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 우울과 함께 살아가기>
겨우 눈을 뜬다.
알람이 울리면 일어나기 싫은 마음에 오 분만 더를 몇 번이나 외친다. 그러다가 달콤한 이불 속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지각인 시각이 돼서야 이불을 걷어 올린다. 자리에서 일어나 종종거리는 발걸음으로 바쁘게 씻고 출근 준비를 하며 뉴스에 귀를 기울인다.
양치하고 머리를 감으며 엊저녁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침에 새로운 소식은 없는지 귀에 들어오는 대로 듣다가 일기 예보가 나오면 오늘의 날씨는 놓치지 않는다. 때론 틀리기도 하지만 기상 캐스터의 예보에 따라 그날의 옷차림이 달라지거나 우산을 챙겨야 할 때도 있다. 그렇기에 자연스레 관심이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렇게 허공에 퍼지는 일기예보를 들으며 그에 대한 채비를 하고 출근을 한다.
그러다 문득 ‘사람의 마음도 날씨와 같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매일 날씨를 살피듯 오늘의 마음 날씨를 살피는 것만큼 불안 장애가 있는 내게 중요한 일이 또 있을까?’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언제나 편할 날 없이 어딘지 모르게 불편하고 짙은 안개가 끼듯 불안의 감정이 마음속에 내려앉아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의 심리 상태를 살피는 일은 어제보다 편안한 마음을 갖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날의 감정 상태와 감사할 일을 찾아 일기를 적기 시작했다. 물론 잘되지 않았다. 몇 주 적다 보니 일기를 적을 정도로 감사할 일이 자주 일어나지도 않았고, 이게 다 무슨 소용인지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이래서 내가 나아질 수 있는가? 내일은 고사하고 지금 당장이라도 편해질 수 있는가?’
다 부질없어 보였다. 그래서 몇 장 끄적거린 노트를 구석에 처박아 놓고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우연히 손에 잡힌 감정 일기를 뒤적거리다 예전에 끄적거려 두었던 몇 줄의 글이 새롭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때 내 마음이 이랬구나. 지나고 나니 ‘그때 나를 괴롭힌 일 중에 실제로 현실이 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왜 그리 힘들어하고 불안해했을까?’
불쌍했다. 하루를 살아내는 게 얼마나 고통일까 싶었다. 누구도 이해 못할 극단의 고독과 심리적인 고통을 끌어안고 사는 나를 떠올리며 진정한 위로를 건네고 싶었다. 그리고 그 위로는 쓰다만 감정 일기에 있었다.
오래전 진료실에서 치료자가(정신과 의사) 이런 말을 했다.
감사 일기를 쓰는 것은 불안 장애에 많은 도움이 된다고 했다. 그러나 이 말을 할 수가 없다고 했다. 대부분의 내담자가 겨우 이런 소리 들으려고 시간, 돈 들여가며 병원에 오는지 강한 반감을 보이며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했다. 하지만 한 번쯤은 해봤으면 좋겠다.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 힘들게 생각할 필요도 없다.
생각과 달리 일상에서 감사할 일을 찾는 것은 매우 쉽다. 예를 들면, 평소에는 오래 걸리던 엘리베이터가 타려는 층에 있는 것도 감사할 일이다. 먹고 싶은 게 있었는데 회사 식당에서 그 음식이 나오는 것도 감사할 일이다. 조금만 생각을 달리하면 감사할 일이 많이 있다. 한 번 해보고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생각되면 그때 그만둬도 될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썼던 감정, 감사 일기를 소개한다.
【2019년 4월 14일, 첫 번째 감사일기】
비가 내렸다. 창문을 여니 4월답지 않은 찬바람과 알싸한 빗방울이 흩뿌리기 시작했다. 첫 번째 마음 날씨이니 소슬한 빗방울보다 어제와 같은 화창함, 따뜻함을 기대했건만 그 염원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감성 터지는 아스라한 하루가 될 듯한 느낌이다. 서둘러 길을 나선 지하철에서 ‘너도 있지만 나도 있다’라는 공감의 대전제를 어떻게 현실로 이루어 낼 수 있을까 고민해 본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낯선 사람들과의 대화는 언제나 나를 감추기 위해 쓰고 있는 가면을 벗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 그리고 스스럼없이 먼저 그 가면을 벗어 던질 때 진정한 내면의 대화가 시작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세 시간의 긴 시간 동안 상대방의 마음이 서로에게 녹아 들어갈 때, 짙었던 먹구름이 걷히고 다시 파란 하늘과 옷깃을 살짝 여미게 하는 선선한 바람, 그리고 그 바람에 산들거리는 연녹색의 신록을 볼 수 있게 해준 오늘의 시간에 감사한다.
【2019년 4월 15일, 두 번째 감사일기】
모든 사람에게는 잊을 수 없는 추억의 음식이 있다. 허름하고 보잘것없는 특별한 음식은 아니지만 먹고 나면 힘이 나고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음식 말이다. 지금은 잘 팔지 않아 먹을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음에도 오늘 저녁, 씁쓸 달콤한 소주 한잔과 함께 따끈한 그 음식을 먹었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하얀 쌀밥과 집 반찬과 같은 젓갈, 갓김치를 밑 삼아 치기 어린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었다. 잊고 있던 나만의 향수를 느끼게 해준 오늘의 저녁 식사에 감사한다.
【2019년 4월 18일, 다섯 번째 감사일기】
두둥!
드디어 성과급이 나온다. 맛난 거 뭐 먹을까?
【2019년 4월 22일, 아홉 번째 감정 일기】
자신에게 감사의 선물을 전하는 것. 항상 마음에만 두고 망설이기만 하다가 언제나 우선순위에서 밀리던 자신에게 지난 시간 수고했다는 마음의 선물을 정성스럽게 포장하여 전하는 것. 얼마의 값어치가 됐건 이 조그마한 일이 사람의 마음을 건강하게 만드는 데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다.
한때...
업무 출장이건, 해외여행이 됐건 내 캐리어에는 좋은 와인과 화장품 그리고 그곳의 특산품 등 형제들을 위한 선물로 가득 찼던 적이 있다. 너무 무거워 캐리어 바퀴가 부서질 정도였지만 그 안엔 나를 위한 것은 없었다. 언제나 이랬다. 자신을 위하기보다 좋아하는 사람을 생각하며 그들에게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내겐 큰 기쁨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도대체 ‘나 자신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라는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소중한 타인을 위해 많은 선물을 들고 가는 것은 아주 행복하고 좋은 일이다. 하지만 아주 가끔은 자신에게 전하는 따뜻한 보듬음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이 깨달음을 얻고 나서야 일 년에 한 번이라도 나를 위한 선물을 고른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선물을 고르고 정성스럽게 포장하여 예쁜 마음으로 건네는 일이 가장 행복하다. 그리고 그 따뜻한 마음을 나누며 사는 인생을 꿈꾼다.
【2019년 4월 25일, 열두 번째 감정 일기】
비가 내린다. 비가 오면 지금까지 알던 세상은 전혀 다른 미지의 세계가 된다. 주변의 향기와 수풀의 녹음이 짙어지며 평소 다니던 길도 전혀 낯선 길이 되는 마법이 일어난다. 또한 머릿결을 스치는 선선한 찬바람에 차분해지는 마음은 비 오는 날이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다.
아무도 없는 곳에 홀로 앉아 낙숫물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빗물 한 방울이 모여 처마를 타고 흐를 때 물이 만들어내는 최고의 오케스트라가 된다. 해야 할 일, 해야 하는 일, 가야 할 곳 등 모든 것을 잊고 오늘 하루만큼은 비와 함께 삶의 여유를 찾았으면 한다.
【2019년 4월 29일, 열 여섯 번째 감사일기】
소소한 행복...
그 행복은 어느 순간에 찾아온다. 커피숍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르느와르의 그림. 별다를 것 없는 오늘의 일상에 나의 영혼을 맑게 씻어주는 환희의 선물이 되었다.
【2019년 5월 16일, 서른 세 번째 감정 일기】
진한 꽃향기가 난다.
그 향기에 이끌려 주변을 살펴봐도 어디에서 나는 향기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시간의 흐름은 어느덧 찌는 듯한 무더위를 선물했다. 해가 떨어진 뒤 밤이 되면 낮에는 사라졌던 그 꽃향기가 다시 찾아온다. 사람의 만남도 오늘 내가 맡았던 꽃향기와 같다고 생각했다.
언제부터,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이 슬며시 가슴속으로 찾아와 마음속에 진한 꽃향기를 남기고 그 향기에 취할 무렵이면 어김없이 사라지고 만다. 하지만 분명 다시 찾아올 걸 알기에 그 진한 꽃향기를 기다리며 그 향기를 마음속에 남기고 나의 향기를 남기기 위해 오늘 하루도 오감이 아닌 마음의 시선으로 세상과 사람을 본다.
【2020년 9월 20일, 마음 돌아보기】
여전히 종일 편하지 않았다. 이유 없는 불안은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오전에 좋지 않은 상태로 있다가 오후에 글쓰기에 집중하니 조금은 편해졌다.
【2020년 9월 21일, 마음 돌아보기】
새로운 일이 생기면 그 일의 경중과 관계없이 불안이 올라온다. 머릿속으로 끊임없는 생각을 하고 이러한 생각은 나를 쉬지 못하게 한다. 생각의 고리를 끊는 연습을 해야 한다. 조금 더 노력해야 한다.
【2020년 10월 04일, 마음 돌아보기】
오후 1시부터 4시까지 심한 불안이 올라왔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었다. 불안감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다가 결국 비상약으로 가지고 있던 미다졸람을 반 알 먹었다.
【2020년 10월 12일, 몸과 마음 관찰】
항불안제 추가 이후 많이 안정화된 듯하다. 산도스 (산도스설트란린)를 처음 복용하고 점심에 가슴 두근거림이 있었으나 2시간 정도 지나자 없어졌다.
【2020년 11월 21일, 마음 관찰】
일할 때 트라우마가 되었던 것, 내가 얼어붙고 생각이 멈추는 것. 사람은 한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발전하고 흐르며 성장하는 것이나, 한 번 생긴 트라우마는 날 붙잡고 놓지 않으며 긴장시키고 억누르며 억압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