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의 그늘>
한때 반려동물과 함께하며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치료하는 수의사를 꿈꾼 적이 있다.
그 꿈의 시작은 지금의 초등학교가 국민학교라 불리던 시절, 학교 정문에서 팔았던 샛노란 병아리를 품에 안았을 때부터 시작됐고 엄동설한에 어미 없이 길가에 버려진 네 마리의 새끼 생쥐와 내 품에 안겨 같이 잠을 잤던 우리 집 고양이의 고통스러운 죽음을 목도한 이후였다. 사람 먹을 것도 없던 형편에 한 식구가 된 우리 집 검은 고양이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 같이 비루한 삶을 피할 길이 없었다.
사람이 남긴 잔반으로 배를 채우다 옆집에서 고기라도 굽는 날엔 그 냄새의 강렬한 유혹을 참지 못해 앙칼지게 울어 대곤 했다. 그리고 그 모습이 그렇게 보기 싫었던지 고기에 쥐약을 섞은 악마보다 더한 옆집의 악행에 온몸이 찢기고 뒤틀리며 고통에 절규하다 점차 죽어갔다. 그리고 그 모습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울며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나의 무기력함에서 그 꿈은 배가 되었을 것이다.
오랜 시간을 힘겨워하다 숨을 거뒀다. 그 고통을 조금이나마 줄여주고 싶었지만 너무 어린 나는 그럴 힘도, 능력도 없었다. 영롱하고 밝게 빛나던 연노랑의 눈빛이 뻑뻑한 돌덩이가 되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그럼에도 그 친구의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넋을 놓고 울고 있는데 조금 전까지 옆에 있던 친구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았다.
몸을 일으켰다. 어디에 있는지 찾아서 반드시 데려와야 했다. 그렇게 집 주변을 살펴보니 길가에 홀로 버려져 있었다. 그래서 차갑고 뻣뻣하게 굳은 몸을 품에 안고 돌아와 집 앞 공터에 예쁜 돌무덤을 만들어줬다.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친구의 무덤으로 향했다. 길가에 피어 있던 들꽃을 꺾어 꽃보다 더 작은 돌무덤 위에 올려 두고 한참을 쪼그려 앉아 있었다. 이렇게 매일 반복되던 아침은 하나뿐인 내 친구의 죽음에 대한 애도의 시간이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뒤 학교에서 돌아온 어느 날, 팔 만한 귀에 회갈색 옷을 입고 코를 벌렁거리며 나를 보던 새 친구가 있었다. 예전처럼 새벽에 잠이 깨어 이름을 부르면 부리나케 품 안으로 달려와 골골대진 않았지만 소심하고 겁 많던 새 친구는 시간이 지날수록 내 손길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함께 정성스레 만들어 준 집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장발장처럼 수시로 탈출하여 온 동네를 휘젓고 다녔다. 그러다 이 사실을 눈치챈 어린 수사관에게 잡혀 통통한 엉덩이를 손바닥에 맡긴 채 멱살 잡혀 끌려오던 다리 짧은 친구는 그렇게 내 일상으로 들어왔다.
그 덕에 산과 들로 나가 민들레와 질경이, 토끼풀을 구해오고 시장 공판장에서 아주머니들이 손질하고 내다 버린 배춧잎과 무청 시래기를 주워 오는 일이 새로운 일과가 되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열심히 먹여 댔다. 하지만 토실한 엉덩이가 커지는 속도만큼 엄청난 먹성을 자랑했던 녀석들의 식성은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학교를 마치고 고사리손으로 힘들게 가져온 토끼풀을 먹일 때 손바닥에 닿던 보드라운 털과 쪽진 입의 감촉은 또래의 친구들이 집단으로 따돌리고 때리며 가슴 깊이 새겼던 피비린내 나는 상처를 조심스레 어루만져 주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토끼풀을 뜯으려고 빈 가방을 멨다. 그런데 개다리소반에 소주 한 병과 이름 모를 고기를 올려 두고 식사하고 있는 아버지를 봤다. 직감적으로 무엇을 느낀 것인지 움직이지 못한 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무슨 고기냐고 따지듯이 물었다.
“무슨 고기야?”
“응, 닭볶음탕이야. 엄마가 맛있게 양념했으니 너도 먹어봐.”
부모님은 계속 닭볶음탕이라고 했다. 그러나 처음 맡아보는 이상한 냄새와 전혀 닭처럼 생기지 않은 모양새의 고기가 나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자꾸 한 입만 먹어보라는 아버지의 권유에 나는 눈물이 그렁거린 채 무슨 고기냐고 계속 따지듯이 물었다.
“무슨 고기냐고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며 어깨에 둘러멨던 가방을 집어 던졌다. 그리고 진한 풀 냄새 한 아름 안고 매일 향했던 녀석들의 집으로 뛰어갔다. 헐레벌떡 거친 숨을 몰아쉴 여유도 없이 숫자를 셌다. 울음이 터지며 다시 세었다. 한 마리가 없었다. 역시나 없었다. 그날 저녁, 부모님은 아무것도 먹지 않고 울고만 있던 나를 달래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하지만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또래 아이들이 전부 싫어했던 외톨이가 유일하게 마음을 나눴던 친구는 어른들의 이기심으로 사그라졌고 이 사실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밤이 되어서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 아픔에 이불 속에서 울기만 했다. 어릴 적부터 항상 그랬다. 인간관계를 맺는 것은 너무 어렵고 힘들었던 반면 동물들과 친해지는 일은 누구보다 빨랐고 쉬웠다. 내가 그들을 알아보면 그들도 나를 알아봤다. 그래서 서로의 마음을 기대고 의지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들이 있어 나는 좋았고 그들은 내가 있어서 좋았다. 그렇게 우린 진정한 친구가 되었다.
나는 이런 사람이었다.
인간이란 유별난 종이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기심을 내세우며 상대방을 대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심리적 자기방어라 부르는 최소한의 감정의 벽을 어릴 적 동물 친구들은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래서 올곧이 상대방의 감정에 집중하며 조금씩 다가가 곁을 내준 뒤 함께하는 삶에서 큰 행복을 느꼈다. 내겐 동물 친구들에게 배웠던 이 방식이 너무 좋았고 이것이 옳은 것이었다. 그래서 좋아하는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기보다 사랑하는 사람을 더 사랑했다. 모든 것의 우선순위가 상대에게 있었으며 내가 즐겁기보다 그 사람이 기쁘기를 희망했다. 내가 불편하고 힘든 것과는 별개로 그 사람이 편하고 행복하면 그만이었다. 이것이 어릴 적 친구들이 내게 가르쳐 준 사랑을 하는 방법이었다.
이런 관계의 방식은 사람 이외에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문제는 사람이었다. 직장 선배로 만나 2년 가까이 사귀던 여자 친구를 데려다주고 집에 가려고 차에 탔다. 그때 한 통의 문자를 받았다. 아주 오랫동안 생각하고 준비한 듯 그날 하려고 했던 차마 꺼내지 못한 말이 적혀 있었다. 넋이 나가 차 문을 닫지도 못하고 손에 쥔 핸드폰만 물끄러미 봤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했으나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날을 넘기고 말았다. 제대로 걷지 못할 정도로 만취한 새벽이 돼서야 전화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마지막 목소리를 들으며 미안하다고만 했다. 아무 말 없이 울다 내려놓은 수화기와 함께 그녀와의 인연은 그렇게 끊어졌다.
아무래도 좋았다.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서로 가야 할 길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내가 먼저 놓아줄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나를 떠난 그 길이 그녀의 삶에 아름다운 꽃길이 된다면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래서 우연히 본 그녀의 머리카락에 그대로 주저앉아 통곡을 해도, 적막이 흐르던 기숙사에서 가슴이 뻥 뚫린 것 같은 고통이 느껴져도 괜찮았다. 그녀를 보내고 두 달이 채 안 돼 새 남자 친구가 생겼다는 소식을 우연히 들었다.
그때에도 그 선택으로 인해 나와 함께 했던 시간보다 지금의 시간이 더 행복하고 충만해졌다면 괜찮았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정확히 일 년 뒤에 일어났다. 일 년이란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고통 속에서 허우적대며 원치 않는 만남을 꿈속에서 이어가고 있었다. 그런 내게 그녀의 결혼 소식이 날아와 꽂혔다. 결혼 인사를 하겠다며 옛 직장 동료들과 내가 있던 사무실까지 찾아왔다. 간신히 피했던 그 자리가 무색하게도 그녀의 청첩장은 내 메일 함에 들어와 있었다. 그때서야 알았다.
사람이 사람에게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그리고 인간의 이기심이 어떤 것인지...
마르셀 푸르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자신의 책에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의 지혜, 즉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을 위해서만 불행해져야 한다는 지혜를 말한다. 어릴 적 동물 친구들이 가르쳐줬던 사랑의 방식이 인간의 삶에서는 현실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러면서도 내가 가진 사랑의 방법이 틀렸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때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마르셀 푸르스트가 얘기했던 것처럼 사랑하지 않을 권리, 그리고 사랑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을 위해 내 삶을 불행으로 몰아넣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내 생각에 대해 치료자는(정신과 의사) 이렇게 대답했다.
“모든 사람은 이기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꽃비 님도 분명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 적이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도 다 이기적이라는 단정 하에 사람과의 관계, 특히 이성과의 관계를 맺지 않겠다는 생각은 반복적인 마음의 고통만을 야기할 뿐입니다."
"이 생각은 분명 나를 보호하기 위한 심리적인 방어 기제일 뿐이고 시간이 지나면 방어 기제는 무너지며 다시 고통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시간이 찾아올 것입니다. 지금까지 꽃비 님은 항상 그런 모습을 보여왔습니다. 그리고 동물과 어린아이들은 참으로 단순한 존재입니다.”
이 말을 들으면서 눈을 감았다.
순간 강한 분노가 치밀어 올라왔다.
“제가 단순한가 봅니다. 그래서 단순한 존재들하고만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람인가 보죠”라고 내뱉었다. (냉정히 생각하면 이 또한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 순간에는 이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때론 인정하기 싫은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래야 자신을 이해할 수 있고 그것이 쌓여 불안과 우울에 맞서는 힘이 된다. 이 글을 빌어 나의 치료자에게 사과의 마음을 전한다.)
그때의 나는 다시 심해진 수면 장애 때문에 항우울제를 스타브론으로 변경한 뒤 지속된 약의 부작용을 견디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심신이 전부 지쳤다. 약에 대한 부작용을 견디는 것도 치료자에 대한 강한 전이로 내 감정이 흔들리며 엉망이 되는 것도 더는 참기 어려웠다. 그래서 정말 더는 못하겠다, 지쳐서 못 하겠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치료자는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아 눈을 감고 있는데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흐느끼기 시작하자 치료자는 그제서야 하던 말을 멈췄다.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더 이상 힘들어서 못 견디겠다고 말했다. 진료실을 나와 병원비를 계산하는데 간호사가 잠깐 시간 되냐며 두 장의 종이를 내밀었다. 이게 뭐냐고 물으면서 보니 검사지였다.
“당신은 몇 번이나 우울하다고 느끼십니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으신 적이 있습니까?”
언제나 틀에 박힌...
그것을 보고 있는데 너무 허탈한 감정이 몰려왔다. 그래서 병원에서 받아온 약을 입에 대지도 않았다. 그 덕에 미열과 또 반복되는 브레인 잽, 잠을 자지 못하는 수면 장애 등 단번에 향정신성의약품을 끊었을 때 나타나는 여러 증상이 시작됐다. 그러나 이제 두 번 다시는 이런 상황을 견디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상담 진료라는 명목으로 내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정신분석은 듣고 싶지 않았다.
그 의견을 받아들이고 포용한다고 해서 현재의 고통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도 믿기지 않았다. 문제는 저녁이 가까워오자 증상이 점점 심해졌다. 한여름에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온몸이 덜덜 떨려 플리스를 꺼내 입으면 땀이 비 오듯 흐른다. 더워 죽을 것 같아 벗으면 얼어 죽을 것 같은 한기가 오며 온몸이 떨리는 오한이 다시 온다. 두터운 이불을 덮고 버텨 보지만 이제는 눈물이 터진다.
그날 저녁, 약 한 봉지를 손에 쥐고 한 시간 가까이 통곡하다 결국 봉지를 찢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