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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웰, 평양 기홀병원 설립 및 25년 헌신

그러나 말년에 선교사 직을 면직당한 선교사

by 신재천

더글러스 폴웰 선교사(보웰)는 평양에서 기홀병원을 설립하고 초대 원장으로 25년간 헌신하였다. 그러나 선교 말년에 면직 결정되고 선교사에서 제명되어 안타까움을 남긴다.

그는 1894년 미국에서 메리 해리스와 결혼하고, 1895년 12월 북 감리회 선교사로 내한하였다. 먼저 서울에서 한국 문화에 적응하고 1896년 5월 평양에 부임하였다. 평양에서 순교한 제임스 홀의 후임 의사가 된 것이다.


* 부인 메리 해리스는 1891년 독신으로 내한하여 활동했다. 그 후 미국에 돌아가서 폴웰과 결혼 후 다시 한국에 돌아왔다. 그녀는 평양에서 1899년부터 정의 여학교를 운영하였다. 그녀는 서울 동대문 부인 병원과 평양 광혜여원에서 의사로 헌신하다 5년 만에 순교한 릴리스 해리스(동대문 해리스 기념병원의 주인공)의 언니이다.


*평양 정의 여학교는 1899년 매티 노블(윌리엄 노블 선교사 부인)이 평양 수옥리에 설립하였으나 병으로 인하여 학교를 사직하여, 메리 해리스가 이어받아 학생을 모집하고 교육을 시작하였다.


1897년 2월 홀 부인(로제타 홀)의 적극적인 후원 활동에 힘입어 그는 기홀병원(홀 기념 병원)을 완공하고 환자를 돌보기 시작했다. 첫해 3천 명의 환자를 치료하였고, 먼 지방에서도 환자들이 몰려와서 많은 환자가 방문했다고 전해진다.


1915년 증가하는 환자로 인해 병원 건물을 증축하여 환자를 수용하였다. 그는 평양 기홀 병원의 원장으로서 25년 사역하며 환자들을 돌보며 헌신한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폴웰은 선교사 말년이 좋지 않게 끝났다. 1920년 10월 지진 사퇴서를 제출하였고, 감리회에서 유죄 면직 결정이 내려진 것이다.


그의 면직 이유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당시 일부 선교사가 상업적 비즈니스에 관여하여 물의를 일으킨 사례가 있었기에 이에 연관될 수 있겠다고 추정할 뿐이다. 그는 면직 후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부산에서 개인적인 비즈니스 했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이후 그의 삶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그의 아들 에드워드 폴웰(1900~2006)은 평양에서 태어난 후 12세에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하여 화학자로서 살았다. 그러나 평생 고향 나라인 한국을 그리워하였다. 그래서 미국에서 코리안 클럽을 결성하였고, 퇴직자 모임에서 한복과 갓을 쓰고 한국에 대해 강의하였다. 또한 Mr. Ping이라는 자동차 번호판을 사용하여 한국에 대한 애착을 나타냈다. Ping은 평양(중국어로 핑양)을 의미하는 약어이다.


에드워드폴웰은 2006년 106세로 별세하면서 유언으로 그의 유골을 한국에 뿌려달라고 하여, 임진강에 뿌려졌다. 그의 이야기는 <Mr. Ping>으로 언론에 게재되어 세상에 알려졌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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