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마무리하고 깨끗한 발로 침대에 올라가 누우면 곧장 잠이 드는 편이다. 뭔가 차분히 생각할 틈도 없이 쉽게 정신을 잃어버린다. 그래도 드물게 쉽게 잠들지 못하는 날도 있다. 그럴 때면 인생 최고의 꿀잠을 잤던 그 밤을 떠올린다.
크로아티아를 여행할 때였다. 두브르부니크에서 바삭한 바람과 햇살을 실컷 즐기고 스플리트를 거쳐 플리트비체 호수를 보러갈 예정이었다. 스플리트에 도착한 날 저녁부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다음 날 아침, 여전한 빗소리에 눈을 떴다. 이대로라면 플리트비체 호수를 보러가는 건 무리였다. 하는 수 없이 스플리트에서 하루 더 묵고 자그레브로 바로 올라가는 것으로 일정을 바꿨다. 플리트비체행 버스표를 물리고, 자그레브행 기차표를 끊으러 갔다. 매표창구 직원이 긴 설명을 시작했다. 스플리트와 자그레브 사이에 선로 공사 중인 구간이 있어서, 우선 버스로 2시간을 가서 기차로 갈아타야한다고 했다.
늦여름 장마가 시작된 스플리트에는 비가 그칠 줄 몰랐다. 몇 발자국만 걸어도 신발이 젖어 기분까지 눅눅해졌다. 맥주 한 잔과 이른 저녁을 챙겨먹고 기차역 앞에서 버스를 타고 출발했다. 단체 관광객으로 만석이 된 이층 버스가 달리기 시작하자 나는 까무룩 선잠에 빠졌다. 하지만 앞자리 뒷자리 옆자리 승객들의 조심성 없는 대화소리와 차가운 에어콘 바람에 환승지에 도착할 때까지 자다깨다를 반복했다. 몹시 춥고 졸리고 지쳤지만 다시 야간기차로 짐을 옮겨야 했다.
급하게 바꾼 표는 2등석 객실이었다. 낡은 기차였지만, 칸칸이 룸으로 나눠진 공간에는 2개의 2인석이 마주보고 있었다. 좌석 옆에는 가방을 세워둘 공간도 있었다. 자리를 잡고 여닫이 문을 닫고 보니 꽤나 아늑한 공간이었다. 기차가 출발할 때까지 맞은 편 좌석에는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의자를 움직여 보니 평평하게 눕혀졌고, 2개의 2인석이 이어져 쿠션 깔린 평상 모양이 되었다. 눅눅한 신발을 벗고 올라가 다리를 뻗고 누웠다.
기차가 출발하고 얼마 되지 않아 실내조명의 조도가 낮아졌다. 바닥에서 따뜻한 공기가 솔솔 올라왔다. 두런두런 얘기를 이어가는 친구와 달리 나는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다음 정차역에서 올라탄 낯선 사람이 불쑥 여닫이문을 연다고 해도 막을 방법이 없었다. 둘 다 한잠이 들었을 때 누군가 가방을 끌고 가버릴 수도 있는 구조라 살짝 불안하기도 했다. 그때 친구가 어차피 자기는 잠은 못 잘 것 같으니, 나라도 마음 놓고 자라고 했다. 괜찮다고는 말했지만, 이미 반은 잠든 상태였다. 규칙적인 덜컹거림과 약간의 소음, 따뜻한 공기, 친구가 살짝 덮어준 겉옷. 이내 깊은 잠에 빠졌다. 중간에 한두 번 기차가 정차할 때 들렸던 낮은 웅성거림과 희미한 경적소리가 꿈속으로 들어왔다. 어느새 나는 유럽 어느 나라 기차 칸에 누워있다는 것까지 까맣게 잊어버렸다.
달콤하고 깊은 잠에서 스스륵 깨어보니 동이 트고 있었다. 곧 자그레브역에 도착할 시간이었다. 뜬 눈으로 밤을 지샌 친구가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어쩌면 그렇게 한 번도 깨지 않고 곤하게 잘 수가 있냐...자는 동안 며칠 동안 몸에 배어있던 습기가 모두 날아가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웠다.
기분이 눅눅한 하루 끝에 곤하게 잠들고 싶을 때, 내 뒤통수 모양과 경추에 꼭 맞는 베개가 없어도, 매트리스 쿠션이 내 몸을 편안하게 감싸주지 않아도 뒤척일 여유가 없는 밤에는 그날 야간열차에서의 꿀잠을 떠올린다.
약한 요동, 멀리서 들리는 경적소리, 습기찬 발을 말려주던 따뜻한 공기...스스륵 눈이 감긴다.
다시 하라면 좀 망설여지는 이등석 야간열차에서의 하룻밤. 이제는 아마도 야간열차가 묶여있는 여행보다는 크루즈를 예약하겠지...그래도 비슷하게라도...살면서 하나씩 요긴하게 까먹을 수 있는 이런 알사탕 같은 추억들, 50대에도 60대에도 까탈스럽지 굴지 말고 차곡차곡 만들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