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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결혼은 하나인가 아니면 다른 둘인가

<고독의 그늘>

by 꽃비

많은 비가 내리던 여름날 아침, 출근길에 우연히 회사 후배를 만났다. 같은 동네에 살다 보니 피치 못하게 종종 마주치곤 했다. 사적인 친분이 아닌 회사에서의 대인 관계였기에 조금이라도 불편한 기색을 보인다면 자연스레 인사만 하고 지나갈 생각이었다.


“안녕, 자주 보네. 출근 시간이 같은가 봐. 거의 이 시간에 만나네.”


“네,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장마래요? 불편하게 뭔 비가 이렇게 와요. 옷 다 젖었어요. 항상 이때쯤 출근하세요?”


“응, 단 5분이라도 회사에 일찍 갈 순 없지. 그래도 비 오니까 시원해서 좋긴 하다.”


간단한 인사말을 나누며 눈치를 살폈다. 나는 지하철역까지 같이 간다고 해서 어색하거나 불편하진 않았다. 그러나 상대가 그렇지 않다면 그건 싫다. 우연히 마주쳤어도 눈인사 정도면 됐지 굳이 어색한 분위기를 만들며 같이 갈 이유는 없다. 상대가 불편한 기색이 있으면 자연스레 피해 주면 될 일이다. 그러나 이런 걱정과 달리 일말의 어색함이 없었다. 그래서 우연히 만날 때마다 시시콜콜한 잡담을 했고 가끔은 같이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둘 다 미혼이었던 우리는 남녀 간의 만남과 사랑, 그리고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사람에게 있어서 진정한 사랑과 결혼은 하나일까 아니면 서로 다른 둘일까?



지겹도록 듣던 말이 있다. 혼기를 꽉 채우고도 넘쳤으니 더 나이 먹기 전에 결혼하라는 말이다. 그러면서 적당한 사람이라는 전제조건이 붙는다. 사람들은 늦은 나이까지 미혼이면 이성에 대한 선택의 기준이 높다는 선입견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눈을 낮추라는 말도 빼먹지 않는다. 그런데 그들의 말처럼 지금까지 혼자인 이유가 정말 이것 때문일까? 언제나 순수한 사랑을 하고 싶었다. 이렇게 천진난만했기에 사람을 만나는데 구분과 구별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상대의 조건과 환경보다 그 사람을 정말 사랑할 수 있는지에 집중했다.


함께 있으면 행복하고 의지가 되는 그런 남자가 되고 싶었다. 작고 소소하더라도 그것을 큰 기쁨으로 나누며 함께 살고 싶었다. 이런 사랑을 원한 건 그것이 가지는 속성에 이유가 있다. 사랑은 보고만 있어도 좋고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날 정도의 큰 기쁨을 준다. 그러나 이것만큼 아픔을 주는 것 또한 없다. 결혼이란 현실로 들어서게 되면 인생의 많은 것을 희생해야 한다. 개인의 시간과 선택의 자유가 사라지고 생계의 부담과 육아의 책임이 따른다. 아무리 피곤해도 집에서 편히 쉴 수가 없고 내 꿈이 현실이 될 수도 없다. 이렇게 많은 변화를 가져오는 인생의 전환점이 된다. 그런데 상대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고 결혼이란 희생을 끌어안을 수 있을까? 나는 그것을 끌어안을 수 있는 진정한 힘이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훗날 그것이 우정이나 전우애로 변하더라도 말이다.


그런데 후배의 생각은 달랐다. 그녀는 사랑과 결혼은 별개의 문제이며 사랑할 사람과 결혼할 사람은 다를 수 있다고 말했다. 그 대답을 듣고 조금 혼란스러웠다. 아니,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게 어리둥절해하고 있는데 문득 옛일이 생각났다.


학교 후배가 소개팅을 해준 적이 있다. 연상의 여자친구가 있는데 그 사람의 친구라며 연락처를 건넸다. 그 연락처를 받고 하얀 눈이 펑펑 내리던 겨울날, 창밖으로 아름다운 설경이 도드라진 레스토랑에서 그녈 만났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그녀에 대해 물었다. 알면 알수록 그녀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 자주 안부를 묻고 만날 약속을 정했다. 그녀가 좋아하던 카페에서 어두운 테이블 위에 환한 촛불 하나로 분위기를 잡고 왜 커피와 구스타프 클림트를 좋아하는지 물었다. 홀로 배낭여행을 할 때 무엇을 느끼는지 알고 싶다고 했다.


이런 내 질문에 그녀는 이탈리아의 달콤한 에스프레소를 건넸고, 중국의 황산을 오르며 구스타프 클림트의 연인을 보여줬다. 나는 그렇게 그녀에게 빠져들었다. 이제부터 답답한 건 나였다. 피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곁을 내주지도 않았다. 그 덕에 마음의 열병이 생겼던지 독감에 걸리고 말았다. 죽을 듯이 아픈 몸으로 며칠을 버티다 결국 방바닥에 널브러졌다. 그렇게 끙끙대며 천장만 보고 있는데 독감으로 아픈 것보다 답답함으로 먼저 죽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이리저리 생각을 굴리다가 정말 몇 번을 망설이며 두어 번 본 적이 있던 그녀의 친구에게 연락을 했다.


“너무 어려운 자리에 나오게 해서 죄송합니다. 실례를 무릅쓰고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연락드렸어요.”


“아프다는 말은 들었는데 얼굴이 많이 상하셨네요. 음, 어떤 건지 조금은 알 것 같은데…”


“네, 실례지만 혹시 저에 대해서 꽃잎 씨한테 들은 게 있나요? 이러면 안 되는 줄 알지만, 이젠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만약 너무 어려운 부탁이라면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


그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깊은 고민을 하는 듯싶더니 드디어 입을 열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는 게 꽃비 씨한테 좋을 것 같아요. 너무 좋은 사람이라고 했어요. 너무 좋은 사람인데, 집도 가난한 것 같고 또 장남이라 많은 게 걸린다고 했어요. 꽃잎이는 딸만 둘인 집의 장녀라 큰 사위는 친정에 아들 같은 사람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어려울 것 같다고...”


충격으로 정신이 나갔다. 저런 이유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리고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해 꿋꿋이 살았다 자부했던 내 인생이 이유 모를 부끄러움에 휩싸였다. 그래서 그날은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잠을 자지도 못했다. 가난은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난 아직 젊었고 가난을 끊어내지 못할 정도로 약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땐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된 때였다. 그래서 장인어른과 함께하는 소주 한잔, 같이 가는 목욕탕이 아버지와 함께하는 추억과 같을 터였다. 그러나 그녀는 이런 가능성을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겼다.


그래도 이렇게 포기할 순 없었다. 지방 발령으로 짐을 챙기며 어떻게 할지 고민했다. 다른 방법이 없어 발령지로 떠나던 날, 소식을 문자로 전하고 예쁜 꽃다발과 함께 손 편지를 집 앞에 두고 왔다. 그리고 종종 편지를 썼다. 답장은 오지 않았지만, 오늘 하루가 어땠는지 그리고 내가 있는 곳은 꽃이 피고 봄이 왔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녀에게 아무런 연락 없이 몇 달이 더 지나자 이렇게 끝나버리면 내가 너무 비참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날 위해 감정을 거둬들이고 편지를 끊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을까? 갑자기 문자가 왔다. 휴대폰 액정엔 나의 안부를 묻고 집에 언제 올라오는지 궁금해하는 그녀의 글이 있었다. 그리고 예상하지 못했던 이 일은 이미 지워버린 마음의 애틋함을 되살렸고 그렇게 그녀는 나의 소중한 연인이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항상 예기치 못한 곳에서 발생한다. 즐거운 첫 데이트를 하고 근무지로 내려왔다. 멀리 있어 잘 챙겨주지 못했기에 마음만은 항상 곁에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런데 갑자기 전화를 받지 않았다. 문자에도 답이 없었다. 그렇게 사귄 지 정확히 일주일이 되던 그 주 토요일, 헤어지자는 말을 들었다. 그 이유는 나와 함께할 미래가 행복하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이렇게 이별 아닌 이상한 이별을 하고 어두운 방 안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눈물이 고였다. 그리고 점점 거세지더니 결국 폭풍이 되었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헤어졌던 그녀는 다음 해 꽃 피는 봄이 오자 다시 연락을 했다. 그 해를 넘기고 다시 봄이 되면 또 연락이 왔다. 그렇게 3년 동안 들꽃이 피고 벌과 나비가 날아다니는 계절이 되면 언제나 나를 찾았다.


그녀의 감정이 무엇이었을까? 내가 사랑할 남자였을까 아니면 결혼할 남자였을까? 결혼할 남자가 아니었던 건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고 사랑할 남자도 아니었던 것 같다. 그냥 순진한 동네 호구였던 것 같다. 시간이 흘러 이렇게 해가 지날수록 나이만 먹나 싶었다. 더 지나면 이성을 만날 기회조차 없을 것 같았고 결국 반려자를 찾지 못할 거란 두려움이 앞섰다. 그래서 어디에서 이성을 만나야 하나 싶을 때 인문학 모임이 생각났다. 활동적인 모임보다는 인문학이라는 공통의 관심사를 통해 상대의 생각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고, 자연스레 인연을 만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인문학 모임에 참석했다.


인연은 우연의 탈을 쓰고 나타난다.


의도하지 않은 누군가의 계획에 의해 그 모습을 감추고 우연처럼 나타나기에 필연인 것을 알아보기가 힘들다. 처음 만난 그녀도 그랬다. 우연을 가장한 어떤 계획처럼 반복적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그것이 필연인지 우연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누군가의 계획된 필연이라면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젠 내 노력으로 그 기회를 잡고 싶었다. 그러나 자연스럽던 만남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자 보이지 않는 힘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간이 어긋나고 예정에 없던 출장이 생기더니 결국 만남에 방해가 되기 시작했다. 이때 알아차렸어야 했다. 내 반려자가 될 필연이 아니라 그저 스쳐 지나가는 또 다른 우연이라는 것을 말이다. 무슨 이유로 필연이 되지 못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습기를 가득 머금은 한여름의 오후, 많이 지쳐버린 시린 가슴을 안고 레프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레빈이 생각나는 날이다.


레빈은 친구의 여동생 키티를 사랑하게 되자 그녀가 자기 아내가 될 것인지 아닌지를 확인하지 않고서는 한시도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그녀에게 청혼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향한다. 모스크바에서 키티를 만난 레빈은 그녀에게 전할 자신의 사랑에 대한 설렘과 두려움, 떨림을 느끼며 구혼할 기회를 엿본다. 청혼할 기회를 포착한 레빈은 커다란 용기를 내어 아내가 되어 달라는 고백을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키티의 거절에 창피함과 거절의 모욕으로 얼룩진 모스크바를 떠난다.


모스크바를 떠나 자기 마을에 도착한 뒤 미리 마중 나와 있던 애꾸눈의 마부 이그나트와 양탄자가 깔린 자기 썰매를 마주한다. 그리고 썰매의 채비를 하며 이그나트가 전하는 마을 소식을 듣자 조금씩 마음속의 혼란이 가라앉고, 그때의 부끄러움과 자기에 대한 불만도 자취를 감춰가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지금은 오직 이전의 자기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 두 가지 결심을 한다.


“첫째, 오늘 이후로 결혼생활에서가 아니면 얻을 수 없을지도 모르는 두드러진 행복을 바라지 않겠다. 따라서 현재를 허술히 여기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다고 결심한다."


"둘째, 앞으로는 결코 이번에 구혼하려고 했을 때 그 기억 때문에 그처럼 괴로움을 받았던 것과 같은 어리석은 열정에 몸을 내맡기는 짓은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지난 5개월 동안 우연을 필연으로 착각하여 행했던 많은 노력이 허사가 되어 버린 오늘, 나의 가슴 안에는 레빈이 했던 두 가지 결심이 휘몰아치며 요동을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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