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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재천 Mar 27. 2024

크램, 개성 개척 선교사로서 부흥 운동의 선구자

코리아 매거진 발행 및 개성 미리흠 여학교 설립을 주도

윌라드 크램 선교사(기의남, 1875~1967)는 개성을 중심으로 부흥 운동을 일으킨 선교사로서 개성 선교를 개척하고, 강원도 북부 지방에 복음을 전하였다. 일선 전도활동과 문서 사역에 매진하였고 감리회 감독으로도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그는 미국 켄터키 도우튼에서 태어나 1898년 애즈버리 대학을 졸업하고 신학박사취득했다. 그리고 1902년 남 감리회 연회에서 목사 안수받고 한국 선교사로 파송받았다.


그는 1902년 11월 남 감리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강원도 철원, 금화, 금성 지역 감리사가 되어 농촌 지역 복음화를 위해 애를 썼다. 그 후 1905년 및 1906년에는 개성 북부교회에 시무하며 한국인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 교회 성도들이 돈 대신 성미(쌀)를 교회에 헌납한 기록이 있다.


그는 개성에서 대부흥 운동이 일어날 때 부흥 집회를 인도했다. 그는 하디의 원산 사역을 이어받아 개성을 부흥시켰다. 그는 설교에서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강조하고, 중생과 성령 증거의 삶을 전파하였다. 죄의 자각, 회개, 그리스도의 보혈, 성령의 능력과 충만, 말씀 순종을 통한 평안과 기쁨 등 웨슬리안 부흥운동을 주장했다.


1906년 4월 개성에 미리흠 여학교(Mary Helm School)를 시작했다. 이 학교는 크램의 부인이 개성에 있는 선교사 주택 내에서 8명의 10대 과부들을 모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 그 기원이 된다. 그 후 한옥을 한 채 구입하여 기혼 여성까지 모아서 교육을 실시하였다. 또한 그는 1913년 개성에서 한영서원(현 인천 송도고등학교)의 2대 교장으로 6년간 봉직했다.


* 한영서원은 1906년 윤치호가 설립하여 초대교장을 역임한 학교로서 후임으로 크렘 선교사가 헌신했다.


그는 1905년 9월 장로교와 감리회의 교단 통합을 위한 <대한 복음주의 선교부 통합 공의회> 설립자 대표 회의에 참여하였고, <남 감리회 선교회> 제9대(1905년) 및 제20대(1916년) 연회장을 역임하였다. 1912년에는 YMCA 학생 수련회에 참석하여 학생들을 지도하였다. 1913년 3월 일본 도쿄에서 YMCA 주관 유학생 크리스천 집회에 이승만이 강연할 때 동행하기도 하였다.


그는 문서 선교에도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1915년 12월 창간된 기독신보(The Christian Messenger)의 편집인으로 활동했고, 1917년 1월부터 1919년 4월까지는 코리아 매거진을 창간하여 월간으로 발행했다. 이 잡지는 한국 문화, 관습, 역사 등을 수록하여 선교사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 코리아 매거진은 감리교 선교사 크램, 베크, 노블과 장로교 선교사 게일의 참여로 1917년 간행되었으며, 서울 YMCA 인쇄소에서 인쇄되었다. 선교사들이 현장에서 터득한 지식을 공유하기 위해 한국의 언어와 역사, 문화 등을 다루었다. 이 잡지는 3·1 운동 직후 1919년 4월 제3권 4호를 끝으로 폐간되었다.


그는 1922년 57세 때 미국으로 돌아갔다. 미국에서 1926년부터 1940년까지 남 감리회 해외선교부 총무로 활동하면서 한국 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후원했다. 이 기간 중 1930년 남. 북 감리회가 통합할 때 미국 선교본부의 대표로서 내한하였다.


그는 1930년에 <Methodism and Kingdom Extension> 책을 미국에서 발간하였는데 이 책에서 원산 대부흥 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기술하고 있다.


그 후 1944년 은퇴하였으며, 1969년 10월 92세의 일기로 테네시 주 내슈빌에서 소천했다. 양화진에는 2살의 나이로 사망한 그의 아들 뉴턴(1903~05)이 묻혀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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