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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내림의 고독한 여정과 아름다움

목련 가지 끝에 붉은 꽃봉오리 피었네 산골짜기 집엔 사람 없어 스스로

by 월하시정

어둠 속에서 씨앗이 깨어났다.

비밀스런 갈망,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촉수로 어둠을 더듬어 나갔다. 어디선가 물기를 감지하면, 그 촉수는 미세하게 떨리며 그곳을 향해 길을 내는 것이었다.

첫 번째 흙 입자를 만나고, 두 번째 돌멩이에 부딪히는 동안, 그 촉수는 내부에서 울려 퍼지는 맥박을 통해 스스로를 확인했다.

"여기 있구나, 살아 있구나."

목련 가지 끝에
붉은 꽃봉오리 피었네
산골짜기 집엔 사람 없어
스스로 피고 스스로 지네

木末芙蓉花 山中發紅萼
澗戶寂無人 紛紛開且落
(王維, 辛夷塢)


그것이 우리 안에 살아 숨 쉬는 욕망이 아닌가. 땅속 깊은 어둠 속에서도 씨앗은 분명히 자기의 빛을 향해 손을 뻗어간다.

생명의 본질은 어쩌면 어둠 속에서도 빛을 향해 기어가는 이 근원적 욕망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땅속 여정은 순탄치 않았다. 촉수는 갈증과 굶주림에 시달렸다. 때로는 단단한 암반을 만나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할 것 같은 순간이 왔다.

가녀린 촉수는 암석의 차가운 표면을 더듬으며 발버둥쳤다. 그럴 때마다 어둠은 더욱 짙어지고, 침묵은 한층 무게를 더 하는 듯했다.

이 침묵 속 고립은 촉수를 압도하기도 했으나, 동시에 자신의 존재를 가장 뚜렷이 느끼게 하는 순간이었다.

그 깊은 침묵 속에서야 촉수는 스스로의 심장소리를 온전히 듣고, 그 소리에 집중할 수 있었다.

나는 외로워도 좋다
깊이 침잠하여
나의 뿌리를 찾아
흙 속을 더듬어 가는 일
정지용, "또 하나의 태양" 중

그 뿌리는 깊이 내려갈수록 고립되어 갔다. 위로는 더 이상 햇빛의 온기를 기대할 수 없고, 옆으로는 마땅한 동료 하나 찾기 어려웠다.



지상의 삶은 화려하고 복잡하게 펼쳐지는데, 땅속은 오직 침묵이 고요히 스며들 뿐이었다.

그 고립감은 때로는 무게로 다가왔다.
마치 온 우주가 나를 잊어버린 것만 같은 외로움이 밀려왔다.

그러나 그 외로움 속에서 뿌리는 스스로의 존재감을 더욱 분명히 인식하기 시작했다.

쓸쓸함 속에서도 오롯이 자기만의 시간을 보내는 법을 배웠다.

고립은 비옥한 휴식의 시간.

그 깊은 어둠 속에서 뿌리는 오직 자신의 내면과 마주할 수 있었다. 자신이 추구하는 것, 자신이 견뎌내야 할 것, 자신이 지켜야 할 것들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쓸쓸한 고독 속에서도 뿌리는 조용히 자신의 힘을 축적해 갔다. 마치 고요한 겨울 숲이 봄을 위해 힘을 모으듯이.

어느 날, 뿌리가 암반의 틈새를 발견했다. 그 좁은 틈새는 뿌리에게는 거대한 문이었다. 뿌리는 그 좁은 공간을 향해 조심스럽게 자신을 밀어 넣었다.

암석의 날카로운 모서리는
뿌리의 표면을 긁었지만,
뿌리는 그 고통마저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그 좁은 틈새를 통과할 때마다 뿌리는 자신의 한계를 조금씩 넘어서고 있음을 느꼈다. 이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공간이었다.

그 변화는 고통스러웠지만, 동시에 뿌리를 더욱 강인하게 만들었다. 마치 대장장이의 망치가 쇠를 단단하게 만들듯이, 암석과의 마찰은 뿌리를 더욱 견고하게 다져갔다.

그러던 어느 봄날, 땅 위로 신비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뿌리의 정점에서 작은 싹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 작은 싹은 맑은 공기를 마시며 온 힘을 다해 위로 뻗어 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첫 꽃봉오리가 맺혔다.

그것은 오랜 침묵과 고립,
갈등과 시련을 거친 끝에 찾아온 순간이었다.

꽃봉오리가 터지는 순간, 온 세상이 잠시 멈춘 듯했다. 그토록 갈망하던 빛이 드디어 내리쬐고 있었다. 꽃잎은 살며시 벌어지며 자신이 간직해온 아름다움을 세상에 드러냈다.

그 순간, 뿌리는 깊은 곳에서 흘러오는 온기를 느꼈다. 그동안의 모든 고통, 모든 외로움, 모든 인내가 이 찬란한 순간을 위한 준비임을 깨달았다.

땅속 깊은 어둠 속에서 꿈틀대던 모든 욕망과 고통이 이 한 송이 꽃으로 승화되었다.

그것은 단순한 개화가 아니라, 존재 자체에 대한 깊은 카타르시스였다.

씨앗으로부터의 긴 여정이 이 순간에 완성되었다. 그 찬란함 앞에서 모든 희생은 빛으로 환원되었다.

고립과 침묵 속에서 키운 모든 고독의 시간들이 이 한순간에 무한한 아름다움으로 피어오르는 것을 지켜보는 순간, 뿌리는 깊은 감동에 젖었다.

내가 오래 참으며
기다렸던 건 너야,
나의 고독의 꽃이여!

릴케 *사랑하는 자의 노래* 중


지금도 뿌리는 어둠 속에서 새 생명을 기다리며 조용히 힘을 모은다. 그 과정은 고독하지만,
그 고독이야말로 생명이 세상에 내는 가장 깊은 숨소리다.

침묵 속에서 뿌리는 자신만의 언어로 세상과 대화한다. 때론 암석의 냉기마저도 위로가 되고, 침묵의 무게마저도 친구가 되어준다.

우리가 세상에 내뿜는 꽃잎 한 장 한 장에는 우리가 겪은 모든 어둠과 고립, 갈등의 시간들이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다.

그 꽃잎의 색깔과 향기는 우리가 어둠 속에서 어떻게 자신과 화해했는지, 어떻게 고독을 자신의 힘으로 바꾸어냈는지를 말해준다.

어둠 속에서 뿌리를 내리는 고독한 시간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이 찬란한 꽃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어둠 속에 있다 해도 두려워하지 말라. 그 침묵은 무언가를 빼앗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 자신을 온전히 채워주는 시간이다.

뿌리가 깊어질수록, 나무는 더 높이 하늘을 향해 자라날 수 있다. 고독한 뿌리 내림의 시간은 결국 세상을 향해 피어날 너만의 꽃을 위한 가장 아름다운 준비다.

침묵 속에서 스스로를 키워내는 그 은밀하고도 위대한 여정.

그 자체가 이미 가장 고귀한 아름다움이다.

뿌리 침묵 에세이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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