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스, 춘천 및 강원도 복음화의 선구자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복음을 펼친 선교사
제이콥 로버트 무스 선교사(무야곱, 1864~1928)는 최초로 강원도에서 거주하며. 춘천 등 강원도 북부 지역에 복음을 전한 선교사이다. 춘천 중앙교회, 원주 제일 교회를 설립하는 등 25년간 한국에서 복음을 전하였다.
그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농촌에서 태어나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을 거쳐 1892년 트리니티 대학 신학부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다. 그리고 1893년 매그놀리아 덜함과 결혼하고 선교를 준비하였다.
1899년 남 감리회 선교사로 파송받아 한국에 왔다. 한국 도착 후 서울 광희문 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하였다. 동시에 그는 양주 등 강원도 북부 지방으로 순회 전도하여 1900년 양주 신산 감리교회 설립하였다. 1899년 남 감리회가 창설될 때 감리사로 시무하였고, 그 후 연회 회장도 두 차례 역임하였다.
1900년 남 감리회는 원산 구역과 북한강 구역(춘천 등)으로 나누면서, 무스에게 북한강 구역을 맡게 하였다. 그래서 1901년부터 춘천에 구역회를 조직하고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순회 전도하였다.
이때 남양주 월산교회 등을 방문하고 설교하였다.
1905년에는 원주를 방문하여 원주에서 최초 교회인 원주읍 교회(현 원주 제일 교회)를 설립하였다.
* 월산교회는 1899년 하디가 시작한 교회로서 무스가 방문하여 활성화하였다.
* 원주 제일 교회는 1905년 무스가 6명의 성도들과 예배한 것이 시작이었다. 1906년 원주가 북 장로교 선교구역으로 할당되어 클락이 순회 협력했으며, 1909년 다시 북 감리회 구역으로 변경되어 데밍 선교사에 의해 운영되었다. 그 후 1910년부터 노블 선교사가 맡아서 한국인 권신일 목사를 담임으로 선정하면서 교회가 안정적으로 운영되었다.
1904년 춘천은 독립 선교부가 되었고, 1907년 춘천 선교부를 개설하고 봉의산 일대에 3만 5천 평의 부지를 확보하여 선교사 거주 주택을 건축했다. 이때 무스는 1908년 9월 춘천으로 이사하여, 강원도에 거주하는 최초 외국인 선교사가 되었다. 이때 조사 이덕수와 함께 춘천으로 와서 1907년 춘천 중앙교회를 설립하였다. 그 후 양구, 홍천 등 강원도 북부지방으로 복음을 전했다.
* 이덕수는 임진강변 고랑포 태생으로 원래 술과 노름으로 살던 못된 사람이었으나, 회심 후 복음 전하는 조사가 되었다. 그 후 1902년 무스 선교사의 요청에 의해 함께 춘천으로 이사하여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하는 전도사가 되었다. 아쉽게도 1909년, 춘천 온 지 7년 만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춘천 신동면 교회 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무스는 1917년 병으로 일시 귀국했다가 1921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철원에서 1924년까지 사역하였다. 그러나 1924년 지병이 악화되어 귀국하였다. 4년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그린스보로에서 거주하다가 1928년 8월 소천하였다.
그가 소천하자 크리스천 헤럴드 신문은 <무스 형제보다 더 헌신적인 선교사는 없을 것이다,-중략- 우리는 청중을 향해 설교하는 그의 목소리를 들어왔다. 그것은 범상한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것이었다.>라고 회고했다.
그는 온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한 선교사였다. 뛰어난 설교자이며 웅변가였으며 글을 잘 썼으며, 또한 가정적이고 동료들과도 유대가 깊었다고 전해진다.
1911년 그의 사역 이야기를 《한국 시골 이야기, Village life in Korea 》책으로 출간했는데, 사장되어 있다가 그의 외증손자에 의해 2008년 한국어로 번역되어 《1900, 조선에서 살다》로 재출간되었다. 이 책에는 당시 조선 시골의 삶의 이야기와 사진이 많이 포함되어 있어 역사적 자료로서 가치가 높다.
부인 매그놀리아 덜함(1867~1952)은 그린스보로 여대를 졸업하고 선교사 꿈을 가졌는데 남편을 만나 그녀의 꿈을 펼쳤다. 그녀는 1909년 9월 춘천에 학교를 설립하여 학생들을 가르쳤다. 먼저 남학교를 설립하여 <한영지서원>으로 발전하여 춘천 최초 학교가 되었고, 여학교는 기숙 형태로 운영하였는데, 정명여학교가 되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