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ughts on an Unfinished Canvas
화실 안 먼지가 햇빛 속에 떠다니고, 붓 끝이 캔버스 위를 맴돌다 멈춘다.
어디선가 색채 하나가 뚝 떨어져 마른 물감 위에 고인다. 붉은 자국은 마치 상처처럼 보인다.
이곳은 완성된 작품을 전시하는 갤러리가 아니다. 미완성의 숨결이 살아 움직이는 공간이다. 물감 냄새가 가득한 이곳에서 나는 그림이 완성되기 전의 그 고뇌와 기쁨, 그 신비로운 경계에 더 매료된다.
완성은 목적지이지만, 미완성의 순간들이야말로 창조의 진정한 핏줄을 고동치게 한다.
작업대 위에 놓인 고서적 복원 프로젝트의 한 페이지를 들여다본다. 오랜 세월의 흔적이 글자 사이사이에 스민다.
복원은 닳아 없어진 부분을 채워 과거의 완전함을 복구하는 일인 듯 보인다. 그러나 붓끝이 닿을 때마다 묘한 의문이 밀려온다.
과연 이 복원된 선이 옛 화가가 그리던 그 선일까? 아니면 지금 나의 해석과 손길이 스며든 새로운 무엇일까?
완성에 대한 강박은 오히려 작품 본연의 생명력을 옭아맨다. 오래된 그림 속 한 구석에 희미하게 남은 스케치의 흔적이 오히려 더 생생하게 다가온다. 그 선은 마치 화가의 숨소리와 맥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반간에 비단 같은 대 몇 줄기,
한 점의 붓끝에 만 가지 생명이로다.
줄기를 그리되 마음속 대를 그리지 말고,
붓을 들 때마다 이미 대가 있도다.*
정판교, <죽석> 중에서
이 시구는 그림을 그리는 이의 마음속에 이미 완전한 대나무의 형상이 자리 잡고 있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러나 나는 묻고 싶다.
완전한 형상이란 정말 존재하는가?
붓을 들기 전의 그 순수한 이미지는 붓이 캔버스에 닿는 순간 변형되기 시작하지 않는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수많은 해부학 스케치와 기계 설계도들은 결코 완성되지 못한 채 남아 있다. 그 속에는 지식의 경계를 뚫고자 했던 탐구의 열정, 끝없는 시행착오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미완성의 스케치들은 오히려 그가 완성품에 담지 못한 사고의 생생한 궤적을 보여준다. 완성은 하나의 결과물이지만, 미완성은 그 속에 무수한 가능성의 씨앗을 숨기고 있는 열린 창조의 장이다.
미경산수도
반쯤 드러난 산엔
구름 안개 빛깔
끊어진 다리 난간 없구나
붓은 벼루 위에 걸려 있건만
비어 있는 경치는 스스로 하늘로 완성하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작가가 죽을 때까지 수정과 증보를 멈추지 않은 미완성의 대명사다.
그 방대한 원고 더미 속 문장들은 끊임없이 갈고 닦이고, 뒤엉키고, 새로 태어났다.
완성에 대한 집착보다는 ‘찾아서’라는 행위자체, 그 끝없는 기억 탐색과 언어에 대한 고뇌가 작품의 진정한 힘이다.
독자는 완결된 이야기보다 그 복잡다단하게 얽힌 문장들 속에서 작가가 자신의 내면 깊숙이 내려가 ‘진짜’ 시간을 포착하려 했던 고투의 흔적에 더 깊이 감동한다.
미완성은 그 자체로 하나의 존재 방식이다.
우리는 종종 미완성을 부족함이나 실패로 치부한다. 그러나 도교의 ‘무위(無爲)’나
불교의 ‘공(空)’ 사상은 오히려 비움과 미완성 속에 진정한 완전함이 스며들 수 있음을 일러준다.
완전히 채워진 그림은 오히려 답답하다.
여백이 호흡을 가능케 하고, 미완성의 지점이 관람자의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중국 산수화의 여백, 일본 전통 정원의 ‘여운(余韻)’은 그 빈 공간에 무한한 세계를 담아낸다.
완성은 닫힌 문이라면, 미완성은 활짝 열린 창이다. 그 틈새로 바람이 스며들고 새로운 빛이 비춘다.
*깊은 곳에서 솟아오른
무엇인가가
깨어진 것들을
꿈꾸게 하네
너는 나의 상처를
세어 보았지만
틀렸어
그 숫자가*
첼란의 시는 깨어진 것들, 세어지지 않는 상처들이 오히려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힘의 근원임을 암시한다. 캔버스 위의 미완성 흔적, 버려진 스케치, 수정의 자국들은 실패의 증거가 아니다.
그것들은 창조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균열이며, 그 틈새를 통해 보이지 않던 깊은 진실의 빛이 스민다. 완성된 작품은 그 빛을 고정시키고 포장해버릴 위험이 있다.
화실 한켠에 기대어 나는 빈 캔버스를 바라본다. 흰 면은 무수한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다.
붓을 들면 그 순수한 공간은 필연적으로 물감과 선과 실수로 채워질 것이다.
완성의 순간이란 존재할까?
완성은 아마도 창작을 멈추는 순간일 뿐이다. 완성은 죽음의 다른 이름일지 모른다.
끝없는 탐구의 여정 자체가 예술의 본질이라면, 미완성은 그 여정이 살아 숨 쉬는 증거다.
붓을 들었다 내려놓기를 반복하는 사이,
캔버스는 나를 향해 속삭인다. 완성에의 강박에서 벗어나라고.
미완성의 순간들을 용기 있게 드러내라.
그 속에 숨겨진 무수한 경로를 신뢰하라고.
미완성의 푸름
캔버스는,
아직 자라고 있다.
한켠의 흰 땅이 아니리.
물감들은 마르지 않은 채
지평선 쪽으로 달려가고 있다.
가장 채워지지 않은 하늘이
가장 완전한 하늘이다.
그 가장자리,
흘러내린 한 방울의 푸름이
영원히 마르지 않으리.*
그림은 완성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려지는 과정 그 자체로 존재하기 위해 존재한다. 화실의 먼지가 햇빛 속에서 춤추듯, 창조의 빛은 미완성의 틈새로 스며들어 가장 생생하게 빛난다.
완성은 허상에 불과하다.
캔버스는 끝없이 채워지고 또 비워지며
영원히 준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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