주십시오.”
민우는 무릎을 꿇고 간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