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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근현대사에서 패권 경쟁이 중요했던 시기는 단연코 냉전 시기이다. 대한민국은 남과 북이 갈라져 미국과 소련의 거대한 패권 경쟁 속에서 그들만의 작은 국지적 체제 경쟁을 해왔다. 게다가 그 체제 분열은 지금도 연장선상에서 진행 중이다. 이미 냉전은 종결되어 역사 속 희미한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사회에서 세계의 패권 경쟁에 화두나 관심을 갖기는 굉장히 낯설고 부득이하게도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세계를 인식하고 바라보는 시야는 지나칠정도로 협소하다. 한반도를 둘러싼 위기를 가만히 살펴보면 한국인들의 머릿속에선 오직 한반도 내외의 지엽적인 부분 밖에는 살피질 못한다.
이는 한국인의 세계관과 역사 시야가 두 개의 역사적 관점, 반일 종족주의와 반공주의에 의존하여 대한민국의 역사와 방향성을 오롯이 북한(또는 공산주의)과 일본에 대해 단순하기 짝이 없는 분노에 국한하여 설명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확히 말하면 역사적 시야와 지정학적 시야는 한반도 내부의 영역에 국한되어 모든 것을 설명한다. 일제강점기와 한반도 독립과 6.25 전쟁의 거대 사건은 순전히 한반도 외부의 요인들에 의해 결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 두 역사적 관점은 반드시 타파되어야 한다고 보는데 역사적 시야를 극도로 파편화되고 비좁은 우물 안 개구리로 만든다.
이러한 인식을 개선하고 국제정치학적 시야를 넓히는 어떠한 담론이 사회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나는 패권의 주기적 변동을 분석하여 지정학을 해석하는 기본적 틀을 제시하고자 한다.
세계사에서 여느 지역들은 그 각기의 지역적, 문화적, 군사적 패권국이 존재해 왔다. 이것을 헤게모니라고 부른다. 헤게모니를 지배하는 국가는 다른 경쟁 국가들을 실질 지배하지 않더라도 자국의 영향력 하에 그들을 움직이게 할 수 있다.
패권은 자국이 가진 위치에서 최대한의 영향력을 발휘해 최대한의 자기 이익을 확보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패권은 단순히 손에 쥐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안정적으로 유지하느냐가 중요하다. 이것을 다른 국가들에게 따를 것을 요구하기 위해선 특정한 패권적 체제를 구성해야만 한다.
역사적으로 이런 패권 체제는 다양한 방식으로 발생해 왔다. 그 구성과 방식 그리고 권력의 분배는 세계가 힘의 공백기를 거친 순간에 가장 힘이 강력한 국가들의 역량과 영향력에 따라 다양하게 성립되었다. 그러나 전근대적 시대의 패권주의는 지역적 한계에 의해 그 국지적인 지역의 패권 체제가 성립하였으며 이러한 전근대적인 패권 체제는 세계적으로 대륙과 대륙을 넘어서 강대국의 영향력과 힘을 투사하는 현대적 의미의 패권 체제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나는 현대의 지정학적 분석이 가치가 생기는 역사적 시점과 지정학의 탄생의 기준을 독일제국의 성립으로 정한다. 그 이유는 독일의 통일 과정이 기존에는 볼 수 없었던 근대적인 성격의 지정학적 요소(세력균형, 민족주의, 탈봉건 등)가 마침내 결합한 근대적 결과물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근대적 지정학의 특징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글을 쓸 생각이다. 그러나 패권 흐름의 역사에서 독일제국의 성립을 시발점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단순히 독일 통일 과정의 근대적 성격 때문 만은 아니다. 그 이유는 통일 독일의 성립으로 첫째. 유럽 중심부가 근대적 민족국가 또는 오스트리아와 같이 헝가리와의 이중 제국을 형성하여 범민족적 국가로 지향하여 근대적 외교관계가 성립되었기 때문이며 둘째로 유럽의 전통적인 분열과 균형의 외교적 흐름이 점차 하나의 진영으로 뭉쳐서 맞붙지 않고서야 상대를 굴복하기 어려워지고 전통적인 유럽 외교의 균형 상태가 허물어지면서 힘의 불균형 상황을 가속화 한 시작점이기 때문이다.
독일 민족의 통일은 근대 유럽을 정립한 거대한 사건이었다.
단 러시아와 오스만은 유럽 주변부에서 독자적인 전근대적 제국을 유지하였다. 다만 전자는 그 거대한 국체에서 나오는 힘으로 유럽 외교판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반면 후자는 분열과 해체의 대상이 되어 제국주의 국가의 전리품으로 전락하였다.
위의 시대를 기준으로 근대 시작부터 현대까지 패권 체제의 역사는 다음으로 분류한다.
1871-1918 영국 주도의 다극체제
1918-1945 국제연맹, 미영프 연합 체제
1945-1991 냉전, 양강 체제
1991-2024(?) 미국의 독주체제
한 패권체제의 성립과 유지, 그리고 해체는 다음과 같은 순환 과정을 이룬다.
첫째로 패권기이다. 이 시기는 다른 국가들이 패권국의 주도적인 세계질서를 인정하며 안정적으로 그 질서 안에 편입되어 있는 상태이다. 이 질서에서 패권국의 파워와 허용 범위 그리고 항구적 이득의 범위는 그 국가의 군사적, 경제적, 힘의 역량에 의해 결정된다. 몇몇 초강대국을 제외하고는 이러한 세계 질서를 한 국가의 힘만으로는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에 어느 정도 상호 이익이 일치하는 국가와 함께 세계 질서는 패권국 간의 이해관계를 협력적 또는 적대적으로 타협하여 구성한다. 안정된 패권기 동안은 패권국의 이익이 철저히 안정적으로 보호되기 때문에 경제적, 문화적, 사상적으로 주변국들을 착취하여 자국 이익을 극대화한다.
둘째로 긴장기이다. 패권기 동안 국제 질서 하에서 최대 수혜를 얻는 국가는 그 질서를 만들고 유지하는 패권국이지만 잠재적 평화의 시기 동안 패권국에 속하지 못한 잠재력 있는 국가는 그들의 질서 아래에서 충실히 자국의 역량과 국력을 증진시킨다. 패권 국가들은 이 잠재적 경쟁 국가들을 통제하고 억제하려는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다. 그러나 미처 억제하지 못할 경우 이 잠재적 경쟁 국가들은 점차 체제 안에서 그들에 놓인 지정학적 환경에 국가적 이익이 한계에 직면하는 것에 불만을 품게 되며 새로운 질서를 꿈꾸게 된다. 이들은 기존의 질서에서 최대한 본인이 가진 발톱을 숨기고 성장하다가 적당한 때가 되면 그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내서 패권국에 대항하고 질서를 위협하며 새로운 체제와 질서를 세우려 한다.
셋째로 갈등기이다. 경쟁 국가가 충분한 역량을 키우고 기존 질서에 대한 불만이 표면으로 드러나면 지정학적 갈등과 위기가 발생한다. 이 국가는 더 이상 패권국가가 만들어낸 세계 질서를 따르지 않고 패권국가들은 경쟁 국가에 대한 억제와 견제를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종국엔 외교적 단절과 전쟁이 발생하고 세계 패권의 주인을 두고 질서의 주인과 새로운 도전자의 패권 다툼이 시작된다. 이 갈등에서 승리한 국가는 힘의 공백 속에서 그들에게 유리한 새로운 세계 질서를 다시 정립하고 이를 유지한다.
갈등기의 진행에 대해 첨언하자면 정확히 말하면 패권의 이동은 경쟁이나 전쟁 등에서의 승리자에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힘의 공백이 발생한 상태에서 그 공백을 빠르게 메울 수 있는 강력한 국가가 새로운 패권 체제를 세울 수 있다. 이 과정은 연속적으로 순환하며 하나의 주기를 이룬다. 그 결과 패권 이동의 주기는 하나의 사이클로 완성되며 그 형태는 전혀 영속적이지 않다. 이것은 국가가 패권을 좇는 이유와 자격은 무엇인지, 전쟁은 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인지 설명할 수 있는 이론적 도구가 될 수 있다.
국제 체제는 크게 위의 3 단계를 사이클을 거쳐 이루어진다. 물론 어느 정도의 예외적 상황이 존재하며 이 과정이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요지는 대략적인 도식과 경향을 발견하는 기준은 이 사이클에서 파악할 수 있다. 세계 질서가 형성되고 유지되다가 새로운 도전자가 그 질서 토양 아래에서 성장하여 다시금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려는 시도는 역사적 사례에서 발견된다.
1. 세계 패권 질서의 시작 1871-1918
영국의 전통적인 외교술은 흔히 말하듯이 유럽 대륙의 압도적인 강대국이 나타나면 그 반대편에 서서 다른 국가와의 연합을 통해 힘의 균형을 맞추는 식으로 대응해 왔다. 이 전략은 유럽이 압도적인 강대국에 의해 통합되면 그 강대국이 반드시 브리튼 제도를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것이라는 영국 지도자들의 판단 아래에서 효과적인 예방 전쟁을 벌였던 것이다.
영국은 세계의 바닷길을 지배하는 강력한 해양 국가였으며 이 해양 무역 네트워크를 확실히 다져놓은 상태에서 산업 기술의 진보를 통해 산업 혁명을 일으켰다. 산업혁명의 매뉴팩처 생산 방식은 영국 사회와 경제 곳곳에 뿌리부터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를 이식하였고 다른 유럽 열강들과는 구별되는 산업 경쟁력을 구축했다.
세계 시장에서 산업 경쟁력의 우위는 아직 산업 발전이 미진한 개발도상국들의 시장을 장악할 수 있는 중요한 경제적 권력을 의미한다. 요컨대 시장에서 상품의 경쟁력이 우위에 있는 국가는 다른 국가의 시장을 개방하고 그들에게 자국의 상품 구매를 자의적으로든 타의적으로든 강요하며 그들의 상품을 판매하고 그 시장을 자국에 종속시키는 것이 그 국가의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제적 기본 법칙은 역사적으로 강대국들이 약소국들에 자유무역을 강제하고 그들의 상품을 시장 논리에 따라 구매하도록 만드는 궁극적인 이유이다.
영국은 이러한 이해관계에 따라 인도의 면화와 영국의 면직물을 서로 교환하고 인도의 면직물 시장을 장악했다. 이를 중심국과 주변국의 관계로 표현하면 중심국은 주변국의 산업 발전의 기회를 상품 판매를 통해 박탈함으로써 영구적인 원료 생산국으로 보존하게 한다. 이러한 식민지와의 자유무역에 수혜를 받는 국가 이익은 영국뿐만 아니라 프랑스나 미국과 같은 산업 선진국들에 통용되는 것이었으며 이 역할의 종주국은 훗날 미국이 계승한다
출처:https://www.reportshop.co.kr/social/757987
영국의 세계 패권국의 권위와 이익은 독일 통일에 의해 완전하게 보장되었다. 이 시대 주요 열강들의 조건들을 살펴보면 영국의 패권 체제에 반기를 들만한 유력한 국가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러시아:최악의 지정학적 조건, 후진적 기술, 제도, 체제, 빈약한 해군 등의 이유로 러시아가 팽창정책을 펼칠 때마다 영국은 러시아 팽창 목표의 주변국을 끌어들여 저비용으로 효과적인 견제를 했다. 러시아의 팽창목표는 발칸에서부터 중앙아시아, 극동 지역까지 영국의 견제로 인해 모조리 좌절되었다.
프랑스: 프랑스의 해군력과 해외 식민지 역량은 영국과 비벼볼 만했지만 프랑스는 대륙에 위치한 국가라는 점에서 독일과의 육군 경쟁이 강제되었다. 따라서 해군 경쟁은 물론이고 프랑스의 대외 식민지 정책은 영국과의 협력 또는 타협적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독일 제국: 비스마르크의 대외 정책은 프랑스 고립주의를 철저히 고수하였고 영국이 대륙 외교에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도록 조심하였다. 특히 보불전쟁에서 프로이센이 승리하고 독일 제국의 통일을 선언한 후 영국의 화폐 제도, 금본위제를 곧바로 채택한 것은 영국의 질서를 흔쾌히 받아들인다는 선언이었다. 식민지에서 비롯한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해 외교적 방법으로 식민지의 이해관계를 협상했다.
미국: 영국에 있어 미국은 가장 강력한 잠재적 적국이 될 수 있었다. 영국 자치령 캐나다에 직접적으로 맞닿아있어 미국이 무차별적으로 팽창할 경우 영국에 위협이 될 수 있었다. 미국의 발전 속도는 남북전쟁을 기점으로 영국을 추월하여 영국의 압도적 국력에 맞먹었다.
이렇게 영국을 바짝 추격하는 미국은 결과적으로 1차 대전 이전까지 영국과 전반적으로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고 평화적으로 패권을 이양받았다.
그 이유는 첫째로 영국과 미국은 영미권으로 분류할 수 있는 민족적, 제도적, 문화적 유사성이 있었다.
둘째로 영국은 미국 남북전쟁에서 중립을 유지해 주었다.
셋째로 중남미에서 영국은 미국의 이권을 보장하고 대립하기보단 협력 관계를 이어나갔다.
넷째로 미국은 1차 대전 이전에 군사력(특히 해군)을 증강시킬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와 같은 이유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미국은 식민지를 직접 경영하기보다는 중남미 국가들을 뇌물과 쿠데타 등의 방식으로 미국 종속 하에 두는 바나나 공화국을 만들어 필요 자원을 충족한 것이 영국과 이해관계가 충돌하지 않은 이유가 아닌가 싶다.
오스트리아 헝가리제국 :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은 지리적으로 해외 식민지를 확보하는 것이 불가능한 조건이었다. 따라서 내부적으로 이미 민족 문제가 중과부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발칸 반도로 팽창할 수밖에 없었다.
독일 통일의 주역인 비스마르크는 영국이 유럽에서 발생할 외교적 위기에 중립을 지켜줄 것을 기대했다. 이것은 프랑스를 외교적 고립 상태로 만들기 위해 중요한 전제조건이었기 때문에 영국의 해양패권에 도전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이러한 외교 방향은 독일이 식민지에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지만 지정학적으로 유럽 한가운데에 위치하여 여러 방향에서 공격받을 수 있는 불리한 위치에 있는 독일 제국이 힘의 균형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영국에 해양 패권에 도전할 수 있는 유력 유럽 열강(프랑스 러시아 독일)들이 영국에 도전할 수 없다는 것이 확실시된 이 시점을 최초의 세계 패권 질서의 시작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비스마르크의 식민지 정책은 그가 마치 대륙 외교를 위해 식민지를 완전히 도외시하고 식민지를 별 가치 없다고 느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식민지에 대한 아무런 기반도 없이 아프리카 분할 전에서 오직 외교만으로 3번째로 큰 아프리카 식민제국을 확보하는 외교력을 발휘한 점에서 그의 제국주의적 야심이 전혀 없다고 보긴 힘들다.
비스마르크의 제국주의적 야심은 다음의 일화에서 엿볼 수 있다.
비스마르크의 불명예스러운 퇴임 직후 빌헬름 2세에 의해 선임된 레오 폰 카프리비가 독일 북부 해안가의 조그만 영국력 섬인 헬골란트와 동아프리카의 중요 요충지인 잔지바르 섬을 교환하는 헬골란트-잔지바르 조약을 체결하자 비스마르크는 이를 강하게 비난했다. 황제가 이 조약을 추진한 이유는 영국과의 적극적인 해군 경쟁을 할 작정이었는데 독일 해안가 눈앞에 영국령 섬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 것에 압박을 받았기 때문인데 이를 해소하고자 독일령 동아프리카의 잔지바르 섬을 영국과 교환했다. 비스마르크는 영국과의 해군 경쟁은 멍청한 짓이며 고작 독일 위의 조그만 섬을 얻기 위해 아시아로 나아가는 아프리카의 중요 거점지가 될 수 있는 잔지바르 섬을 포기하는 것은 국가의 손해라고 주장하고 카프리비를 강력하게 비난했다.
(헬골란트와 잔지바르 섬의 위치 잔지바르는 수에즈 운하의 영향력이 없었던 독일의 입장에서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경유하는 중요 거점지가 될 수 있었다.)
영국이 주도하는 이 질서가 유지되는 동안 영국과 이해관계가 일치한 유럽의 주요 강대국들은 자기들 만의 시장 확보에 열을 올렸다. 이 시기 동안 미개발되고 열강들의 역할과 관심은 아직 세계시장에 편입되지 않은 미개 지역을 유럽 국가들의 생산 소비 시장에 편입하여 상품의 원료 공급과 상품 판매 시장의 활성화에 집중하였다. 마르크스의 언어를 빌려서 표현하자면 '자본의 문명화 과정'을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전 세계의 자본주의화는 역사의 유례가 없는 것으로 제국주의를 탄생시켰다. 열강들은 유럽에 없던 원료들을 개발하여 그들의 산업과 기술력을 발전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의 결정적 수혜자는 식민지 개발을 선점적으로 시도한 영국과 프랑스에 집중되었다. 러시아는 식민지를 개발할 기술력과 경제력이 부족한 전근대적 국가였으며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은 지정학적 불리함과 다민족 국가의 유지에 국력을 낭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경쟁에서 제외되었다. 다만 영국은 러시아의 팽창 정책을 새로운 비대칭 강대국의 등장으로 우려해 극도로 위협적으로 바라보았고 선제적이고 지속적으로 견제와 억제 정책을 유지하였다.
이 체제의 관성을 깨버린 것은 독일 제국이었다., 베를린 회담에서 비스마르크가 외교적으로 아프리카를 분할하고 일부 지역에서 독일의 식민지 영유권을 가져왔지만 이것만으로는 프랑스와 영국처럼 독일 산업을 유지할 수 있는 자급자족적인 원료 공급 시장을 확보하기에 부족했다는 것이다. 제국주의 선발 국가였던 프랑스와 영국은 이미 진즉에 유럽 외 문명국을 정복하여 인구가 밀집되어 있는 미개발 지역을 보호국화시키고 그 지역의 노동력을 플랜테이션 농장에 투입할 수 있었던 데 반해 독일이 점유한 식민지는 수많은 지방 분권 부족들이 인구의 대다수였기 때문에 노동력을 효과적으로 밀집시키기 어려운 지역이었다. 더구나 플랜테이션 농장의 강제 노동을 강요한다고 해서 부족민들이 고분고분 명령에 복종한 것도 아니고 갑작스러운 강제노동과 폭력 등의 부당한 처우에 필사적으로 저항하였기 때문에 플랜테이션화 과정에서 많은 불협화음이 발생하였다.
따라서 독일은 그들의 식민지를 개발하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저조한 개발도와 자급자족률로 여전히 프랑스와 영국에서 그들이 필요한 원료를 구입해야만 했다.
독일 제국 원료 자급자족률(출처:https://www.ucl.ac.uk/economics/sites/economics/files/7._cokic_german_colonies_profitable.pdf)
이러한 시도의 결과 독일이 기존 식민지 분할에 불만을 갖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따라서 독일은 적극적인 식민지 정책을 추진하는 지도자에 적극적 지지를 보내게 되었다. 그 인물이 바로 독일의 적극적 식민지 정책인 세계정책의 주도자 빌헬름 2세였다. 비스마르크는 경쟁적인 식민지 정책이 독일의 프랑스 고립 정책에 영국이 개입하게 할 수 있다는 우려를 표현하였으나 자신감 충만한 황제는 그를 총리에서 해임시켰다. 그리고 뒤이어 영국에 뒤지지 않을 해양 전력을 건설하여 군비 경쟁을 추진하였고 중동에서의 3b 철도 정책, 모로코에서 프랑스와의 갈등에서 빚어진 모로코 위기를 발생시키며 영국이 주도했던 기존 패권 질서에 과감하게 도전하였다.
세계 패권에 분명한 불만 표시와 도전 의사를 표시한 이상 이러한 긴장 관계는 오래가지 않았다. 발칸반도에서 한 발의 총성이 울릴 뒤,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과 러시아 제국의 두 황제 간의 신경전은 두 제국의 전근대적인 팽창 정책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것은 민족적 갈등을 포함하여 더구나 오스트리아 황족이 암살당했다는 점에서 누구 하나가 양보할 수 없이 이성적 대화가 불가능한 치킨 게임으로 나아갔다. 그 결과 타협할 수 없는 두 제국 간의 충돌이 기폭제가 되어 패권 질서의 운명을 가르는 1차 세계 대전이 발생했다.
유럽 열강들은 동맹국과 협상국으로 나뉘어 국가의 운명을 건 총력전을 벌린 결과 독일과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을 비롯한 동맹국이 미국의 참전과 함께 패배하였다. 패전국들은 무장해제 당했으며 보유한 모든 식민지를 잃었으며 기존 질서에서 누려왔던 위치보다 더욱 열악한 조건에서 국가를 유지해야만 했다.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과 오스만 제국은 공식적으로 민족자결주의에 의해 공중 분해되었고 독일은 완전한 무장 해제와 막대한 배상금, 그리고 영토의 20%가 소실되었다.
그리고 곧이어 동맹국이 패배하여 남겨진 세계의 힘의 공백은 전쟁의 승리자인 미국 프랑스 영국 주도에 의해 신질서로 정립되었다.
2.1918-1945 국제연맹, 미영프 연합 질서
1차 대전의 결과 영국과 프랑스는 힘의 한계를 여실히 체감하였다. 비록 식민지와 주변국들은 손쉽게 통제할 수 있었지만 전쟁에서 패배한 독일이 향후 복수를 준비하고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한 소련의 세계 혁명의 위협 등의 변수들을 통제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는 그들만으로는 세계를 제어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동안 세계 외교 질서에서 영향력이 없었던 미국과 연합하여 새로운 세계 질서를 구상하였다.
미국의 강력한 요구로 기존의 전통적인 유럽 외교 질서와는 달리 국제연맹을 필두로 한 새로운 세계 패권이 형성되었다. 이 질서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에 막대한 전쟁 부채가 있었기 때문에 힘의 공백을 채운 가장 강력한 기준은 미국이었다. 이 시점부터 미국은 자국의 경쟁력 있는 상품들을 세계 각지에 적극적으로 수출하기 시작하였고 이전 영국이 주도하던 경제적 이권을 누리기 시작하였다. 대신 영국과 프랑스는 오스만제국을 분할하여 중동에서의 영향력을 보장받아 새로운 전략 자원인 석유 채굴권을 획득하였으며 독일의 식민지를 분할하고 기존의 식민지를 유지하면서 그들의 이익 역시 존중받았다.
국제 연맹에는 패전국이었던 독일을 비롯하여 유럽 대다수 국가들이 가입했으며 동양에선 승전국인 일본과 중국 등 극동 국가들도 가입하였다. 이로써 국제 연맹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세계 질서는 비로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물론 국제연맹은 한계가 분명한 국제 협의체였다. 일단 모순적이게도 발안국이었던 미국이 연맹 가입을 안 했으며 탈퇴는 자유로웠고 의결은 만장일치제라서 사실상 협의체의 기능은 전무하였다. 또한 소련은 가입을 거부하여 소련에 대한 미영프의 불편한 체제 갈등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나 국제연맹의 의미는 역사상 최초로 세계 국가들이 국제적 협의체를 만들어 형식적으로라도 세계 질서가 합의되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모든 국제 체제는 모두의 이익을 보장하지 않으며 몇몇 강대국들의 이익에 부합하고 그 이익에 주변 국가들이 강대국의 이익에 기생하여 그 이익분을 나눠먹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관계는 주변 국가들이 극도로 불합리한 입장에 처해짐에도 불구하고 그 조그만 이익의 관계가 한 번 정립되면 그 질서는 관성으로 유지되며 사회 구성원들은 강하게 그 이익관계에 종속된다. 따라서 강한 충격이 발생하지 않으면 그 국제 질서는 쉽게 깨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1차 세게 대전의 참여자였던 독일의 사레처럼 체제를 깨뜨리려 하는 불만 국가들의 동기는 국제 연맹이 어그러뜨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대표적인 국가들이 독일, 소련, 일본이다. 이 세 국가는 1차 대전 종결 후 서로 상반된 조건 속에 있었으나 결국 서로 다른 이유로 국제 질서에 대한 불만을 표출한 국가의 예시들이다.
먼저 독일은 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으로서 유럽 열강으로서 누려왔던 모든 권리와 지위를 소실했다. 이 상실감은 독일 전간기 내내를 아우르는 민족의 거대한 패배감과 굴욕감으로 사회를 옭아매었다. 전간기 동안의 독일의 패권적 위치는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 강요된 것이었고 기회가 충분하다면 얼마든지 국제질서를 배반할 동기는 이미 사회 전체적으로 내면으로 갖춰져 있다고 할 수 있다.
독일의 재무장은 온전히 패권국들의 방조하에서 이루어졌다. 이것은 패권기에 패권국이 경쟁국들을 충분히 억제하지 못한 모범적 예시이다.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이 성장할 수 있는 계기와 시간과 역량이 충분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성장을 막지 않았다.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병합을 막을 수 있었으며, 또 체코슬로바키아와 독일 간의 불평등 협정인 뮌헨 조약을 막을 수 있었다.
스페인 내전에서 독일과 이탈리아와 같은 파시즘 세력이 전쟁병기의 검증과 실전 훈련을 하지 않도록 막을 수 있었으며 소련과의 공조로 대 독일 장벽을 세워 외교적 압력을 행사할 수도 있었다. 심지어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전쟁이 본격화되었을 때마저도 적극적으로 폴란드를 지원하여 무방비한 독일 서부전선을 공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영국과 프랑스가 이토록 대 독일 외교 전략이 소극적이었던 이유는 독일과의 재전쟁을 몹시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두 나라는 1차 대전의 상흔과 상처가 흉터로 남아있던 것이다.
(현대 외교사 상 역대 최악의 외교 협정, 뮌헨 협정. 전쟁을 두려워한 영국과 프랑스는 대 독일 방어막의 일부를 거세한 동시에 독일의 국력을 키우도록 지원한 꼴이 되었다.)
그래서 독일과의 전쟁을 두려워했던 나머지 독일의 국력을 키우도록 그냥 방치해 두었던 것이다. 패권국으로서의 역할과 의무가 내팽개쳐질 때 패권국의 권위와 취급은 동시에 바닥으로 떨어진다. 이것은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언급했듯이 전쟁은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저 미룰 수 있을 뿐 그러나 더욱 불리한 조건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실제로 대한민국이 대북 정책에서의 대대적 실패를 확인할 수 있는 요소이다.
다음으로 소련은 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과 패전국의 모순적인 위치에 놓였다. 1차 세계대전의 직접적 원인이 된 사라예보 사건에서 7월 위기로 이어지는 동안 전쟁의 참화 속으로 뛰어들어든 직접적인 참여자가 러시아였다. 러시아 황제인 니콜라이 2세는 이 위기를 러시아 전체가 단결할 수 있는 특정한 계기로 생각했으나 전쟁은 장기전으로 이어졌고 제국의 백성들은 전쟁을 더 이상 지속해 나갈 여력을 잃어버려 곧 제정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러시아가 무너지고 공화정이 들어섰으나 이 또한 공산혁명으로 소비에트 러시아 연방으로 전환되었다.
이 지점에서 러시아의 불운한 모순이 발생하는데 더 이상 전쟁을 이어나갈 수 없었던 소련이 독일과의 단독 협상으로 패전국이 된 것이다. 그 협상의 조건은 러시아의 유럽 민족 국가들을 대부분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서 소련은 우크라이나, 폴란드, 벨라루스, 리투아니아, 핀란드, 발트 3국, 캅카스 지역을 강제적으로 뱉어내야 했다. 러시아 유럽 지역의 절반이 날아간 이 조약은 독일이 겪은 그것보다 더욱 가혹했다. 따라서 전쟁 자체는 영프미의 협상국이 승리했으나 러시아는 승전국의 지위를 상실했다.
이후 독일이 패망한 후 조약을 폐기 처분하지만 이미 독립한 국가 대부분의 영토를 즉시 수복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승전국들이 소련에 적대적 태도를 견지했기 때문에 소련의 국제적 위치는 굉장히 위태로웠다. 더구나 혁명의 반작용으로 발생한 적벽 내전에서 자본주의 국가들은 소련을 타도하기 위해 백군을 지원하고 군대까지 파병하였다. 소련은 이러한 실존적 위협에서 살아남았음에도 불구하고 국제 체제의 냉정한 고립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국제 연맹의 가입은 거부되었으며 나치 독일의 성장 속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소련과의 포위 전략을 거부하였다. 소련은 국제적 고립 속에서 다가오는 2차 세계 대전까지의 기간 동안 국제 질서에 가장 많은 불만을 가진 나라 중 하나였다. 그래서 소련은 자립적인 경제계획을 진행하며 소련만의 산업화에 국력을 치중하고 독소 불가침 조약을 맺고 대 독일 포위 전선에서 이탈하였다.
일본은 1차 대전 시기 독일의 중국 상하이 식민지를 공격하여 점유하고 영국과 프랑스에 무기를 판매하여 협상국의 편에 붙었다. 승전국의 입장에서 일본은 전쟁 특수의 경제 호황을 누렸으며 극동에서의 열강의 지위가 보장되었다. 서구 열강들은 1차 대전의 원인 중 하나가 강대국들의 과도한 군사비 경쟁이라는 점을 깨닫고 새로 다가오는 세계 질서에서 군사 경쟁을 줄이고자 각 열강들의 해군 전력과 함대 수의 제한을 두었다. 이것이 바로 워싱턴 군축 조약이다. 미국 프랑스 영국 일본 이탈리아는 각 열강들의 해군 전력 제한을 약속하는 조약에 서명하였고 이것은 국가들마다 각기 다른 반응을 불러왔다.
일본은 이 조약에 대단히 큰 불만을 가졌다. 일단 일본 군부의 대외정책이 강경한 팽창주의였던 점을 이유로 들 수 있다. 일본 군부는 대륙 진출에 대한 강한 욕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만주사변과 같은 사건은 일본 정부나 일본 군부 중앙에서 공격을 지시한 게 아니라 만주 지역에 주둔하던 일본 관동군의 독자적 소행이었다. 일본 정부는 경악하면서도 마땅한 출구전략을 찾지 못하고 침략을 사후 승인하였다. 이처럼 일본 군부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독자적이고 돌발적인 집단이었으며 이러한 팽창주의는 일본의 지정학적 위치에서 자원의 자급자족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군부의 조바심을 부추겼다.
(일본 대동아공영권의 팽창주의적 야욕은 자원의 자급자족적 확보와 동아시아에서 영국 프랑스와 같은 열강의 인정 욕구 때문이다.)
일본의 식민지는 한반도, 대만, 만주지역에 국한되어 있었고 동남아시아 지역은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미국이 이미 선점하여 현대 산업에 필요한 고무나 석유와 같은 자원들은 전량 수입해야만 했다. 일본은 만주사변 이후에 국제 사회의 비난을 받았고 영국과 미국에서 자원 수출 금지를 협박받았다. 실제로 금수조치가 시행된 것은 아니지만 일본의 입장에서 이러한 협박은 실존적 위협으로 다가왔다. 언제든지 전략 자원의 금수 조치가 시행되면 일본 전체 산업이 마비되는 최악의 상황을 염두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미국과 영국 아래 3등의 위치의 국격으로 평가받아 해군이 제한되고 일본의 팽창정책이 견제받는 것은 일본 군부가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따라서 식민지를 선점한 유럽 국가들에 대한 반감과 팽창주의를 동시에 품은 일본 군부는 국제질서에 대항하는 나치 독일과 손을 잡았다. 이러한 점에서 전간기 일본제국은 자원 자급자족을 요구했던 1차 대전 이전의 독일 제국의 욕망과 겹쳐 보인다.
전간기 동안 세계질서의 주요 불만 세력, 독일은 제압되었고 소련은 고립되었고 일본은 억제되었다. 이 국가들은 각기 다른 조건과 위치에서 국제 질서에 대항하였다. 세계 2차 대전은 이러한 지정학적 불만이 표출된 사건이었다.
세계 2차 대전은 각기 다른 유럽에서 독일과 영국프랑스의 전쟁은 동북아시아에서 중일전쟁과 실질적으로 전쟁의 연관 관계는 전무하다. 독일은 일본과 중국의 대결을 관찰하고 일본이 소련 견제의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하며 일본과 동맹을 맺었다. 반면 서구 연합국과 소련은 이전부터 관계가 껄끄러운 사이였으며 연합국과 독일이 전쟁을 벌일 때 소련은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으며 중립을 유지하였다. 소련의 참전은 독일의 급작스러운 소련 침공으로 시작되었으므로 실질적으로 소련은 같은 적을 상대하게 된 상황에서 연합국의 일원이 되었다. 연합국 내에서도 소련은 이질적인 진영 내의 공산 진영이었다.
따라서 세계 2차 대전은 추축국(독일+이탈리아)+대동아공영권(일본) vs 연합국(영프미)+코민테른(소련)+중의 전쟁이었다. 승전국이 된 연합국의 차후 갈등과 힘의 공백을 메우는 새로운 패권 체제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결코 화학적 결합을 이룰 수 없는 시대의 결과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