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의 그늘>
어릴 적 항상 혼자였다.
지독하게 가난했던 게 첫 번째 이유였고, 말을 심하게 더듬었던 게 두 번째 이유였다. 집이 가난한 게 내 잘못이거나 부모님 탓이 아님에도 첫 번째 이유 하나만으로도 외톨이가 되기에 충분했다. 이 시대에는 가난한 것도 죄가 되었다. 학교에선 가정환경 조사를 주기적으로 실시했고 심지어 사는 집의 주거 형태와 (자가인지, 전/월세인지) 자동차 소유 여부까지 파악했다.
지금은 집집마다 차 한 대씩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 시절엔 집에 자동차가 있다는 것이 엄청난 부의 상징이었다. 또한 학교 공납금을 밀리거나 수업료를 내지 못하는 학생들은 친구들이 다 있는 교실에서 자신의 이름이 대놓고 호명되는 치욕을 견뎌야 했다. 그리고 이런 비인간적인 행위는 담임 선생님에 의해 스스럼없이 자행됐다.
언제나 시장으로 일을 나갔던 어머니와 터울이 많은 늦둥이였던 탓에 누님들과 함께 등교할 수 없었던 나는 홀로 집에 남아 시장과 학교에서 돌아올 피붙이들을 기다렸다. 일곱이나 되는 대식구가 살기엔 너무나 좁은 단칸방 한구석, 어머니가 일을 나가기 전에 차려 둔 조그만 소반 위의 몇 안 되는 반찬과 이불 속에 숨어 식지 않는 공깃밥이 나를 위한 전부였다. 이보다 더 어렸을 땐 어머니 등에 업혀 다닌 기억이 있다. 너무 어려 집에 홀로 둘 수 없기에 이곳저곳으로 들쳐 업고 다녔던 것 같다. 너무 어릴 적 기억이라 그곳이 어딘지 기억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렴풋이 떠오르는 건 어머니 등에 업혀 긴 시간 동안 버스를 탔고 가는 길이 매우 힘들었다는 것, 그리고 과일이 지천으로 널린 마른 흙바닥에 내가 앉아 있었다는 것뿐이다. 그리고 배 속의 탯줄과 같이 어머니와 나를 이어주던 노끈 한 가닥이 내 허리에 매어져 있었다. 주변이 소란스러웠고 목이 간질간질했다. 그 간지러움은 어머니의 손과 함께 달콤한 과일 한 조각이 내 입안에 들어온 뒤부터 시작됐다. 아마도 팔 수 없는 과일이었던 듯 나를 향해 건네던 어머니의 손길에 간지러움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 과일은 복숭아였던 듯하다.
학교에 입학했다고 해서 내 삶이 달라지진 않았다. 매번 학교 준비물을 챙겨 갈 수 없었던 빈곤함과 심한 말더듬, 초라한 옷차림은 또래 아이들로부터 나를 내쳤다. 미술 시간에 그림을 그리다 계속 참아왔던 소변이 너무 급했다. 하지만 말더듬 때문에 화장실에 가고 싶다는 말을 못 했다. 종이 울리는 쉬는 시간까지 어떻게든 참아 보려다 교실 바닥에 실수를 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날, 나의 모든 것이 무너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를 둘러싸고 놀려대는 아이들의 놀림에 내가 느낀 수치심과 분노의 감정은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다. 알고 있는 선생님의 질문에 대답하고 싶어 신나게 손을 들어 봤지만 또다시 말더듬에 가로막혀 대답하지 못하고 교실 한 가운데에 우두커니 서서 그렇게 바보가 되었다.
어떤 아이도 말을 더듬고 초라한 옷차림에 오줌을 지린 더러운 아이와는 친구가 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단 한 명의 친구도 없었다. 초등학교에서 급식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 집으로 발송된 가정 통신문에 적힌 액수의 돈은 부모님이 다섯 남매를 가르치고 입히며 감당할 수 있는 금액이 아니었다. 그래서 항상 점심시간이 되면 운동장 밖에 나와 있었다. 오히려 그것이 마음이 편했다. 그렇게 운동장에 나와 흙바닥을 거닐고 교정에 있던 나무 그늘 밑에 숨어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나를 숨겨주던 나무들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점심시간이 끝나고 다시 교실로 돌아왔을 때, 내 자리에 식판이 놓여 있었다. 그 어린 나이에 무엇을 알까 싶으면서도 식판을 보고 무너지는 자존감을 느꼈던 모양이다. 내가 이걸 먹으면 마지막 남은 속옷까지 다 벗어젖히고 벌거벗은 모습으로 남들 앞에 서게 된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그래서 그 식판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그런 내 모습에 선생님은 식판을 치우지 않았다. 그리고 나도 끝까지 손을 대지 않았다. 이것이 지독하게 가난하며 말을 더듬고 또래 아이들에게 놀림을 당하던 한 사내아이가 싸우는 방법이었고 그 아이에게는 그 음식을 먹는 것이 자신의 전부를 버리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끝까지 먹지 않았고 결국 선생님은 매질하며 울었다.
나에겐 마음과 우정을 나눈 어릴 적 친구들이 단 한 명도 없다. 소위 부모의 직업이나 재산, 경제적 여력을 따지지 않고 집 앞 대문에서 “꽃비야, 놀자”라고 소리치며 나를 부르던 친구들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사람을 온전한 사람 이외의 것으로는 보지 않고 서로 마음을 나누며 어울린 경험이 없다.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인생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어릴 적 순수한 동심의 시선으로 사람을 보고 판단하지 않는다. 상대방의 사회적 지위와 재산, 집안을 보고 그것이 자신의 이익에 부합되는지, 아닌지를 판단하며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어릴 적 순수한 동심의 관계를 경험하지 못한 나는 그때 그 시절에 그대로 멈춰 있는 것 같다. 이 때문에 아직도 사람을 만나는 게 어리석다.
사람 자체의 순수함만으로 인간관계를 맺어가는 시기는 이미 한참 전에 지나버렸다. 그런데도 어릴 적에 경험하지 못한 감정 상태에 갇혀 현재의 삶에서도 이런 관계를 찾고 있는 것 같다. 지금의 나는 예전에 가지고 있던 극도의 소심함과 내성적인 모습에서 탈피하여 자기 주도적인 삶을 사는 성인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내 마음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그래서 아직도 어린아이처럼 사람에게 헌신하며 마음을 베풀고, 이런 관계의 배우자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는 것 같다. 이것이 내가 아내를 가질 수 없는 또 다른 현실적인 문제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치료자는(정신과 의사) 이런 심리 상태를 내가 가진 판타지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정신분석학적으로는 판타지가 맞을 수도 있다. 현실로 이루어질 수 없는 환상 속의 세계를 떠돌아다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의 치료자가 판타지, 환상의 세계라는 말을 처음 꺼낸 날, 나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순간, 지난 나의 삶이 너무 안쓰럽고 불쌍해서 받아들일 수가 없다. 열한 살의 어린아이가 마지막으로 남은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전부를 걸고 싸웠듯이, 이제는 불혹을 넘긴 중년의 사내가 신념이라 믿는 생각을 지키기 위해 바른 판단을 거부한다.
치료자의(정신과 의사) 충고를 인정하는 순간, 지독히 가난했던 열한 살의 어린아이가 책상 위에 놓인 공짜 음식을 먹는 것과 같다. 그래서 치료자의 의견을 존중하면서도 인정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진정한 내면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예상하지 못한 큰 상처를 직면하는 일이기도 하다.
미처 몰랐던 마음의 상처를 들여다보며 자신을 다독이는 일이지만, 반대로 현실을 직시하는 비참한 시간이 되기도 한다. 자신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해 나가는 과정이 그리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잠시나마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