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텔, 내한 2년 만에 순직한 안동 최초 선교사
부인 캐더린은 안동에 풍금 제공 등 음악 보급에 기여
체이스 소텔 선교사(사우대, 1881~1909)는 28세 내한하여 사역 2년 만에 장티푸스에 걸려 순직한 선교사이다. 그는 안동 선교부에 최초로 와서 안동 선교의 기틀을 만들었다.
그는 오하마 장로교 신학교 졸업하고, 1907년 9월 북 장로교 선교사로 부인 캐더린과 함께 내한하였다. 당시 그는 26세, 부인은 23세의 어린 나이였다.
소텔 선교사는 180Cm의 큰 키였으며, 다재다능하여 사택이나 건물 수리를 잘하였고, 동산병원에 물을 공급하는 작은 풍차를 만들었다고 전한다.
그는 대구 선교부에 소속되어 대구에 머물면서 한국 문화와 언어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1908년 경북 북부지방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안동 선교부가 개설되면서, 최초 안동 주재 선교사로 선정되어 1908년 12월에 안동으로 이동하였다. 최초 언동 지역 선교사가 된 것이다.
그는 먼저 거주할 주택을 구입하여 선교부 사무실로 활용했다. 이곳은 현재 안동교회 부지 안에 있는 교육관 터이다.
그는 성경 공부반을 운영하였는데 7일 동안 150명이 참석하였다고 전한다. 그리고 참여한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낮에는 전도, 밤에는 집회를 하여 성도가 나날이 증가했다.
그의 복음 전도 방식은 전도, 양육, 파송의 절차로 진행되었다.
그 후 1909년 8월 한국인 성도 8명이 자발적으로 모여 첫 예배를 드렸는데 이것이 안동교회의 시작이었다. 이후 안동 교회는 급격히 성장하였는데, 소텔 선교사의 활동이 씨앗이 된 것이다.
그때 원주에서 사역하던 웰번 선교사가 1909년 9월 안동으로 오게 되어 복음 전도가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웰번 선교사는 예양 협정에 따라 자신이 섬기던 강원도 지역은 감리회 구역이 되어 안동으로 이동하였다) 소텔 선교사는 북쪽 지역을 맡고, 서쪽은 웰번 선교사가 맡았다.
그러나 구역을 분할하여 순회 정도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소텔은 장티푸스에 걸리고 말았다. 지방 순회 전도를 위해 길을 떠난 지 10일 만에 병에 걸려 대구 병원으로 이송하였다. 그는 젊었기에 병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가마를 타지 않고 조랑말을 타고 대구로 이동하여, 이동 중 여러 차례 말에 떨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대구의 병원에서 치료를 하여 회복 중에 있었으나, 순직하기 2일 전부터 병이 위중해져서 결국 1909년 11월, 28세의 젊은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안동 선교를 위한 최초 순교자가 된 것이다. 그의 죽음이 밀알이 되어 후임 선교사들에 의해 안동 지역의 복음이 크게 확장되었다.
그는 동산병원 내 은혜의 동산에 안정되었다. 그의 아내 캐더린 맥클렁은 남편의 묘비에 다음과 같이 새겼습니다. <나는 조선인을 사랑하겠노라(I am going to love them)> 그의 조선인에 대한 사랑이 표현된 문구이다.
캐더린은 대구에서 몇 년을 더 사역하다가, 1912년 딸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안동 교회에 최초로 풍금을 기증하여 지역의 음악 보급에 기여했다. 소텔 선교사 후임으로 그녀의 언니 부부인 존 크로더스 (권찬영)와 엘라 맥클렁(권애라) 부부가 안동에 부임하여 그들의 선교를 이어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