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어슨, 성진에 복음 전하고 독립운동에 협력
성진 보신 여학교 및 제동 병원 설립에 기여
로버트 그리어슨 선교사(구예선, 1868~1965)는 함경도 성진 선교부를 개설하고 복음을 전하였다. 또한 보신 학교와 보신 여학교를 세워 학생들을 교육했으며, 제동 병원 설립에 협력하였다. 특히 3.1 운동에 적극 협력하여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그는 1868년 캐나다 노바스코샤 주 핼리팩스에서 태어났다. 1890년 댈하우지 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파인힐 신학교 및 장로교 신학부를 1898년 졸업하였다. 졸업한 그해 레나 베노잇(Lena Venoit)과 결혼하고 목사 안수 받았다.
그는 1898년 9월 아내와 함께 캐나다 장로교 정식 선교사로 입국하였다. 소래에서 순교한 매켄지 선교사의 영향으로 캐나다 선교회에서 정식으로 파견된 최초 5인 선교사 중 한 사람이다.
* 캐나다 선교회에서 최초로 정식 파견한 5인 선교사는 푸트 부부, 그리어슨 부부 및 맥래 선교사이다.
그는 서울 도착 후 한국어를 배우면서 황해도 소래를 방문하여 순교한 최초 캐나다 선교사인 맥켄지의 선교 현장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1899년 2월 캐나다 선교구역인 원산으로 이동하였다. 그 후 1900년 항구 도시인 성진에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선교부 설립을 건의하였고 1901년 자신도 성진으로 이동하였다.
* 성진은 함경북도 소재한 김책시의 항구 지역을 지칭한다.
그는 성진에서 가옥을 마련하고 예배를 시작했는데 이것이 성진 교회의 시작이다. 이후 성도가 증가하여 1901년 예배당을 설립했는데, 목수인 그의 부친(존 그리어슨)이 한국에 와서 예배당을 건축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또한 성진에 학교를 세워 기독교 인재를 양성하기 시작했다. 1903년 보신 학교와 협신 중학교를 세웠고, 이 땅을 떠나는 1935년까지 교장으로 재직하며 학생들을 교육했다. 그의 부인 레나 베노잇은 1907년 보신 여학교를 세워 여학생들에게도 교육을 실시했다.
* 협신 중학교는 1910년 일제에 의해 폐교되자, 학생을 함흥 영생 중학교로 보내어 합병했다.
1902년에는 언더우드 등 여러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의료 선교사 맥밀란을 도와서 제동 병원을 세우는 일에 협력하였다. 제동 병원은 함경도 일대에서 유일하게 수술이 가능한 병원이었기에 많은 환자들이 몰려들었다.
* 맥밀란은 1901년 내한하여 함흥 제혜 병원과 성진 제동 병원을 설립하여 환자를 돌보았고, 그 후 머레이 여의사가 이어받아 30여 년간 환자를 치료하였다.
또한 북간도, 연해주 등에 순회 전도활동을 진행하여 북방 선교를 개척하였다. 1903년 블라디보스톡을 방문하여 한인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1909년 재방문하여 성경공부를 가르쳤다. 1906년에는 용정을 방문하여 예배당을 마련하고 1907년 럽 선교사를 파송했다. 그 후 캐나다 선교부는 회령과 용정에 선교부를 설치하고, 바커와 맥도널드 선교사를 연이어 파송했다.
그의 에피소드는 일본군 병사를 혼내준 이야기가 있다. 1908년 성도의 결혼식에 참석하러 갔다가 일본군이 자신의 말을 무자비하게 다루는 것을 보고 격분하여 일본군 병사에게 채찍을 휘둘러 부상당하게 만든 것이다. 이후 그리어슨은 병사의 상관에게 다시 항의하고 사과를 받아냈다.
1909년 민족 운동가 이동휘가 함께 일할 것을 제안하여 그를 매서인(성경 판매자)로 임명하고 해방운동을 하도록 도와서 일제의 감시를 피할 수 있게 했다. 1914년 이동휘가 국외로 망명할 때 도움을 주었다.
1919년 3.1 운동에는 독립만세를 위한 회합 장소로 자신의 집을 제공하고, 주일에는 독립에 대한 희망의 설교를 하였다. 또한 당시 만세운동으로 부상자가 속출하자 이들을 치료하였다. 또한 옥고를 치르는 성진 교회 교인들을 위로하기 위해 교회 종을 오랫동안 치게 했다.
그는 1935년 68세로 선교사 직을 퇴임하고 캐나다로 돌아갔다. 토론토에서 마지막 여생을 보내다가 1965년에 98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한국 정부는 1968년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했다. 그의 선교 이야기는 2014년 그의 딸 도리스 그리어슨에 의해 <조선을 향한 머나먼 여정>으로 책이 발간되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