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스크랜턴,여성 선교사의 대모

아들 따라 한국까지 온 어머니 선교사

by 신재천

메리 스크랜턴(1832~1909)은 1885년 5월 1일 아들 윌리엄 스크랜튼 부부와 함께 53세의 나이로 서울에 왔다.


스크랜튼 대부인은 미국 뉴헤이븐에서 청교도 목사 집안의 장녀로 태어나 선교사의 꿈이 있었으나, 사업가와 결혼으로 인해 실행하지 못했다. 40세에 남편과 사별한 후 여성해외선교회에서 활동하며 선교를 후원했다. 그러던 중 아들 윌리엄이 장티푸스로 고생할 때 간호하면서 <치료가 되면 미지의 나라에서 선교로 헌신하겠다>고 하나님께 서원하였는데 이것이 그녀의 선교 동기이다.

그 후 아들이 병에서 회복되고 그녀는 여성 해외선교부로부터 교육선교사로 임명받고 한국에 왔다. 아들보다 2달 먼저 선교사 파송 명령을 받은 것이다.


그녀는 1886년 5월 한국 최초 여학교인 이화학당을 설립하여 1892년까지 활동하였다. 영어를 배우기 위해 그의 집에 찾아온 여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 학교의 시작이었다. 또한 주일학교를 만들어 여성에게 성경교육을 가르쳤다. 1894년 아들이 운영하던 정동병원이 상동으로 이전 시 공옥 여학교를 설립하여 아이들을 가르쳤다. 또한 상동교회에서 전도부인을 대상으로 단기 성경공부를 실시하였는데 이것이 1920년대 협성 여자신학교로 발전하였다. 여기서 교육받은 전도부인 9명이 년 2만 명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녀는 전도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여 1892년에는 동대문 지역 전도 활동에 참여하고, 1894년에는 수원과 오산, 1896년에는 시흥, 과천, 고양 등에서 전도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1년 무지내 여학교, 덕고개 여자매일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쳤고, 1902년 수원 삼일학교 설립 및 1906년 서울 진명여학교 설립에 기여하였다. 1907년에는 상동교회 내 공옥 여학교 등 4개 학교를 감독하였다. 그녀는 왕성하게 활동하여 《한국의 노부인으로 불렸다.


1909년 10월 의사 아들의 극진한 간호에서 불구하고 75세로 소천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그녀는 한국 감리회에서 어머니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였고, 평생 한국 여성의 교육과 불평등 사회 개선을 위해 헌신하였다. 그녀의 장례식에는 많은 시민이 슬퍼하였고, 운구 행렬을 따르는 인파가 8km까지 행렬이 이어졌다.


그녀는 당시 53세, 비교적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선교를 시작하여 23년간 한국 여성 교육의 대부인으로 호칭되며 위대한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였다. 현시대 중장년 선교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모범이 된다. 양화진 그녀의 비문에는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오늘 이 땅에 자유 사랑 평화의 여성 교육이 열매 맺으니, 이는 스크랜튼 여사가 이화동산에 씨 뿌렸기 때문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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