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목교

1978년-1980년 언저리

by 서완석

8화 연탄가스와 수아


아침에 머리가 너무 아파서 잠이 깬 영석이 바지를 입으려는데 다리를 바지에 꿸 수가 없었다. 영석은 어떻게 해서든지 바지를 입으려 했지만,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어 뒤뚱거리다가 방문에 머리를 박으면서 마당으로 고꾸라 떨어졌다. 실비가 내리는 속에 영석은 마당에 코를 처박고 있는 형국으로 쓰러졌다.

"워메, 워메, 이게 뭔 일이당가? 학생! 학생! 정신 차려!"

"누나는 어디 있당가? 워메 거품을 물고 있네, 숙희 아버지! 숙희야! 동네 사람들 언능 와보시오"

"연탄가스 맡았는 게벼, 누구 동치미 국물 좀 언능 떠가지고 오시오."

아스라이 곰소댁의 목소리가 들렸다.


"워메 학생 정신 차렸는가? 뭔가 '쿵'소리가 나서 마당에서 시장 갈 준비 하다 힐끗 쳐다봉게 학생이 쓰러져 불더라고"

곰소댁의 말에 의하면, 영석이가 깨어나는 데는 30분 정도 걸린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누나는 이웃 아저씨 둘이서 영등포의 한강성심병원으로 데려갔다고 한다.

"서울대학병원에는 고압산소치료기가 있다던디, 영등포 한강성심병원에도 있을랑가?"

"서울대학병원에는 10여 년 전에 들여왔는디, 다른 병원에는 없다던디?"

이웃 사람들이 근심 어린 얼굴로 영석의 얼굴을 살피면서 서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내가 죽일 년이여! 요즘 날씨가 쌀쌀해징게, 남매가 쪼까 따땃하게 자라고 연탄불을 피워서 아궁이에 넣어주었더니만, 내가 미친년이여!" 곰소댁이 자기 가슴을 세게 치며 말했다.

"동치미 국물 아니었으면 뭔 일이 났을 거여"

영석은 누나의 안부가 궁금해서 물어보고 싶은데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아직도 머리가 깨질 듯 아프고, 멍한 느낌, 속이 울렁거리고 토할 것 같은 느낌, 몸에 아무런 힘이 없고 자꾸 잠이 오면서 의식이 저만치 달아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학생 누나는 어떻게 되었디야?"

"응, 거품을 물고 경련을 일으키니까 우리 집 냥반이 빨리 한강성심병원으로 데리고 가라고 혀서 김 씨 아저씨와 이 씨 아저씨가 일 나가는 것도 작파허고 병원으로 싣고 갔당게"

"근디 치료비가 걱정이랑게, 작년 7월 1일부터 500인 이상 사업장 근로자에게 의료보험제도가 도입되었고, 올해는 공무원 하고 사립학교 교직원들까장 의료보험 대상이 된다고는 허드만, 우리 같은 무지렁이들은 어디 가당키나 하겄나?"

"세상은 잘난 사람들 편이여?"

"100미터 달리기를 허는디, 어떤 놈은 90미터 앞에서 출발하고, 어떤 놈은 정확허게 출발선에서 출발허는디, 어디 상대가 되겄는가? 하나님 아버지는 없는 게 확실혀"

곰소댁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신부님 앞에서는 고양이 앞에 쥐맹키로 "아멘, 아멘" 하믄서 오늘은 하나님이 없다고 하믄 신부님이 꽤나 좋아허겄구만, 근디, 곰소댁은 시장 안 나가는 겨?"

충청도가 고향인 논산댁이 곰소댁에게 물었다.

"사람이 죽고 사는 판이고, 내 잘못이 큰디 돈 버는 게 뭔 대수랑가?"


두 시간쯤 지나 누나는 김 씨 아저씨 등에 업혀 들어왔다.

"엄마! 언니 오네" 숙희가 소리 질렀다. 정선생도 근심 어린 얼굴로 처음으로 사람들 가까이 왔다.

"병원에서 입원해야 한다고 하는디, 자꾸 그냥 집에 가겠다고 허니 어쩌겄어 돈이 웬수지"

김 씨 아저씨가 이 씨 아저씨의 도움을 받아 누나를 마루에 눕혔다. 누나의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백지장 같았다.

"회사 가야 하는데, 제가 안 나가면 경리 볼 사람이 없는데" 누나는 자나 깨나 회사에서 잘릴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

"아따 지금 회사가 문제여?" 곰소댁이 누나에게 냅다 소리를 질렀다.

"죽어뻔지면 다 소용없는 거여"


"그런데 방구석 어디에서 연탄가스가 새는지 살펴봐야 할 텐데?" 정선생이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가 살펴볼라요"

이 씨 아저씨가 방으로 들어가 낡은 장판을 걷어 올렸다.

"아이고 클날 뻔했구먼 그랴, 살아있는 게 용허구먼"

"방바닥이 쩍쩍 갈라져 있는디 어쩌코롬 살았디야?"

"그럼 김 씨 아자씨가 미쟁이 일 헝게 쎄멘을 발라서 고쳐 주셔야 겄는디?"

"아 그럼요, 그래야지유, 가난한 우리들 젤로 좋은 것은 이웃 간의 정 아니겄슈?"

논산댁 남편인 김 씨 아저씨는 고향이 강경이라 했었다.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밀러 신부님이 달려왔다.

"시멘트 바른 것이 마르려면 시간이 걸릴 테니 두 사람은 며칠간 우리 교회에서 자도록 해"

"이왕 허는 김에 도배까지 싹 해버리는 것이 좋지 않을랑가?"

곰소댁의 말에 누나는 힘없이 손사래를 쳤다. 누나는 돈이 들어갈까 봐 그런 것이라는 걸 영석은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염려 붙들어 매라구, 이 분들이 다 알아서 할 것이고, 이 분들이 맨날 하는 일이니 아무 걱정들 말아, 돈 걱정도 하지마" 다시 멀치감치 떨어져 있던 정선생이 한 마디를 했다.

"그려, 그려 내 잘못이 가장 킁게, 어서 몸이나 추스르더라고"

영석은 누나의 눈가에 눈물이 주르륵 흐르는 것을 보았다.

"배부른 상전이 배고픈 하인의 심정을 어찌 알겄는가만, 배고픈 사람은 배고픈 사람의 심정을 너무나 잘 아는 벱이여"

"그려, 우리는 암시랑토 않응게 걱정일랑 팍 놔부러"

이틀이 지나 영석과 누나는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지난 물난리 이후 방에서 나던 기분 나쁜 곰팡이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아 두 사람은 너무 기분이 좋았다. 누나는 하루 쉬고 출근했으나 영석은 3일이 지나서야 남산도서관에 나갈 수 있었다. 체력장이 며칠 남지 않았는데 축난 몸을 어떻게 회복하나 걱정이 되면서도 언제 건강해서 체력장 점수 잘 받았더냐 생각하니 마음이 오히려 편해졌다. 영석은 정신 차리고 공부하자고 마음을 먹고 화장실 가는 것 외에는 바깥바람 한 번 쐬지 않고 공부에 열중하였다.

저녁때가 되었는데, 밥 생각은 없고, 달착지근한 것이 생각나서 영석은 매점으로 갔다. 삼립식품의 소라빵, 단팥빵, 메론빵 등이 있었지만 영석은 달콤한 크림빵이 먹고 싶어서 보름달 1개와 크림빵 1개를 샀다. 홀로 매점 구석에 앉아 보름달을 한 입 베어 물자 달콤한 버터크림이 영석의 입안에 가득 찼다.


"삼춘, 여기 있었네?"

익숙한 목소리에 영석은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깜짝 놀랐지? 나보고 싶어서 정독 도서관 안 가고 여기 올 거라고 생각해서 어제 이 시간에 와봤는데 없더라?"

"어제는 나 안 보고 싶어서 정독도서관으로 간 거야?"

영석은 어찌할 바를 모른 채, 크림빵 하나를 수아에게 내밀었다.

"아니, 체력장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이 빵쪼가리나 먹고 있으면 되겠어?"

"시간 되면 내가 저녁 사 줄 테니 명동으로 가자"

영석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자신의 처지를 들킨 것 같아 너무 부끄러웠다.

영석은 가방을 챙겨 들고 나와 수아와 남산 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쩐 일이야? 상상도 못 했는데"

남산도서관으로 가면 조금이라도 수아와 가까이 있는 것 같은 기분에 기를 쓰고 일찍 나와 자리를 잡았지만, 수아가 찾아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보낸 선물 받았어?"

"어 그래, 너무 고마워"

"나한테 고맙다는 편지 보냈어?"

선물을 보내줘서 고맙다는 답장을 하려고 했는데 연탄가스 중독으로 못썼다는 말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영석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댔다.

"삼춘네 전화번호 알려줘"

"우리 전화 없는데" 영석이 힘없이 대답했다.

"그래? 그럼 내 전화번호 알려줄 테니 급할 때는 전화해, 알았지?

"우리 집에는 백색전화기가 있고 가게에는 청색전화가 있으니 백색전화로 하지 말고 청색전화로 해, 그럼 우리 일하는 아저씨가 우리 엄마, 아빠 몰래 날 바꿔줄 거야, 나하고 통하는 게 있거든, 누구냐고 묻거든 그냥 오빠라고 해"

"02-797-5678, 외우기 쉽지?" 수아는 모나미 볼펜을 꺼내 영석의 팔뚝에 전화번호를 적어주었다. 영석은 그 번호를 몇번이고 되뇌이며 외우면서도 수아가 갑자기 우러러보이면서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세상에 전화기 한대 놓는 게 하늘의 별따기 보다 어렵다는데 두 가지 종류의 전화기를 가지고 있는 집이 있다니 말이다.


명동의 '조선은행' 골목길을 기웃거리던 수아는 '유투존 백화점' 근처의 '금강섞어찌개집'으로 들어가더니 영석의 의사도 묻지 않고 "여기 '보골보골 오징어찌개' 하나랑 '지글지글 섞어찌개' 하나요"라고 외쳤다. 영석은 수아의 목소리가 참 청량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 식당은 우리 아빠랑 1971년 '대연각빌딩' 지하에 있을 때부터 다녔던 집이야, 분명히 삼춘도 좋아할 거야"

영석은 낡은 인테리어와 테이블 흔들리는 의자가 인상적인 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테인리스 재질의 밥그릇 속에는 기름기가 자르르 흐르는 검은콩밥이 들어 있고, 오징어와 돼지고기가 들어있는데, 아주 매콤하고 시원한 국물이 일품이었다. 보름달 한 개를 먹었는데도 밥 한 그릇을 더 달라고 해서 먹고 싶을 정도였다. 물김치, 배추김치, 미역무침 등 밑반찬은 화려하지 않고 소박하며, 가정식 백반 같은 느낌을 주었고, 짭조름한 계란찜 역시 환상적이었다.


"그럼 다시 남산도서관으로 가자" .

"밥 먹었으니 가서 다시 열심히 공부해, 알았지?"

수아가 영석의 팔짱을 끼며 씩씩하게 말했다.

"도착하면 소화가 잘 되어서 집중할 수 있을 거야?"

"우리 같은 날라리들은 공부에 취미가 없으니 열심히 해서 이 나라를 구하시게나"

수아가 굵은 목소리로 장난스럽게 말하며 폴짝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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