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크, 신학 잡지 및 성경 출판을 통한 문서선교
일제 만행을 미국 의회에 알린 선교사
베크 선교사(백서암, 1866~1927)는 20년간 삼문 출판사를 운영하고 감리회 신학 잡지를 발간했다. 또한 미국 성서공회에서 성경 번역 및 출판 활동을 전개하였다. 귀국 후 일제 만행을 미국 의회에 알린 선교사이다.
그는 1898년 6월 북 감리회 선교사로 입국하여 삼문 출판사 책임자로 사역을 시작하였다. 전임자인 콥 선교사가 아내 건강 문제로 조기 귀국하여 후임자가 된 것이다. 이듬해 미이미 교회 출판사로 이름을 바꾸고 성서 및 전도 문서 등 출판 활동을 강화하였다.
그는 1903년부터 1918년까지 감리회 연회 서기로 활동하며 선교 활동을 기록하였는데, 당시 러일전쟁과 물가 인상 등 위기가 많았는데 하나님이 어떻게 채워주었는지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1904년 맏아들이 사망하여 그를 기념하기 위하여 공옥 소학교에 재정을 후원하여 학교 운영을 정상화되도록 하였다. 또한 인천 영화 학교, 수원 삼일 학교와 삼일 여학교에도 재정을 후원했다.
* 공옥 소학교는 1899년부터 서울 상동교회 내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재정 문제로 지지부진하다가 1904년 베크 목사의 재정 후원으로 별도 집을 건축하여 학교로 발전하였다.
그는 1904년 감리회 신학 잡지인 《 The Korean Methodist 》를 간행하였다. 이 잡지는 선교사의 활동을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 1905년까지 발행하고, 이후에는 장로교 신학 잡지와 통합하여 연합 잡지인 《 The Korean Mission Field 》로 발행되었다.
그는 1911년부터 미국 성서 공회 총무로 활동하였다. 성서공회는 1907년부터 영국과 미국 선교사 간 불화로 나누어 운영되었는데, 벙커 선교사에 이어 베크가 미국 성서공회 총무로 일한 것이다.
그는 종로에 성서 공회 건물을 신축하고 성경 번역, 출판 사업을 조직적으로 추진했다. 그 후 1919년 영국과 미국 성서공회 두 개가 통합되고, 영국이 성서공회 업무를 담당토록 결정되었다. 그 결정에 따라 베크는 1919년 4월에 자신의 업무를 영국 성서공회에 인계하였다.
그리고 1919년 미국으로 돌아갔다. 당시 언더우드, 쿤스, 크램 등 많은 선교사들이 일본의 탄압과 박해를 전 세계에 알리는 활동을 하였는데, 베크도 귀국 후 3.1 운동과 일본의 만행을 사진으로 증거를 제출하며 상원 의원에게 알려, 미국 국회에서 거론되도록 하였다. 그의 저서로는 1916년 저술한 《백년락도》가 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