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펜젤러 이 땅에 밀알이 되다.

목포 성경 모임에 가다가 침몰한 배에서 순교

by 신재천

헨리 아펜젤러 선교사는(1858~1902) 북감리회 선교사로서 1885년 4월 5일 인천항에 입국하여 17년간 한국 복음화를 위해 사역하다가 순교하였다.


그는 1884년 뉴저지 드류 신학교를 졸업한 후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엘라 닷지와 결혼하고 한국선교의 길로 나섰다. 그가 한국 선교사로 온 동기는 3가지로 설명되고 있다. 첫째는 신학교 재학 시절 전국신학교 연합집회에서 한국 선교사의 사명을 깨달았고 둘째는 그리피스가 쓴 <은둔의 나라 조선> 책을 읽고 결심했고 셋째는 미국 잡지에 실린 이수정의 기사를 보고 한국 선교를 결심했다.


아펜젤러가 인천에 도착할 때 갑신정변으로 전국이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잠시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6월 20일 재입국하였다. 그의 처음에는 교육 사역을 시작했다.

1885년 8월 배재학당을 설립하여 14년간 교장으로 헌신했다. 서재필, 윤치호, 이승만, 주시경 등 독립운동가와 목회자를 육성한 것이다.


그리고 1887년 10월 4명의 성도와 함께 정동제일교회를 시작하였고, 10년 만에 붉은 벽돌의 벧엘 예배당을 건립하였다. 또한 지역 전도 활동을 전개하여 인천 내리 교회, 제물포교회를 설립하였다.


또한 성서번역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여 기독교 소책자 및 그리스도 신문 발간에 참여하였고 한국 최초로 삼문 출판사를 설립하여(올링거 선교사와 함께) 인쇄를 가능하도록 했다. 성경 번역위원으로 활동하고 대한 기독교서회 회장을 역임하며 성경 번역 활동에 기여했다. 독립운동에도 적극 지원하여 독립신문을 발간하는 일에 협력하였다.


1902년 6월 11일 아펜젤러는 목포에서 열리는 성경 번역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인천에서 목포로 가는 도중 구마가와마루호(400톤 규모의 선박)가 충돌하여 침몰하면서 순교했다. 사고 당시 1층 1등실에 있어 탈출 가능하였으나 지하 3층에 있던 정신여고 학생과 통역을 구하려고 배 안으로 들어가서 결국 나오지 못하고 순교했다. 그의 시신은 찾지 못하고 양화진에 비문만 세워졌다.


그의 순교를 기념하여 서천과 군산에 아펜젤러 기념관이 건립되어 운영되고 있다. 서천 아펜젤러 기념관은 아펜젤러가 탄 배가 침몰한 어청도에서 가장 가까운 육지가 서천 지방이라서 여기에 건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펜젤러는 여성 및 가난한 자를 사랑했다. 그의 일화로서 콜레라 유행 시절 죽어가는 여자 아이를 집에 들여 죽을 때까지 살피고 장례를 치러 준 것이 기록에 남아있다.


그의 후손으로 아펜젤러의 아들 내외 및 딸도 한국에서 선교사로 헌신한 후 양화진 묘역 부친의 묘소 옆에 안장되어 있다. 딸 엘리스 아펜젤러는 미국에서 공부 후 이화여대 학장으로 재직했고 1950년 이화여대 강단에서 설교하다가 순교하였고, 아들 헨리 D 아펜젤러는 20년간 배재학당 교장을 역임했다.


아펜젤러의 묘비에는 그가 처음 제물포에 도착하여 드린 기도문이 적혀 있다. <우리는 부활절에 이곳에 왔습니다. 그날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주께서 이 백성을 얽어맨 결박을 끊으사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유와 빛을 주옵서서. >


이펜젤러는 한 알의 밀알에 되어 이 땅에 떨어져 죽은 것이다. 예수그리스도를 모르고 죽어가는 이 민족에게 빛을 비추소서. 그의 기도소리가 귓가에 쟁쟁하게 들리는 둣 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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