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앨러스, 초기 한국 여성 교육을 위해 헌신
의료에서 교육 선교사로 변신, 정신여고 초대 교장
애니 앨러스 선교사(1860~1938)는 1960년 목사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미국 일리노이 주 록포드 대학을 졸업하고 보스턴 대학에서 의학 공부하며 이란 선교를 준비하던 학생이었다. 그때 한국에 여의사가 필요하다는 북장로교 선교부의 제안을 받고 한국 선교를 결심했다.
아직 졸업을 위해서는 한 학기를 남긴 상태였으나 긴급히 여의사를 요청하는 한국 상황에 따라 2년만 근무하는 조건으로 한국에 파송되었다. 이렇게 26세에 한국에 온 그녀는 평생 이 땅의 선교사가 되었다.
그녀는 1886년 7월 북장로교 소속의 5명의 선교사와 함께 내한했다. 5명은 한국 정부가 요청한 교육 선교사 3명(벙커, 홀버트, 길모어)과 여성 2명(길모어 부인, 앨러스)이다.
서울에 도착 후 제중원에서 여성을 위한 부인과를 담당했는데 이것이 최초 여성 의료 선교사의 시작이었다. 당시 남자 의사들은 여성의 몸에 대한 진찰을 금기시하였기에 그녀는 명성 왕후의 시의가 되어 처음으로 왕후의 가슴에 청진기를 대고 진찰한 의사가 되었다.
1888년 왕후를 치료한 공로로 정 2품인 정경부인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의대에 재학 중 파견되었기에 의사 자격을 취득하지 못하였다. 헤론에 의해 의사 자격 문제가 부각되면서 제중원의 여성 진료는 1888년 파견된 릴리아스 호튼에게 인계하였다.
그녀는 1887년 함께 내한한 벙커 선교사와 결혼하고, 여성 교육 활동에 주력하여 정신 여학당의 시초가 되었다. 1887년 6월에 고아인 5살 여자아이를 정동에 있는 그녀의 집에서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 정신여고의 시작이다.
앨러스가 정신여고를 시작한 동기는 경신학교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언더우드가 설립한 경신학교에 고아 몇 명이 들어왔는데, 목욕을 시키다가 그중에 한 명이 남장한 여자 아이인 것이 발견되어 앨러스 집에 거주하면서 교육을 받도록 한 것이 정신 여학당의 시작이다. 그 후 학생 수가 증가하고 학교로 인가받으면서 현재의 정신여고로 발전한 것이다. 이 학교를 통해 김마리아(2.8 독립선언 및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주도), 김필례 (YWCA 창립자) 등 우수한 여성 인재가 배출되었다
1894년 남편 벙커가 운영하던 육영공원이 폐교당했다. 이때 아펜젤러의 요청으로 배재학당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그래서 엘러스도 남편과 함께 배재학당으로 이동하여 교사로서 활동하였다. 소속 교단도 남편과 함께 배재학당의 소속인 감리회로 변경하였고 출석 교회도 정동제일교회로 이동하였다. 그녀는 교회를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였고, 교회 내 여선교회를 조직하여 체계적으로 선교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1922년 12월 YWCA 창설에도 남편과 함께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YWCA 건물 확보를 위한 모금 운동에 앞장섰으며 자신의 집을 팔아서 헌금한 기록이 남아있다. 당시 YWCA는 어렵고 힘든 여성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역할을 하였다.
1926년 남편인 벙커 선교사의 퇴직으로 그녀도 함께 선교사 직을 내려놓고 미국 샌디에이고로 돌아갔다. 1932년 남편이 소천하면서 <한국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남김으로 인해 그녀는 유골을 안고 1933년 내한하여 남편을 양화진에 안장하였다. 그 후 잠시 살던 한국의 주택을 팔아 배재학당 장학금, YWCA , 감리회 총리원 등에 기부하였다. 1937년 다시 내한하여 잠시 소래에 머물다가 1938년 10월 서울 정동 그레이하우스에서 소천하여 양화진 남편의 묘소 옆에 안장되었다.
그녀는 평생 불쌍한 조선 여인들의 무거운 짐을 가볍게 해주는 일에 헌신하였으며, 조선의 여성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것>이라고 말했다.(1907년 선교 심포지엄에서 언급) 그녀의 묘비에는 <하나님을 믿자, 바르게 살자, 이웃을 사랑하자>라는 정신여고의 교육 이념이 새겨져 있다. 현재 그녀를 기념하는 좌상이 정신여고 교정에 설치되어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