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고2가 된 우리 집 큰아이는 학교 생활기록부의 ‘진로 희망’ 난을 비워두고 있다. 초등 저학년 때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 글과 그림이 어우러진 만화책을 수십 권 만들어냈다. 인쇄소에 다니는 외삼촌이 그중 몇 권을 실제 책으로 만들어주기도 했었다. 초등 고학년 무렵엔 미술에 흥미를 보였고, 몇 달간 동네 학원에 다닌 적도 있었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수업은 어렵고 재미는 없었다. 중학생이 되면서는 영상 촬영에 빠져 자기 방을 작은 극장처럼 꾸미고 가족을 대상으로 영화를 찍었다. 난데없이 엄마 아빠는 감독의 지시에 따라 연기를 해야 했고, 아이는 무척 즐거워했다. 그러나 고등학생이 된 지금은 오히려 조용히 책을 읽는다. 또래들과는 어울리지 않고, 운동도 멈췄다. 요즘 아이의 유일한 취미는 엄마에게 부탁해 책을 사는 일, 그리고 가끔 유행에서 한참 지난 옛 영화를 보거나 피아노를 치는 것이다. 가끔은 나도 잘 알지 못하는 고전 철학과 문학을 읽으며 혼자만의 세계에 머문다. 현실적인 입시제도 안에서는 가능한 한 빨리 진로를 정하고, 그에 맞춰 생활기록부를 관리하는 것이 합리적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아이는 현실의 직업군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꿈을 적기보단, 아침이면 밤새 꾼 꿈을 기록하는 데 더 열심이다. 책 읽기와 글쓰기를 좋아하는 듯해 관련 진로를 권해보지만, 반응은 시큰둥하다. 대학 진학에 딱히 이유를 느끼지 못하겠다며, 한때는 검정고시 이야기를 꺼내더니 최근엔 그마저도 멈췄다.
반면 둘째는 형과 정반대다. 활달한 성격에 학교생활도 적극적이다. 어려서부터 주변 어른들로부터 개그맨이니 연예인이니 소리를 들었지만, 정작 본인은 그쪽에 큰 흥미가 없다. 가끔 우리 부부는 두 아이가 달라도 너무 달라 반반씩 섞였으면 하는 희망을 농담으로 주고받는다. 중1 때는 게임 개발자를 꿈꾸며 학원도 다니고 특성화고등학교 체험도 다녀왔다. 그런데 작년부터는 유도에 빠져 용인대 유도학과에 가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처가 체육관 관장 등과 상담 후 올해 3월 4일 날짜로 유도부가 체육 특기자, 선수로 등록된 중학교로 전학을 시켰다. 새벽 6시에 일어나 아침 훈련을 하고, 밤 10시까지 운동에 매진했다. 목포와 수원을 오가며 시합도 치렀다. 부모인 우리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면서도, 아이가 견디고 있다는 사실에 조용히 응원했다. 하지만 늘 짠하고 안타까웠다. 부모의 어느 한쪽도 운동 등 체육 관련해서는 젬병이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런 우려가 결국 사실이 되었다. 아이는 3월 중순부터 엄마에게 유도를 그만두고 싶다는 신호를 보냈고, 나는 4월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우리는 여러 차례 대화를 나눈 끝에 결국 그만두기로 했다. 체육 특기자가 되어 전학해 온 지 한 달여 만에 이런 사달이 났으니, 부모로서, 애써준 코치나, 감독 볼 면목이 없었다. 아이가 유도부를 그만둘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아침 운동에 누구보다 성실하게 임했고, 경기에서의 패배에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다시금 의지를 다졌기에 갑작스러운 결정에 더욱 놀라워했다. 하지만 부모 된 죄로 아이의 과거병력, 최근 잠자리의 수면 부족, 잠꼬대. 피로함, 체중감소, 의욕 상실 등을 들어가며 죄인처럼 읊조릴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아이는 자신이 너무 이른 판단을 내렸다고, 어른들 앞에서 후회를 고백했다. 그 말을 들으며, 나는 가슴이 저렸다. "너의 일이니, 너 스스로 답을 해 보아라."는 어른들의 말은, 아이에게 얼마나 무거운 울림이었을까. 그 질문이 결국 나에게 되돌아와, 오래도록 내 마음을 찔렀다. 중학교 2학년, 아직 열다섯의 아이에게 너무 큰 책임과 결정을 맡긴 건 아닐까. 며칠을 어른들 눈치만 보며 견뎌야 했던 아이의 모습이, 내게는 참 가혹하게 느껴졌다. 둘째는 교육청으로부터 유도 선수 해지 결정이 난 후, 원래 다니던 주소지 근처의 학교로 4월 28일부터 등교하기 시작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반 친구들과 깊은 정을 나누었는지, 아이들이 정성껏 쓴 롤링 페이퍼에는 애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요 근래는 경찰관이 되겠다고 또 지나치게 설치고 다니기 시작했다. 엄마를 졸라 새로운 OTT 서비스에 가입해 ‘라이브’라는 경찰관 드라마를 열혈 시청하고 있다. 관련 고등학교를 알아보더니 대학도 궁리 중이다. 옆에서 모른 척 지켜보자니, 이젠 슬쩍 겁부터 난다. 무엇이 되겠다고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내는 일 없는 첫째와 달라도 정말 너무 다르다.
나는 믿는다. 한 사람 안에는 수십 가지 가능성이 숨어 있다. 인생이란 그 가능성을 하나씩 꺼내보며 나아가는 여정이라고. 삶은 늘 똑바른 길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때론 돌아가고, 때론 멈추고, 또 때론 엉뚱한 곳에서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기도 한다. 직업의 세계 또한 서로 맞물려 있고, 겹쳐 있으며, 끊임없이 변화한다. 문·이과, 예체능 같은 큰 갈래는 구분이 가능하겠지만, 중·고교 시절에 지나치게 구체적인 직업을 정하는 일은 세상 경험이 부족한 아이들에게 너무나 가혹한 일이다.
그래서 말하고 싶다.
아이야, 아무것도 꿈꾸지 말아라!
그저 오늘 네 마음이 이끄는 대로, 좋아하는 일을 하렴.
좋아하면 오래 해도 좋고, 싫어지면 언제든 그만두어도 좋단다.
너의 삶은, 네가 살아가며 천천히 만들어갈 이야기니까.
꿈은 너를 가두는 이름이 아니라,
너의 삶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바람이 되기를 바란다.
그 바람이 너를 어디로 데려가든,
나는 언제나 네 편에서 너를 응원할 것이다.
2025. 5.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