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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밤, 지구본 위를 걷다

멀리 고층 건물의 불빛만이 허공에 떠 있는 별자리처럼 반짝인다'

by 월하시정

무더위가 창유리에 달라붙어 숨 쉬는 법조차 무겁다. 에어컨의 잔잔한 부저음이 밤의 침묵을 깨뜨리지만, 오히려 그 소리가 고요를 더 깊게 만든다.

창밖은 어둠에 잠긴 채, 멀리 고층 건물의 불빛만이 허공에 떠 있는 별자리처럼 반짝인다. 그 무심한 빛 아래, 수많은 생명이 지금 이 순간을 호흡하고 있으리라. 손끝이 닿는 곳,

책상 위 지구본이 서늘하게 굴러간다.


파란 구슬 위에 새겨진 대륙과 바다의 곡선이 손바닥 아래서 살며시 움직인다.

이 작은 공 위에,

나는 서 있는가?

아니면, 걷고 있는가?


獨夜書窓下 (독야서창하)

孤燈照我影 (고등조아영)

夏蟲鳴不已 (하충명불이)

天地一何靜 (천지일하정)


홀로 밤 창가 아래서

외로운 등불이 내 그림자 비추네

여름 벌레 그치지 않고 우니

천지는 어찌 이리도 고요한가

백거이 (白居易),독서(讀書)' 중


지구본의 만져지는 고체성과 그 위에 펼쳐진 상상의 풍경 사이에서 나는 흔들린다.

이 파란 구슬은 단순히 대륙과 바다를 표시한 물체가 아니다.


나를 우주 속에 던져 넣은 증거다. 내 발아래, 지금 이 순간에도 지각판은 서로를 밀치고 당기며 산을 만들고, 바다를 갈라놓는다.


화산은 분화구를 열어 지구의 숨결을 토해내고, 깊은 해구에서는 두 지각판이 충돌하며 생명이 탄생하기도 전의 원시 지구의 비명을 내지른다. 나는 그 모든 격변의 결과 위에, 잠시 머물다 가는 존재일 뿐이다.


창문을 열자, 밤공기가 습기와 함께 밀려든다. 모기 한 마리가 귓가를 스치며 날아가고,

어둠 속에서 반딧불 한 마리가 깜박인다.


그 작은 생명의 빛은 깊은 어둠 속에서도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신호다. 나는 문득 생각한다.

이 반딧불이의 빛과 멀리 고층 건물의 빛,

그리고 손아래 지구본 위에 표시된 도시들의 불빛은 어떤 연결고리로 이어져 있을까?


그 빛들은 모두 에너지의 변주곡이자,

생명 혹은 문명이 내뿜는 숨결의 흔적이다.

나는 그 연결망 속의 한 점이다.


창밖을 나는 모기도, 반딧불이도,

나를 지나가는 저 먼 차의 헤드라이트도,

모두 이 거대한 에너지의 흐름 속에서

맥박치는 존재들이다.


靑蒻笠 (청약립)

綠蓑衣 (녹사의)

斜風細雨 (사풍세우)

不須歸 (불수귀)


푸른 갈대 삿갓,

푸른 도롱이 /

비스듬한 바람 가는 비에

돌아갈 필요 없네

윤 선도 (尹善道),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중 여름편


지구본 위를 손가락으로 더듬으며 걷는다.

내가 서 있는 이 좁은 공간, 이 아파트의 한 방을 지구본 위에 표시한다면 그것은 먼지 한 톨보다도 작을 것이다. 그 먼지 같은 공간 안에서 나는 내 인생의 전부를 압축해 놓았다.


기쁨과 슬픔, 사랑과 상실, 희망과 좌절의 모든 감정들이 이 먼지 한 톨 속에 응축되어 있다.


그런데 이 지구본은 말없이 나를 바라본다.

그 위에는 내 먼지 같은 공간 외에도 수많은 먼지들이 흩어져 있고, 그 먼지 하나하나마다 나와 같은, 아니 그보다 더 복잡하고 깊은

감정의 우주가 존재한다.


베이징의 골목길에서 수프를 끓이는 노파, 아마존 밀림 속 원주민의 의식, 아이슬란드의 외딴 마을에서 북극광을 바라보는 청년… 그들의 숨결이 지금 이 순간, 지구본 위를 스치고 지나간다. 내 작은 감정의 우주는 이 거대한 감정의 성운 속에 녹아든 한 줄기 빛에 불과하다.


이 깨달음은 오만을 무너뜨리지만 동시에 위대한 위로가 된다. 내 고통, 나의 기쁨이 결코 유일무이한 것이 아님을, 수없이 많은 생명이 나와 같은 감정의 파도를 타고 있음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각자의 고립된 섬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같은 바다 위를 떠다니는 배들이다.


바다는 하나다. 그 바다의 이름은 ‘지구’이고,

그 위를 걷는 우리는 모두 같은 하늘 아래서

숨 쉰다.

별이 총총한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창문 틈으로 보이는 하늘의 일부는 무한한 우주를 향한 창이다. 지구본은 그 우주를

떠도는 작은 파란 점에 불과하다.


칼 세이건이 “창백한 푸른 점”이라 부른 그 지점이, 지금 내 손아래에서 살며시 굴러간다.

이 작은 점 위에 모든 인류의 역사, 모든 전쟁과 평화, 모든 사랑과 예술, 모든 탐구와 깨달음이 쌓여 있다. 그것은 경이로움 그 자체다.


밤하늘에 별이 총총하다

나는 별을 보며 걷는다

별은 나를 보며 내려온다

우리는 서로를 비추며 걷는다

천상병, '귀또리' 중에서


무더운 여름밤, 나는 나의 창가라는 작은 우주 정거장에서 지구본이라는 푸른 우주선을 타고 있다. 이 우주선은 고요히 자전하며, 태양이라는 별 주위를 끝없이 선회한다. 그 움직임 속에서 나는 나의 작은 감정들을 내려놓는다.


그 감정들은 지구본 위의 먼지 한 톨 속에 안전히 보관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먼지도, 그 감정도, 결국은 별빛으로 이루어져 있고, 별빛은 영원히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창밖에서 새벽이 슬며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진다. 어둠이 걷히고, 새들의 지저귐이 공기를 채우기 시작한다. 지구본 위의 대륙들은 서서히 햇빛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나는 지구본에서 내린다.

하지만 그 위를 걸었던 기억, 그 연결의 느낌은 내 발아래 땅의 실재감을 더욱 굳건하게 해준다.


나는 이제 내 방의 바닥을, 내가 서 있는 이 도시의 땅을, 그리고 그 아래 펼쳐진 거대한 지구를 단단히 디디고 선다.


여름 새벽의 청량한 공기가

창문을 통해 밀려든다.


나는 창가에 서서,

한밤중 지구본 위를 걷던

그 경이로움을 가슴에 품고,

새로운 날을 맞이한다.


이 땅 위의 모든 생명과 함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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