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 우울과 함께 살아가기>
엄청난 심장 박동과 죽을 것 같은 호흡 곤란으로 응급실에 실려 가도 멀쩡히 걸어 나온다면, 몸이 아파 온갖 검사를 받아도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한다면, 그때부터는 자신이 아프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도 몸이 아닌 마음이 아프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을 받아들여야만 모든 것이 시작된다. 지금 당장 뭔가를 해야 하는 심각한 심리 상태임에도 마음의 고통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다.
지금 존재하는 이 삶은 나를 위한 것이지 가족, 친구 혹은 주변 사람들을 위해 내가 사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타인의 시선과 평판에 얽매여 자신의 감정을 받아들이지 않고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또한 우리는 깊은 곳에 숨겨둔 심리적 위약함이 겉으로 드러날 때가 가장 수치스러운 순간이라는 뿌리 깊은 고정 관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울고 싶어도 울지 않으며 아프면서도 아프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렇게 자신의 심리 상태를 돌보지 않고 마음의 병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몸의 병과 달리 죽음으로 직결되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인 듯하다. 그래서 마음의 병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그러나 이것은 엄청난 착각이다.
죽음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육체의 생명 활동이 끝나는 생물학적인 죽음이 있는 반면 사회적 죽음이란 것도 있다. 사회적 죽음은 ‘신체적으로는 살아있으나 더 이상 사회적인 의미를 갖지 못하는 상태’이다. 마음의 병은 이 사회적 죽음을 이끌어내는 능력이 매우 탁월하다. 불안 장애가 심각하면 사회생활은 고사하고 문밖으로 나서지도 못한다. 우울증이 심하면 인간으로서 존재 가치를 상실하고 때론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이렇게 사회적 죽음은 사람의 심리 상태와 깊은 연관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작은 마음의 씨앗에서부터 시작된다. 본인의 무관심 혹은 주변 사람들의 무시를 자양분으로 삼아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려 마음 안에 깊은 그늘을 드리운다. 이렇게 수풀이 우거져 햇빛 한 줌 들어올 수 없을 정도가 되면 마음의 병은 사회적 죽음을 선고하고 때론 생물학적 죽음의 길로 인도한다.
마음의 병을 방치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 그래서 절대 쉬운 병이 아니다. 무기력, 강박, 공포, 불안, 초조, 과호흡, 지속되는 어지러움 등이 있고 이게 몸이 아파서 그런 게 아니라면 답은 정해져 있다. 마음의 병이다. 그리고 이것을 알아차린 순간 빨리 받아들이고 병원에서 치료받아야 한다.
그래야 살 수 있다.
나에겐 친형제와 다름없는 두 명의 동생이 있다. 나와 살아가는 모습은 많이 다르지만, 뒤를 돌아보면 있는 듯 없는 듯 항상 같은 자리에 있는 마음 따뜻한 동생들이다. 그런데 그중 한 녀석에게 마음의 병이 있다. 일상생활에 지장을 받을 정도의 불안감이 있고 지속된 불면에 시달리면서도 마음이 아프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얼마 전, 술에 잔뜩 취해 혀가 꼬인 목소리로 녀석이 전화를 했다. 알아듣지도 못할 횡설수설에 또다시 정신과 치료를 권하는 나에게 알 수 없는 대답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많이 안타깝고 답답했다. 수년 전, 나도 인정하지 않았다. 내게 정신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기에 신경안정제를 권할 때마다 다들 헛소리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스스로 정신과 진료를 받고 너무나 어색한 원내 처방 약을 들고 나왔을 때조차 먹는 약이 무엇인지, 언제쯤 이 약을 끊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만 관심을 두었다. 이때만 해도 나의 아픔을 이해하는 게 진정한 치료의 시작이라는 것을 몰랐다. 받아들이자. 그래야만 한다. 지금까지 죽어라 살아온 자기 삶을 조금이라도 사랑한다면 인정해야 한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마음의 핏물은 멈추지 않고 결국은 나를 파괴한다.
동생 내외와 저녁을 먹고 차를 마신 적이 있다. 자기 남편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제수씨는 나에게 절대 죽지 말라고 말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자살하면 안 된다는 뜻이었다. 내가 죽으면 자기 남편도 얼마 견디지 못하고 나를 따라갈 것 같다고 했다. 그때는 죽지 않고 살아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을 때였다. 하지만 비로소 지금 사는 삶이 나만의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심각한 수준의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으면서도 인정하지 않는 내 동생과 이름 모를 사람들, 그리고 끝을 알 수 없는 싸움을 하고 있는 나와 같은 이들에게 마음의 평안이 오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