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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어러, 수원과 공주 지역 개척 선교사

전도하다가 입은 부상으로 45세에 순교

by 신재천

윌벅 스웨어러 선교사(서원보, 1871~1916)는 수원과 공주를 포함한 서울 남부 지역에 복음을 전했다.

전도 활동 중 일본인에게 부상당한 후유증으로 45세에 순교하였다.

그는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에서 태어나, 엘리커스 대학교와 드루 신학교를 졸업하였다. 2년 동안 뉴욕 신학교에서 연구과정을 수료한 후 한국 선교를 지원하였다.


그는 1898년 4월 북 감리회 선교사로서 서울에 도착했다. 내한 후 배재 학당과 삼문 출판사에서 사역을 시작했는데, 그해 8월 감리회 연례 회의에서 서울 남부 지역을 담당하도록 하여 경기도 및 충청도 지역에 복음을 전하였다.


그는 1898년 11월부터 1900년까지 스크랜턴의 안식년으로 인해 서울 상동 교회를 담임하였고, 1899년 천안 지령리 교회(현재 천안 매봉교회, 유관순이 어릴 때 다닌 곳)에서 세례를 준 기록이 있다.


그가 담당하는 서울 남부 지역 중 수원과 공주는 지방 유지들의 반발로 복음이 전해지지 못한 지역이었다. 그는 수원을 두 차례 방문하며 전도 방법을 강구했다.


1899년 5월 서울 상동교회 성도 3~4명을 수원으로 이주시켜 신앙공동체를 시작했다. 한차례 어려움(예배당 부지 매입했으나 유지의 반대로 김동현 전도사가 수감)을 겪은 후 1901년 수원 북수동에 초가집을 매입하고 예배당으로 사용하면서 수원읍 교회(수원 종로 교회)가 시작되었다.


예배 시작과 동시에 교회에서 학생들을 모아서 공부했는데 이것이 삼일 학교와 삼일 여학교 (매향 여학교)의 시작이었다. 두 학교는 수원 유지들과 선교사(스크랜턴 여사가 매향 여학교를 후원하고 베크 선교사가 삼일 학교 지원)의 협력이 있었고, 1903년부터 버딕 선교사가 수원에 부임하면서 학교는 더욱 발전하였다.


* 버딕(변조전, Burdick) 선교사는 1903년 내한하여 수원 종로교회를 담임하였으며, 1908년 초대 수원 지방 감리사가 되어 이 지역 복음화에 기여하였다.


공주 지역은 1902년 가을에 선교사 사택과 교회 부지를 마련하고 한국인 사역자를 먼저 파송하여, 1903년 공주읍 교회 (공주 제일 교회)가 시작되었다. 그해 7월 의료 선교사 맥길(맥우원)이 합류하면서 성도가 늘어났고, 1904년 샤프 선교사가 합류하면서 더욱 성장했다.


* 사프 선교사는 1903년 내한하여 1904년부터 공주에서 사역하였다. 공주 인근 지역까지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하다가 1907년 시골 상엿집에서 비를 피하기 위해 머물다가 장티푸스에 전염되어 순교하였다. 부인 엘리스 사프 (사에리시)는 한국에 남아 공주 영명 여학교를 설립하였고, 유관순을 양딸로 양육했다.


스웨어러에 대한 일화가 남아있다. 스크랜턴은 스웨어러가 내한 전인 1893년부터 서울 남부 지역을 순회전도하여 오산 장지내 교회, 이천 덕들 교회, 시흥 무지내 교회 등을 개척하였다. 그 결과로 1902년 6월 시흥 무지내 교회의 봉헌예배를 참석하기 위해 아펜젤러와 스웨어러는 함께 자전거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이동 중 일본인에게 러시아 첩보원으로 오해받아 장작용 땔감나무로 머리를 맞아 두 사람 모두 피투성이가 되는 부상을 입었다. 급히 병원으로 옮겨 치료가 되었지만 스웨어러는 이때 몸이 많이 상하였다. 아펜젤러는 이때 부상으로 목포 가는 배편을 변경하였는데, 변경된 배편을 타고 가다 순직하고 말았다. 그 후 시흥 무지내 교회를 아펜젤러 기념 교회로도 명명한다.


1903년 5월부터 스웨어러는 감리회의 서울 담당 목사로 선임되어 서울 소재 전체 감리교회를 관할하게 되었다. 자신은 아현교회를 담임하였고, 협력목사로 상동교회는 전덕기, 정동 제일교회는 최병헌 목사가 사역했다.


1905년부터 공주지방 전임 선교사로 전도활동과 육영사업에 전념하였다. 1906년 음성에 음성 감리교회를 설립하였고, 1907년 공주에서 사경회를 실시하였다.

공주 사경회에는 평양 부흥을 경험한 사역자들이 와서 설교하면서 공주에서도 많은 성도들에게 자신의 죄를 자복하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다.


그는 1907년 공주에서 뇌질환으로 쓰러졌다. 그 후 회복되었지만 의사의 휴식을 권고에도 불구하고 사역을 지속하였다. 건강을 돌보지 않고 사역하던 그는 1912년 건강이 많이 악화되어 고향으로 귀국하였고, 1916년 9월 45세의 젊은 나이로 미국 피츠버그에서 소천하였다.


그의 부인은 1906년 공주 선교사로 부임한 메이 샤톡이다. 그녀는 공주 영명여학교 교장으로 1929년까지 헌신하였고 1940년 귀국하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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