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헤론, 양화진 묘원에 최초 안장된 의료 선교사
여름 휴가 기간에 환자를 돌보다가 순교
존 헤론 선교사(1856~1890)는 1884년 4월 미국 북 장로교 선교사로 최초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출발은 1885년 초순이고 또 일본에서 2달간 머물면서 지체되었다. 당시 한국은 갑신정변으로 불안정한 정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1885년 6월 21일 한국에 도착했는데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보다 늦게 도착하게 된 것이다.
그가 일본에 머무는 동안 이수정(초기 한글 성경 번역한 인물)으로부터 한글을 배웠다.
헤론은 영국에서 태어나 14살에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하였고, 테네시 의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인재였다. 그는 졸업과 동시에 대학 교수의 딸인 해리엇 깁슨과 결혼하고 한국으로 파송되었다. 선교 동기는 부흥회 참석 시 <이제 준비가 되었으니 미지의 땅으로 가라>는 성령의 음성을 들었으며, 이수정의 조선 선교사 요청의 글을 잡지에서 읽고 결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미국 선교회에서 활동하는 장모의 열성에 감복한 것도 영향을 받은 것으로 술회하고 있다.
그는 서울 도착 후 제중원에서 사역을 시작하며 알렌을 도왔다. 그 후 알렌이 외교관직으로 변경하고 미국으로 돌어간 1887년부터 2대 제중원 원장으로 사역하였다. 그는 고종의 시의로서 그리고 가난한 백성을 돌보는 의사로서 헌신하였다. 당시 이질, 장티푸스, 천연두 등 전염병이 유행하던 시기여서 많은 환자가 발생하였으며, 헤론은 서울 및 지방을 순회하며 환자를 돌보았다.
그는 문서 선교에도 관심을 보여 성서번역위원회 활동에 참여하였다. 대한기독교서회 창설을 주도한 4인 중에 한 명이며, 호주장로교와 연합 공회 설립 시 회장을 역임하여 교단 연합사업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그러나 1890년 여름 환자를 돌보다가 자신도 이질에 걸려 발병 3주 만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당시 무더운 여름이어서 선교사들이 남한산성으로 피서하는 시기에 헤론은 휴가 일정을 줄여서 환자를 돌보다가 무리한 것이다.
동료 의사인 스크랜턴이 최선을 다해 치료했지만 결국 회복하지 못했다.
1890년 7월 28일, 한국 선교 활동 5년 만에 34세의 젊은 나이로 순교하여 동료 선교사와 한국인들을 안타깝게 하였다. 그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남한산성 휴양지에서 밤새도록 가마 타고 집으로 돌아온 부인과 두 딸을 옆에 두고 <한국과 한국인을 더 뜨겁게 사랑하고 싶소>라고 말한다. 또한 병원에게 함께 일하던 조선인들을 부르게 하고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믿으십시오>라고 복음을 전하고 임종하였다.
헤론의 갑작스러운 순교로 인해 시신을 묻을 곳이 없었다. 당시 관례로서 외국인은 제물포에 묻었으나 거리가 너무 멀었기에 헤론의 집 뜰 혹은 미국 공사관 경내에 묻고자 하였으나 한국인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결국 선교사들은 고종에게 선교사 묘지를 요청하여 마포 양화진 땅을 하사 받았고, 헤론의 시신은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양화진 나루터 언덕의 묘지에 묻혔다. 이것이 양화진 선교 묘지의 시작이다.
그가 순교한 후 친구인 언더우드는 안식년 휴가차 미국으로 가서 교회와 학교 선교부를 방문하여 한국의 복음화 상황과 의사 선교사가 필요함을 알린다. 이때 반응한 사람이 에버슨 선교사(세브란스병원 설립자)이다. 하나님은 헤론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시고 에버슨으로 연결하신 것이다. 헤론의 죽음이 한국 선교의 밀알이 된 것이다. 양화진 그의 묘비에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사 자신을 내게 주셨다(갈 2:20)>는 성경문구가 기록되어 그의 한국 헌신을 전해주고 있다.
헤론의 부인과 두 딸은 한국에서 지속적으로 거주하며 헌신하였다. 부인 해리엇은 남편의 순교 2년 만에 평소 가깝게 지내던 청년 선교사 게일의 구애를 받고 재혼하였다. 그녀는 3세 연하인 게일 선교사(천민 사역, 연동교회 시무)의 원산 사역을 도우면서 두 딸을 키웠다. 그녀는 1908년 48세에 폐렴으로 소천하여 전 남편인 헤론의 묘소 옆에 안장되어 있다. 2019년부터 연세대학교 임상의학연구센터에는 헤론을 기념하는 기념관이 개관되어 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