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며칠 전 첫눈이 폭설로 내렸다.
수도권 눈으로는 무려 117년 만에 가장 많이 내렸단다.
눈이 오고 한 이틀 너무 따듯해, 올해 눈이 얼마나 오려고 이렇게 따듯하나!
그러더니 어제부터 춥다. 오늘 아침은 칼바람에 살이 에인다.
서둘러 아침을 먹고 8시 좀 넘어 집을 나섰다.
아파트를 벗어나 사거리 신호등 앞에서 녹색불을 기다리며 서 있었다.
오른편 저쪽 00 은행 앞, 사람들이 추위에 아랑곳없이 줄 서 있다.
두 겹으로 늘어선 줄이 거의 100m는 족히 될 것 같다.
궁금해 길 건너다 말고 가까이 다가간다.
대부분 노인이 긴 줄을 만들고 서 있었다.
보통 70~80은 돼 보이고 더 나이 드신 분도 있어 뵌다.
가끔 중장년의 살집 있는 남녀도 섞여 있다.
지팡이를 짚거나 바구니를 옆에 낀 대부분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분들이었다.
호기심에 가까이 다가가 말을 건네본다.
“무슨 일이죠?”
“ 달력 ”
초등학생 등치에 꼬부라진 허리의 하얀 할머님이, 망가진 유모차를 지팡이처럼 의지한 채,
추위에 겨워 짧게, 겨우 말씀하신다.
나도 짧게 응수한다.
“아! ㅎ”
아! 어찌하란 말이냐! 노인의 삶이란!
00 은행의 음력을 곁들인, 글자와 숫자가 큼지막하게 인쇄된 달력이
그들을 줄 세우고 있구나!
맞아, 맞아! 작년, 재작년에도 이 긴 줄을 본 것 같다.
아침 댓바람, 살을 에는 추위에 눈은 아직 쌓여있고 길은 미끄럽다.
은행 문 열려면 아직 한 시간 가까이 기다려야 하는데 어찌할꼬!
1934년생, 혼자 계신 우리 아부지 생각난다.
조만간 전화 오겠다!
“ 달력 얻어놨다. 와 갖고 가라”
“아! 필요 없어요.”
꼬장꼬장 우리 아부지, 전화 놓지 않으시고 말씀 이어 가신다.
“ 애들 잠바도 사놨다.”
“언제 갈게요.”
아버지, 매년 말씀하신 달력이 이렇게 얻으신 건가?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돈도 많다는 00 은행 분들아! 제발 부탁드린다!
그깟 달력, 버려도 남아돌게 척척 찍어 다오!
동네 노인분들 아무 때나 필요한 만큼 가져가, 벽에도 걸고
필요할 때 물건을 싸거나 메모하거나 혹은 치매 예방 붓글씨 연습이라도 하시게!
실컷 쓰고 남는 건 그저 폐휴지로 버려져도 좋겠다.
남아돌아 버려 대는 00 신문 따위들처럼
버려도 남아돌게 척척 찍어 다오! 제발!
길 막는다! 한 부씩만 갖고 가시라! 욕하지 마라!
이 추위에 아랑곳없이 줄 서 계신 노인들 무슨 잘못이랴!
아침 댓바람에 머릿속이 상념으로 가득 차고, 혼란스럽다.
따따부따 시끄럽고 허망한 말들은 흰 눈과 차가운 바람 속에 무의미하게 사라져 버린다.
돈으로 가득 찬 이른바 고위직과 부유한 이들이여,
연말이 오면 달력 한 부씩 찍어내며, 쓸데없는 말들을 쏟아내지 말고,
진정 중요한 것들에 귀를 기울여 보라.
대체 무엇이 진정 중요한지, 묻고 또 묻고 싶다.
2024. 12.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