져다인, 원산과 개성의 회개 운동의 부흥강사로 활동
차분하지만 강력한 설교로 회개를 이끌어낸 선교사
죠셉 저다인 선교사(1870~1950)는 원산에서 평양으로 이어지는 회개 대각성 운동을 이끌었다. 부흥사로서 각 지역을 방문하며 회개 운동에 불을 지폈고, YMCA 회장 및 성서공회 회장으로서 한국 교회 부흥에 기여하였다.
그는 1870년 미국 앨라바마 주 픽켄스에서 태어나 조지아 대학교와 메이콘 대학교를 졸업했다. 그 후 조지아 주 엡윗청년회 회장으로 활동하다가 1902년 조지아 연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 후 남 감리회에서 한국 선교사로 파송받아 1902년 11월 서울에 도착했다. 그는 1903년부터 3년간 원산과 개성에서 하디와 함께 부흥 운동을 이끌었다. 이 부흥 운동을 통해 1907년 평양 대부흥회로 발전된 것이다.
그는 조용하고 차분한 방법으로 성경 본문을 중심으로 설교하여 강력한 성령의 일하심이 나타났다. 1906년부터는 개성에서 부흥 운동을 이끌었다. 그는 원산 개성 평양으로 이어진 부흥 운동의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1908년부터 서울에서 사역하며 일본이 위조한 105인 사건으로 기독교인들이 감옥에서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조속한 석방을 위해 활동하였다. 그는 법대를 공부한 경험으로 변론한 것이다.
그 후 1909년 남 감리회 한국 선교회 연회장으로 1년간 헌신하였고, 1910년부터 13년까지 YMCA 3대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11년 성서 회관 건립을 위한 정초식에서 성서위원회 위원장 역할을 하였고, 1915에서 1919년까지 대한 성서공회(기독교 서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부흥 강사로 활동하여 1912년 중앙교회 헌당식과 경성 성서학원 개강 집회에서 말씀을 전했다. 서울 YMCA 특별 집회에서도 설교했고 프레스톤의 초청으로 목포에 가서 부흥 집회를 인도하였다.
그리고 1922부터 다시 개성에서 3년간 전도활동을 하였다. 1926년부터 남 감리회와 북 감리회를 통합하기 위한 기성 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26년~1936년까지 10년간 감신대 교수로 헌신하였다.
1937년 미국으로 돌아가서 조지아 주에 거주하다가 1939년 선교사 직을 은퇴하고, 1950년 3월 플로리다 주 크레센트에서 소천하였다. 현재 양화진에는 1915년 11월에 태어나서 하루를 살고 숨진 그의 아들 조셉이 안장되어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