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라는 책을 펼치며

by 축성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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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한 권의 책이다

돌이켜보면, 내 인생의 대부분은 책 냄새 속에서 흘러갔다. 40년이 훌쩍 넘도록 활자를 만지고 글을 다듬으며 살아왔기에, 이제는 사람을 볼 때조차 한 권의 책으로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 오랜 세월이 나에게 '사람의 인생이야말로 가장 잘 쓴 한 권의 책'이라는 통찰을 주었다.

최근이 내 오랜 글쟁이 인생에서 가장 자긍심 넘치는 때다. 마흔 중반까지 20여 권을 내고, 나무가 베이는 게 미안해 20년 동안 출판을 접었다. 그러던 중 내 저서 6권이 교과서에 수록되었다는 메일을 받았다. 스팸으로 착각하고 휴지통에 버렸는데, 확인해 보니 사실이었다. 많지는 않아도 게재료까지 명시된 것을 보고는 20년 만에 온몸의 활자가 깨어나는 듯했다. 통장 입금도 되기 전에 형제들과 친구들, 출판사 직원들에게 술값, 밥값 다 썼다.


어제, 깊어 가는 가을 주말. 중고등학교 동창들이 괴산 산막이옛길로 우정 여행을 떠났다. 목적지로 향하는 관광버스 안, 자기소개 시간이 주어졌다.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마이크를 잡고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교과서에 여섯 권의 내 책이 실렸습니다.”라고 하자, 버스 안이 잠시 조용하더니 “와, 진짜?” 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50년 만에 처음 보는 친구가 “야, 친구 진짜 대단하다”라며 어깨를 툭 쳤다. 그 순간, 20년 동안 묻어둔 자존감이 한꺼번에 터졌다. 나는 웃으며 덧붙였다. “우리는 모두 한 권의 책입니다. 오늘 보니 신간이 몇 권 보이네요.” 동창들의 눈빛이 반짝였다.

정말이지, 사람만큼 흥미롭고 예측 불가능한 책이 또 있을까. 살아온 세월이 굽이굽이마다 숨김없이 기록된 책. 겉모습은 그저 표지일 뿐, 그 위에 새겨진 제목과 저자의 이름이야말로 고유한 정체성이다.


표지를 넘어, 본문으로

버스 안에서 터진 나의 자존감처럼, 나는 동창들의 표지를 넘어 그들의 본문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책의 첫 장을 펼치면 유년의 밝고 깨끗한 종이가 맞이한다. 이어지는 페이지들에는 그 사람만의 산과 내, 그 사이를 떠도는 바람이 담겨 있다. 어느 골짜기에는 사랑받고 성취하며 향기로운 꽃이 피었고, 또 어느 모퉁이에는 어둡고 축축해 다시 생각하기 싫은 그늘진 페이지도 있다.

희로애락의 무게로 구겨지고 젖고 메말랐던 페이지들. 그러나 어떤 책은 끝내 읽히지 못한 채 서가 한구석에 남는다. 어쩌면 내 젊은 날이 그러했다.


산막이옛길을 걸을 때 무릎 아픈 여자 동창이 나에게 손을 잡아 달라고 했다. 손을 잡고 걷는 동안, 그녀는 오랜 세월 숨겨둔 이혼 사연을 술술 털어놓았다. 그녀와 친하게 지내는 다른 여자 동창은 젊은 나이에 혼자되어 자식만 바라보며 지금까지 살았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하도 명랑한 얼굴이기에 그런 사연이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50년 만에 만난 남자 동창도 눈시울 붉히며 낯선 이야기를 꺼냈다.

그때 깨달았다. 우리가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은 책 뒷면의 짧은 소개문만 읽어 줄 뿐이다. 직업, 가족, 지위 같은 몇 줄로 전체를 판단하려 든다. 그러나 진정한 가치는 페이지 깊숙이 잠든 생각과 낯선 지식에 있다. 우리가 미처 경험하지 못한 수많은 이야기 말이다.

사람이라는 책은 소통으로만 열린다. 귀 기울이고 공감하며, 때로는 침묵 속에서 눈빛과 숨결을 읽어야 한다. 독자인 내가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책은 더 풍부하게 펼쳐지거나 영원히 덮인다.


서로를 읽는 도서관

걷는 동안 살며시 다가온 누군가 말했다. “친구, 글 잘 쓰는 거 참 부럽다.” 또 누군가 “대리만족 제대로 했다”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여기저기서 친구들이 스스로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나도 내 책 좀 읽어줘.”

숨겨둔 사연, 아픈 기억, 자랑하고 싶었던 순간들이 쏟아졌다. 나는 친구의 이름을 불러주며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최 아무개’라는 제목의 책을 읽어볼 생각이야!”

“내 차례는 언제?”

곁에 있던 친구가 끼어드는 바람에 웃음꽃이 피었다. 나는 누군가가 읽어 주기를 기다리던 책장들이 스스로 열리는 광경을 보았다. 감격이 밀려왔다.

오랜 세월 책을 만들며 알았다. 잘 만들어진 책 한 권이 수천 명의 삶을 바꾼다. 하물며 살아 숨 쉬는 한 사람의 인생 책은 얼마나 더 강력하랴. 그 안에는 요동치는 감정, 실패를 딛고 일어선 용기, 내일에 대한 간절한 희망이 담겨 있다.

우리는 광활한 도서관 속을 걸어 다니는 책들이다. 서로를 스치며 미세한 진동을 일으키는 귀한 책들. 중요한 건 유명세가 아니라 내용의 깊이와 진실성이다.

이제 나는 60대 중후반에 배운, 가장 값진 독서법을 실천하려 한다. 사람을 만날 때마다 이렇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묻는 것이다. "당신이란 책을 읽고 싶어집니다. 어느 골짜기에 가장 향기롭고 아름다운 꽃이 피어 있는지 말입니다." 그러면 상대는 웃으며 자신의 가장 빛나는, 혹은 가장 진실한 페이지 한 장을 슬쩍 열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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