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 우울과 함께 살아가기>
내게 고독과 단절은 피할 수 없는 아픔이다.
도망칠 수도 회피할 수도 없는 삶의 숙명이자 가슴속의 멍울이다. 단절된 삶 속에 사람으로밖에 채워지지 않는 고립감은 가슴을 헤집는 칼이 되어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그리고 없어지지 않는 커다란 흉터가 되어 잊혀진 무의식의 기억으로 되살아난다. 그렇기에 이별과 헤어짐만큼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슬픔도 없다.
대학생 때의 일이다.
너무 멀리서 살고 있어 친정에 거의 오지 못하던 큰누이가 여름휴가를 맞아 매형, 조카들과 집에 온 적이 있다. 속마음과 달리 살갑지 못한 막내 동생이라 데면데면하며 며칠 동안 같이 밥 먹고 술 한잔했던 게 전부인데 벌써 돌아갈 날짜가 됐다. 마음 같아서는 조심히 가라며 배웅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변변치 못한 형편에 어김없이 아르바이트로 학비와 용돈을 마련해야 했기에 그날도 공사 현장에 나가야 했다.
그렇게 어스름한 새벽에 일어나 아스라이 밝아오는 아침을 뒤로하고 일터로 향해 걷는데, 누이와 함께했던 시간의 잔상이 어둠 속의 한 가운데로 나를 끌어내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 길이 그렇게 무겁고 힘들 수가 없었다. 무엇이 그리 서운했던지 한 번 끌려 내려가기 시작한 마음은 고단한 육체노동 속에서도 아릿한 마음의 끈을 놓지 못했다. 그리고 그 아릿함은 손주를 놓아 보내는 할머니의 마음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렇게 형제들과 헤어질 때마다 가슴 저리는 서운함은 끝내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명절이 되어 가족들이 모이면 평소와 다를 게 없어 보여도 그 시간이 지나면 매번 문제가 생기곤 했다. 누군가와 함께 있는 시간보다 홀로 지내는 시간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월등히 많았음에도 서울로 돌아와 다시 혼자가 되면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의 물결이 치밀고 올라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갈 때 어떤 것에도 깨지지 않는 적막감과 홀로 있는 고독을 느낄 때면 엄청난 불안과 초조함이 밀려온다. 가슴이 두근 반, 세근 반 뛰기 시작하고 뭘 해도 불안감이 사라지지 않는다.
이럴 때마다 몸을 바삐 움직이면 나을까 싶어 오래 비워 둔 집을 청소하고 이리저리 움직여 보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 일 년에 두 번, 매번 반복되는 일인데도 도통 적응이 되질 않는다. 이렇게 생긴 불안과 초조함은 며칠이 지나야 겨우 견딜 만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비상약으로 들고 다니는 벤조디아제핀을 먹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왜 이런 일이 반복되는 것일까?’
매번 이런 상황이 반복되며 일상이 어그러지는 것을 보고 사람들 속에 있다가 다시 홀로 된다는 것이 내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생각하게 됐다. 이렇게 나를 괴롭히는 또 다른 불안의 근원을 찾고 고민하고 있을 때 치료자의 책장에 꽂혀 있던 “더 브레인”이라는 책을 봤다.
“당신의 뇌가 정상으로 작동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당신이 먹는 식품에서 유래한 영양분 말고도, 당신이 들이쉬는 산소 말고도, 당신이 마시는 물 말고도, 이것들에 못지않게 중요한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타인들이다. 정상적인 뇌 기능은 우리 주위의 사회적 연결망에 의존한다. 우리의 뉴런이 생존하고 번성하려면 타인들의 뉴런이 필요하다. 우리 각자의 절반은 타인들이다.”
과연 이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타인이 그렇게 중요한 존재인가? 공기, 물, 음식 등 주변의 일상적인 것을 의식하며 살지 않기에 타인이란 존재가 얼마나 위대한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의식하지 못하는 것만큼 타인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존재다. 인간은 가족, 친구, 동료 등 주변 사람들과 사회적 상호작용을 하며 살아가도록 만들어져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느낄 때 가장 건강하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묻는다면 “호모 사피엔스 시대부터 독립생활보다 집단적 무리 생활을 하는 게 생존에 유리했던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라는 뻔한 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러니 그냥 유전적으로 그렇게 만들어져 있다고 이해하는 편이 쉬울 것 같다.
인간의 사회적 상호작용에 대한 중요성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예가 바로 공감이다. 우리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주인공이 칼에 찔리거나 수족이 절단되는 잔인한 장면을 보면 얼굴을 찡그리고 시선을 회피한다. 실제 사건이 아니란 것을 알면서도 화면에서 펼쳐지는 잔인함에 눈을 뜨지 못한다. 왜 그럴까? 사람의 뇌는 타인의 고통과 실재하는 나의 고통을 구분하지 못한다. 우리의 뇌는 상대방의 표정과 행동을 주시하며 타인의 감정을 읽어내도록 만들어져 있다.
그렇기에 실재하는 고통이 아니란 것을 알면서도 화면 속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을 내가 겪는 것과 동일한 상황으로 이해하고 착각한다. 이것이 사람이 가진 공감 능력의 핵심이다. 원래 이렇게 만들어진 인간은 관계를 형성하고 집단을 만들며 사람 속에서 살아가도록 설계되어 있다. 만약 이와 반대로 타인과의 연결이 끊어지면 어떤 정서적인 반응을 보일까?
언제나 홀로 있다는 것...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고 이런 삶을 원하지 않았는데도 나는 여전히 혼자다. 혼자라고 해서, 지금의 삶이 너무 고통스럽고 힘들다는 이유 한가지 만으로 결혼이란 선택을 하고 싶진 않았다. 이런 나에 대해 주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 다 거기서 거기다. 네가 너무 따지는 것이 많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저 웃는다. 그리고 이렇게 묻고 싶다.
“그럼 당신은 사랑 없는 결혼을 했습니까? 나이가 너무 많다고 해서 그냥 적당한 사람과 결혼하는 게 옳은 일입니까? 당신이 그런 선택을 했다면 그 이후의 삶이 행복했습니까?”
이 세상에는 정말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는 살 수 없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마음에 없는 누군가와 평생을 함께하기보다 혼자 있는 고립과 고독을 선택했다. 그러나 이 선택에 의한 삶의 무게는 생각보다 너무 컸고 그것은 내가 감당할 수 없고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런 삶을 간신히 견뎌내다 명절이 되어 가족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되면, 이때 일어나는 사소한 변화가 내게 많은 영향을 준다. 직장 동료나 친구들보다 훨씬 친밀감이 높은 가족들과 밥을 먹고 잠을 자며 대화를 나누는 일은 사회적 결핍으로 침잠되어 버린 나의 뇌에 심리적 고통에 대한 보상을 주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명절 연휴가 끝나고 다시 혼자가 되면 가장 친밀하고 중요한 타인과의 연결이 끊어진 상태가 된다. 사회적 상호작용을 통해 타인과 교감하며 건강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연결을 잃었다는 자각이 드는 순간 고통 회로가 활성화된다.
그 고통 회로는 무의식 속에서 절대 지워지지 않는 어릴 적 기억들이다. 일터로 학교로 떠나며 아무도 없는 작은 방안에 혼자 남겨진 고통의 기억들 말이다. 이제는 누군가의 보살핌이 필요하지 않은 성인이 되었음에도 가족들과 떨어져 다시 혼자가 되면 그때 남겨진 강한 상흔이 무의식의 상처를 불러온다. 그래서 다시 다섯 살의 어린아이가 되어 집에 홀로 남겨진 것처럼 불안에 떨며 고통스러워한다.
나는 이것이 너무 아프다.
어찌 고통스럽지 않고 불안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당연한 반응이다. 하지만 매번 반복되는 이런 상황이 내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에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이럴 때마다 사람들을 찾아 나선다. 그리고 그 속으로 스며들어간다. 모르는 사람이어도 상관없다. 다시 혼자가 됐을 때, 가슴속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이 감지되면 집중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카페로 향한다. 카페는 불안으로부터 도망치기에 매우 좋은 장소다. 언제나 사람이 많고 혼자 있어도 아무렇지 않으며 내가 원하는 시간까지 눈치 안 보고 있을 수 있다.
이렇게 사람들 속에 섞여 책을 읽거나 글을 쓰며 한 가지 일에 집중하다 보면 불안했던 마음이 많이 누그러진다. 그러하니 혼자 있을 때 마음이 힘들다면 그저 사람들 속에 있어 보라는 말을 하고 싶다. 굳이 카페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날씨가 화창하다면 길거리 벤치에 앉아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해도 괜찮다.
사람들이 많은 곳을 찾아 그 속에 녹아들어라.
이 단순한 행동 하나가 고통에 휩싸인 당신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