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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래, 함흥시에 복음을 전한 개척 선교사

영생 학교 설립 및 독립운동에도 적극 협력

by 신재천

던컨 맥래 선교사(마구례, 1869~1949)는 함경남도 함흥에 선교지부를 개설하고 함경도 일대에 많은 교회를 개척하였다. 영생 학교와 영생 여학교를 세워 인재를 양성했으며, 민족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협력한 선교사이다.


그는 1868년 캐나다 노바스코샤 주 케이프 브레튼에서 태어나서 달하우지 대학과 장로교 신학 대학을 졸업했다. 그는 매켄지 선교사의 순교 이야기를 듣고 자신도 한국 선교를 결심했다.


캐나다 선교부에 한국 선교사로 지원했으나 이미 그리어슨과 푸트 목사가 결정되었고, 더 이상 재정적인 여유가 없어 파송이 불가하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래서 그는 학생선교 협회의 3년간 재정 약속 편지를 동봉한 후에 파송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는 열정적으로 한국 선교를 희망한 것이다.


그는 1898년 9월 캐나다 장로교 정식 선교사로 입국하였다. 매켄지 선교사의 순교 후 소래 지역 주민의 간절한 요청에 의해 파견된 캐나다 최초 5인 선교사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서울 도착 후 가장 먼저 황해도 소래를 방문하여 맥켄지의 선교 현장을 둘러보았다. 이때 서경조 목사가 동행하여 안내하였다.


1899년 2월 캐나다 선교구역인 원산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그해 5월 함흥을 처음 방문하여 3주간 머물면서 선교를 준비했다. 당시 함흥은 관북 지역 최대 도시로서 자립정신이 강했고, 특히 외국인에게 매우 배타적인 도시여서 사역에 어려움이 많은 도시였다.


그는 함흥 사역을 준비하던 중에 1900년 요코하마에서 사랑하는 연인 에디스와 결혼하였다. 에디스가 2년 늦게 한국에 와서 결혼이 늦어진 것이다.


그의 전도활동으로 함흥에 복음의 씨앗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으며, 러일 전쟁을 계기로 복음의 빗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1904년에 함흥 선교부가 설치되었고, 이후 교회 설립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06년 여의사 맥밀란이 합류하여 제혜 병원을 함께 설립했고, 1907년에는 영(Lutter L.Young)이 파견되어 그의 사역을 도왔다.


그의 아내 에디스는 1903년 신사라의 집에서 여성 6명으로 학교를 시작했는데, 영생 여학교가 되었다. 그 후 1907년 맥래는 영생 학교를 설립하여 남자 학생들도 가르치기 시작했다. 두 학교는 관북 지역 최고 명문학교로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그러나 민족운동에 가담하였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폐교되었다. 그 후 남한으로 피난 내려온 동문들은 수원에 영생 고등학교를 세워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는 1908년 함남 북청군에 신창 교회를 설립하였고 교회 성도가 증가하여 많은 지교회들을 세웠다. 그는 건축과 농축산 일에 대해서도 한국인에게 지도하였다. 1918년에는 함흥에 YMCA를 창설하여 초대 회장으로 일하면서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일에 앞장섰다.


맥래의 에피소드는 석왕사 주지 스님인 이호재를 전도한 이야기이다. 휴양을 위해 경치가 좋은 사찰인 석왕사에 방문하였을 때 맥래 부부는 스님과 3주의 시간을 보냈다. 그때 맥래의 복음 이야기를 들은 주지 스님이 <예수님이 진정한 왕>이라고 고백하고 광석동 교회에 등록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남은 재산을 광석동 교회에 헌금하여 신규 지역의 교회 개척에 사용토록 하였다.


그는 일제의 염전세 및 토지 가로채기 행위 등 불합리한 만행을 본국에 보고했으며, < 함흥에서의 무서운 대량학살 >이라는 제목으로 대한 매일신문에 폭로하며 민족운동에도 많은 협력을 하였다.


그는 1937년 38년을 헌신한 한국 선교 활동을 마감하고 68세의 나이로 귀국하였다. 그리고 고국 캐나다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49년 노바스코샤에서 소천하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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