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 우울과 함께 살아가기>
사소한 일에 불안이 밀려온다.
별일 아니란 걸 알면서도 밀고 들어오는 불안을 막을 수가 없다. 애초에 조절할 수 있었다면 지금껏 고통받지도 않았을 것이고 이리 오랜 시간을 병원에 다니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일에 불안이 몰려오면 참 무기력한 나를 느낀다.
이때 겨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약을 잘 챙겨 먹고 그래도 진정이 되지 않으면 비상약을 추가로 먹는 것밖에는 없다. 그러니 이럴 때마다 무력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이런 상황이 반복될 때마다 곰곰이 생각에 잠기곤 했다. 어떤 방법이 있지 않을까? 앞으로 살아야 할 시간이 많은데 아무런 해결책도 없이 이렇게 밑도 끝도 없이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은 회사를 그만두는 것이다. 단 하루도 그냥 넘어가지 않고 나를 괴롭히는 이 막연한 불안은 불확실성이 가득 찬 회사 일과 그것에 연관된 피치 못할 인간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회사를 떠나는 게 평안을 얻는 가장 확실한 방법일 것이다. 이렇게 정확한 해결책을 알고 있으면서도 실제 행동으로 옮길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에게 질문을 던져봤다.
‘회사를 그만두는 것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는가?’
지금처럼 노동력에 대한 대가로 월급을 받아 한 달을 생활하고 하루의 대부분을 회사에서 보내는 것과 달리, 급여를 받지 않더라도 생계에 지장이 없고, 아침부터 해질녘까지 기나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다른 일이 있는지를 묻는 것이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일이 있기는 하다. 여행을 다니며 글을 쓰고 하고 싶은 공부와 운동을 하다 보면 내게 다가올 하루의 지루함은 어영부영 해결될 것 같다. 그렇다면 생계는 어떨까? 먹고 사는 것에 대한 불안함은 없을까?
고정적으로 들어오는 수입이 없기에 지금껏 열심히 모아둔 돈을 곶감 빼먹듯 빼먹다 보면 점점 줄어드는 통장의 잔액이 또 다른 심리적 압박으로 다가올 것은 뻔한 일이다. 물론 잉여 인간처럼 놀고먹을 건 아니기에 돈을 벌 수는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그 수입이 막연한 미래의 불안을 채울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할까? 평생을 괴롭혀 온 이 불안에서 벗어나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으면서 살 수 있는 진정한 자유를 줄 수 있을까?
먹고 사는 현실보다 이상이 충만했던 시절,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하는지 아니면 남들보다 잘하는 일을 업으로 삼아야 하는지 매우 혼란스러웠던 적이 있다. 혼자 고민해봐도 답을 찾을 수가 없었고 어떤 사람도 대답해주지 못했다. 그렇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미궁으로 남긴 채 눈앞에 닥친 현실의 문제들을 해결하느라 정신없이 살았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그 대답을 찾았다는 것을 알았다.
사회생활은 치열한 경쟁이다.
남들보다 앞서지 못하면 도태되는 냉엄한 현실이다. 이런 세상에서 믿을 수 있는 한 가지는 나의 능력뿐이다.
주어진 일에 남들보다 뛰어난 성과를 내고 그 능력이 유지될 때 생계가 위협받지 않는 평범함이 된다.
먹고 살기 위해서 해야만 하는 일 대신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이미 그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과 나의 경쟁력이 수입의 크기가 된다. 다행히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도 수입이 나쁘지 않다면 그것만큼 행복한 일이 없겠으나 세상살이가 그리 만만하지는 않다. 근근이 살아가는 것에 괘념치 않고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그에 대한 만족감을 삶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가난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현실이 또 다른 태생적인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면 그것은 절대 옳은 선택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이것이 현업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이유이다.
고통은 객관성이 결여된 주관적인 감정이다. 객관적인 보편타당성을 획득하지 못하기에 내가 겪는 심신의 고통을 타인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정서적 공감이란 치유의 마법도 기대하기가 어렵다. 이러한 이유로 육신의 고통을 타인에게 설명할 때 수치로 표현하는 것은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 된다.
수치화의 가장 큰 이점은 주관적인 감정을 객관적인 지표로 전환하여 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또한 본인의 감정에 객관성을 부여하여 심리적 고통의 정당성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이런 통증 사정 척도라는 개념을 활용하여 내가 느끼는 불안의 정당성을 확인해 보기로 했다. 가장 최악이었던 때는 2016년 11월이었다. 언제 찾아올지 모를 미치고 죽을 것 같은 공황 발작과 어떤 일에도 집중할 수 없는 심리적 불안함을 가진 그때를 10점으로 했다.
이와 반대로 아주 평온한 심리 상태가 0점이다. 그 다음은 지금의 불안이 야기되는 원인을 찾아야 한다. 찾기 어려울 수도 있다. 나는 아무 일이 없어도 수시로 마음이 편치 않기 때문에 그 이유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하지 않으면 찾기가 힘들다. 이제 불안의 이유를 찾았다면 몇 점인지 점수를 매겨야 한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반드시 객관성이 개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최고조의 불안 상태와 비교하여 현재의 불안을 일으키는 원인이 몇 점 정도 되는지를 반드시 객관적인 점수로 매겨야 한다.
그리고 그 점수와 내가 느끼는 심리적 불안의 정도를 비교했다. 결과는 객관적 불안 1점, 심리적 불안의 강도는 3점 또는 4점이었다. 이때 깨달았다.
‘역시나 실제 상황에 비해 과한 심리적 반응을 보이고 있었구나!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에 걸맞지 않게 많은 불안감을 안고 있었구나!’
이렇게 현재의 심리 상태를 이해할 수 있게 되자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런 심리적 평안함은 얼마 가지 못했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의 불안 상태로 돌아왔다. 그러면 다시 생각했다. 객관적 불안은 1점이고 심리적 불안은 4점이다. 이런 일을 되돌이표와 같이 계속 반복했다. 다른 사람이 보면 참 한심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쩔 수가 없다. 그저 꾸준히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지금, 이 순간의 완벽한 해결책이 될 수 없을지는 몰라도 계속 노력하다 보면 지금보다 편하게 살 수 있는 날이 반드시 올 거라 믿는다.
그리고 나는 이 믿음을 지금도 버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