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속 주인공들과 함께 모험을 떠나고, 철학서의 깊은 사유에 빠져 시간
휘날리는 종이 위의 여름!
칠월의 바람은 장난꾸러기다.
창문 틈으로 슬며시 기어들어와 책장을 살며시 헤집는다. 나는 덥다며 투덜거리며 에어컨 리모컨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데, 바람은 내 책 위에서 자유롭게 춤을 춘다. 마치 내가 책 속에 빠져 시간을 잊는 것처럼, 바람도 책장 사이를 누비며 시간을 잊는 모양이다.
이 무더위에 책을 읽는다는 건, 에어컨의 은혜 아래서 벌이는 일종의 사치이자 반항 아닐까.
햇빛이 백색 테러를 자행하는 밖과는 달리,
책 속 세계는 내 마음대로 조절 가능한 온도와 빛을 제공한다. 에어컨은 '위이이잉' 하고 우는 반면, 책장은 '스윽, 스윽' 하고 속삭인다.
이 대조가 참으로 우습다.
책상 위에 놓인 차가운 유자차 잔에 맺힌 물방울이 종이 위로 흘러내려 글자를 번지게 한다. '여름'이라는 단어가 물기 때문에 퍼져 나가 마치 실제로 녹아내리는 듯하다.
이 계절은 땀과 함께 정신까지 녹여버리려는 듯하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 '오늘은 반드시 이 책을 다 읽어야지'라고 다짐했지만, 칠월의 무기력함은 다짐보다 강하다. 오후 세 시, 책을 잡은 팔이 저절로 늘어지고 책장 넘기기는 점점 느려진다.
결국 책은 가슴에 얹혀 있고, 나는 에어컨 바람을 쐬며 낮잠의 유혹과 싸운다. 이 싸움에서 이기는 법은 없다. 칠월의 무게 앞에 나의 의지는 한낱 종이배일 뿐이다.
서재칠월 (書齋七月)
蟬羽鳴空淨 (선우명공정)
매미 날개 맑게 울려 공허하니
書頁自生涼 (서페이지자생량)
책장 저절로 서늘함을 내네
字裏行間走 (자리행간주)
줄글 사이로 달리니
心遊萬里鄕 (심유만리향)
마음 만리 먼 고향에 노닌다
風翻疑故友 (풍번의고우)
바람 책장 넘기니 옛 친구인가
夢醒笑黃粱 (몽성소황량)
꿈 깨니 황량한 꿈 웃음만 나네
월하시정
그러나 책 속으로 빠져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칠월 바람이 책장을 넘길 때마다, 나는 새로운 세계로 발을 내딛는다. 무더운 서울의 오후지만, 책 속에서는 지중해의 시원한 해풍을 맞을 수도 있고, 시베리아 설원의 차가운 공기를 마실 수도 있다. 종이 위에 인쇄된 검은 글자들은 마법의 주문처럼 상상의 문을 활짝 연다.
나는 문학 속 주인공들과 함께 모험을 떠나고, 철학서의 깊은 사유에 빠져 시간의 흐름을 잊는다. 에어컨의 냉기와 책 속에서 느껴지는 상상의 시원함은 다르다. 하나는 피부에 스치는 물리적인 감각이라면, 다른 하나는 정신을 맑게 씻어내는 존재의 기쁨이다. 바람이 책장을 살짝 넘기면, 그건 마치 옛 친구가 내 어깨를 툭 치며 "자, 이제 이 이야기로 가 보자"고 속삭이는 것 같다.
바람의 책갈피
칠월의 바람이,
종이로 된 날개를 펼친다.
한 장 한 장,
말없는 이야기꾼의 숨결로
고요한 방에 파도를 일으키네.
나는 그 파도 위에
생각의 배를 띄우고,
잉크 바다를 항해하네.
바람이 멈추면,
책갈피는 내 마음의
가장 깊은 항구에 닿아 있더라.
월하시정
책을 읽다 보면 시간의 속도가 사라진다.
어릴 적 여름방학은 끝이 없어 보였다. 시간은 꿀처럼 느리게 흘러, 한 권의 책을 천천히 음미할 여유가 넘쳤다. 그런데 어느새 성인이 되어보니, 칠월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다. 달력에 빨간색으로 표시된 마감일들은 책장 사이로 고개를 내밀며 나를 재촉한다.
'시간이 없다'는 말이 입에 붙었다. 그런데 정말 시간이 없는 걸까? 아니면 우리가 만든 '해야 할 일'이라는 허상에 시간을 빼앗긴 걸까? 책 한 권을 다 읽지 못해 안달하는 내 모습이 어릴 적 끝없어 보이던 방학을 온종일 뒹굴며 즐기던 나와 겹쳐진다. 시간은 변하지 않았다.
변한 건 나의 시선과, 그 시선을 가득 채운 '생산성'이라는 이름의 유령뿐이다.
가끔 책에서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본다. 푸르른 나무들이 칠월의 햇살에 반짝인다.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가 책장 넘기는 소리와 닮았다. 자연은 자신만의 고전을 써내려가고 있는 걸까? 나는 책 속의 지혜와 창밖의 생명력 사이를 오간다. 책이 주는 지적 만족감과 자연이 주는 원초적 아름다움은 다르지만, 둘 다 내 영혼에 필요한 양식이다.
창밖의 나무는 아무 말 없이도 깊은 철학을 전한다. 뿌리 깊게 서 있는 것, 계절에 따라 변하되 본질은 잃지 않는 것, 바람에 흔들리되 넘어지지 않는 것… 책 속의 위대한 사상가들이 수백 페이지에 걸쳐 설명한 것들을,
나무는 단지 '있는 것'으로 증명해 보인다.
책장을 덮을 때면 항상 묘한 기분이 든다. 한 세계와 이별하는 것 같은 아쉬움과, 새로운 세계를 맞이할 기대감이 교차한다. 칠월 바람이 책을 덮으려는 내 손을 살며시 밀어낸다. 마치 "아직 더 읽을 수 있어"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책을 읽는 행위는 근본적으로 낭만적이다.
타인의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보이지 않는 다리 위를 걷는 일이니까. 저자와 독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칠월의 이 뜨거운 오후에 만난다. 그 만남을 중개하는 건 고작 종이 몇 장과 인쇄된 점들뿐이지만, 그 안에는 우주만큼이나 넓은 세계가 담겨 있다.
어느덧 해가 서산으로 기울고, 칠월의 뜨거운 기운이 조금씩 누그러든다. 책장을 덮으며 나는 한여름의 무게를 온전히 견뎌낸 종이들에 대해 고마움을 느낀다. 바람이 다시 창으로 들어와 내 책상 위의 종이를 살짝 일으킨다. 다음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다는 신호다.
칠월은 가고, 여름은 흘러가겠지만, 책장 사이를 휘날리는 바람과 그 바람에 실려 오는 이야기들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 한 권의 책을 덮는 것은 결코 끝이 아니다. 그것은 또 다른 책을 열기 위한 준비일 뿐이다. 그리고 칠월 바람이 분다면, 나는 다시 그 종이로 된 항해에 몸을 맡길 것이다. 어쩌면 여름의 진정한 의미는, 이 뜨거운 시간 속에서도 우리를 시원한 상상의 바다로 데려가주는 책장 사이에 숨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바람이 불 때마다,
책장이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