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날의 초상 1

풋사랑의 기억

by 오마르 왕자

1994년 12월에 난 첫 실연이란 걸 경험하고 있었다. 쫓아다니던 L에게서 직접 '우리 그만 헤어져'란 말을 들은 것은 아니었다. L이 밤이면 밤마다 나타나는 나우누리 게시판에서 L이 같은 과의 다른 동기 S와 대화하는 내용을 보다 보면 L이 누굴 좋아하는지는 너무나 분명했고 나 역시도 여러 가지 다방면의 활동으로 L에 대한 순애보만 키우고 있던 것은 아니었던지라 문을 연 이가 문을 닫는 엔딩이 온 것뿐이었다. 유난히 뜨거웠던 여름에 강남역의 유명 빵집에서 L의 집에 전화를 걸어 만나자고 해놓고-사실 재수학원 동기를 졸라서 L의 집 전화번호를 얻고 부모님이 받을 집전화를 거는 것도 제법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농활(농촌봉사활동)을 갔다 온면서 새까맣게 탄 얼굴로 흰 면티에 청바지만 걸치고 나간 덕에(지방에서 올라온 나는 변변한 옷이 없었다!) 아마 첫인상에서 L이 실망했는지도 모른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잘 나가는 외교관의 부인인 L의 어머니가 나를 '부산촌놈'이라고 불렀던 그 기억도 사진 하나 남지 않은 그 시절 아직 사투리를 쓰던 젊은 날의 나를 누군가의 시선으로 포착한 것이니 지금에서는 소중하다.


L의 뒷모습을 처음 본 건 1학년 여름의 계절수업에서였다. 국어작문이라고 하는 수업을 마침 들을 때였고 선생님이 당연하게 내 이름을 부를 순서라고 생각해서 ‘예‘라고 대답하려는 순간 나와 이름이 거의 같은 L이 먼저 호명되었기에 난 순간 L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고 긴 생머리와 갸름한 턱선, 그리고 흰 피부를 가진 그녀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순간 멍해졌다. 국어작문 수업을 듣는 한 달 내내 난 그녀를 쳐다보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런 나의 존재를 아는지 모르는지 L은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렇지만 내가 L의 집에 전화를 걸어 만나자고 했을 때, L도 나의 이름이 낯설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관심 있다고 고백은 해놓고도 지금 생각해 보면 늘 학교에서 볼 수 있었기에 L의 집 인근이었던 강남으로 그녀를 바래다주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난 그때 과외를 하느라 주 2일은 저녁시간을 비워두어야 했고 학과 내 철학 공부 모임을 통해 이진경의 '철학과 굴뚝 청소부', 안토니오 그람시의 '옥중수고', 흄의 '인식론',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독일 이데올로기' 같은 책을 공부하고 학회원들과 매주 저녁마다 세미나를 진행하다 보니 시간을 좀처럼 내기가 어려웠다. 하숙집에서 쉬는 주말에도 전화기도 없고 그 시절 청춘들처럼 차도 없었기에 그저 인터넷 통신을 통해 나우누리 채팅방에 들어가 서로 채팅을 하는 정도로 L에 대한 나의 관심을 유지하는 정도였다.

그 시절의 나는 이제 막 수련을 끝내고 견문을 넓히고자 중원에 발을 들인 강호초출로 요즘말로 '근자감'이 넘치던 청년이었다. 그래서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해보고, 손에 닿을 것들은 모두 껴안을 태세로 여러 가지 활동을 했었다. 그렇지만 무엇이든지 배운다는 의욕은 충만했으나 실상 잘하는 게 하나도 없던 시절이기도 했다. 바둑동아리에 가입해서 공강시간마다 문화관이 있던 동아리방에 달려가 바둑을 두었고 1급 선배들의 틈에 끼여 바둑을 어깨너머로 구경하면서 18급 바둑을 넘어서기 위해 제법 동아리방 문 닫을 때까지 버티곤 했다. 그러다 보면 밥 사준다는 선배를 쫓아가 저녁부터 술을 먹기 시작해서 다음날 선배방에서 일어나 해장을 하러 가기도 했으며 바둑실력을 늘리려고 바둑서적도 사서 보고 한국기원에서 발행하던 학습지도 받으면서 나름 바둑공부도 열심히 했다. 그뿐인가. 이대 바둑 동아리와 자매결연을 맺어 서로 상호교류라는 명목으로 공식적으로 이대의 교문을 당당히 들어가 이대 바둑부 여학생들과 수담을 나누고 마치고 나면 교문 앞의 짜장면집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즐거운 기회를 놓칠세라 동아리 행사에도 열심히 참가했었다.


그러니까 결국, 연애라는 것이 정확하게 무엇이지 모르던 청년이 이상적 외모를 가진 이성에게 호감을 표시하는 행위 역시 근자감이 넘치던 내가 할 수 있는 ‘모험‘의 하나였고 가진 것이라고는 몸뚱이하나 달랑 있었던 나의 아직은 너무나 서툰 구애행위가 L에게 크게 어필이 되지도 않았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90년대는 길을 가다가 마주치는 누군가에게 커피 한잔 할 수 있을까요라고 플러팅을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시기였고 미팅이나 소개팅이 너무나 흔하던 시기였다. 누군가에게 호감을 표시하고 꾸준히 연락을 취하는 정도는 기본이었지만 손을 잡거나 포옹을 하는 그런 스킨십을 진행하려는 생각은 꿈도 꾸지 않았다. 그저 L이 나를 조금은 좋아해 주길 바라면서 먼저 나에게 만나자고 연락을 할 때까지 기다리다 제풀에 지쳐 쓰러졌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적극적으로 들이대는 게 그다지 내키지 않았던 나도 연말이 다가오면서 크리스마스가 가까이 왔을 무렵에도 연하장 하나 보내줄 여자 친구가 없다는 것에 초조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존재에 대한 미약한 시그널에도 불구하고 응답이 없는 L의 무관심에 지친 탓인지는 모르지만 2학기가 끝나갈 무렵 한 학기 동안의 ‘여사친’ 역할을 해주었던 L과 L도 모르는 이별식을 진행하였고 그렇게 그 해의 겨울은 새로운 인연을 기대하는 시간을 예비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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