벙커, 한국 근대 교육에 앞장선 선교사

한성 감옥에 수감 중인 이승만을 전도

by 신재천

달젤 벙커 선교사(1853~1932)는 40년간 우리나라 근대 교육의 선구자로서 활동하며 한국인의 교육을 위해 헌신했다.


그는 1886년 7월 정부가 요청한 교육 선교사로 내한했다. 그는 미국 오하이오주 오벌린 대학을 졸업하고 뉴욕 유니언 신학교에 다니던 중 한국의 교사 초빙에 응답한 것이다. 그는 유니언 신학교에서 선발된 세 명의 선교사 중(헐버트, 길모어, 벙커) 한 사람이 되었다.


그가 한국으로 오는 길에는 5명의 동행이 있었다. 3명의 교육 선교사 외 2명의 여자 선교사(길모어 부인, 여의사 애니 엘러스)가 있었는데 이때 동행한 앨러스와 1887년 결혼하게 된다.

서울 도착 후 조선 최초 국영학교인 육영공원에서 교사로서 고관 자제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그러나 6년 만에 육영공원이 재정난으로 어려움을 당하여 다른 선교사들이 이동할 때 혼자서 끝까지 학교를 지켰으나 결국 1894년 육영공원이 폐교되고 말았다.


그는 아펜젤러가 운영하던 배재학당에서 교사로 요청되어 그곳에서 학생을 계속해서 가르쳤다. 1902년 아펜젤러가 순교함에 따라 그가 교장이 되어 10년간 수행하였고, 1912년 제자인 신흥우에게 인계하였다. 토론식 교육을 도입하고, 물리학, 화학, 수학 과목을 학과에 포함시켰다.


또한 배재학당 재직 시 독립협회 인사들과 교류하며 민중 계몽 운동과 독립활동에 적극 협력하였다. 1899년 만민공동회 운동으로 고종 폐위 사건에 휘말려 독립협회 요원들이 한성감옥에 수감되었을 때, 동료 선교사들 (언더우드, 게일, 헐버트 등)과 함께 감옥을 방문하여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는 부인과 함께 매 주일 감옥을 방문하여 성경을 가르쳤다. 이때 이상재, 이승만 등 다수의 애국지사가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상재 선생은 옥중에서 벙커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승만은 성경을 읽던 중 죄가 없음에도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처지가 감옥에 있는 자신의 처지와 동일함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감방이 빛으로 가득 채워지고 마음에 평안이 깃드는 체험을 가진다. 그 후 이승만은 함께 수감된 애국지사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함께 성경을 공부하는 기독교인이 된 것이다.


또한 그는 복음 전도자로서 1890년 한국성교서회에 창립위원으로 활동하고, 1896년 이후에는 동대문교회를 사역하며 서울 동부지역의 복음화에 주력하였다. 1900년대 초에는 아펜젤러의 순교, 스크랜턴의 사임 등으로 어려움을 겪던 감리교의 구심점의 역할을 하였다. 그는 당초 미국 정부에서 파견되었으나 1895년부터 감리교단이 운영하는 배재학당에서 근무하면서 북감리교로 소속을 옮겼기 때문이다.


1905년 6월에는 장로교와 감리교의 연합 사업에도 적극 참여하고 선교부 공의회(미국성서 공의회)의 한국지부 총무(회장은 장로교 언더우드)를 맡아 성서 반포 사업에도 적극 참여했다. 1910년 동대문 교회 건축 시 벙커 선교사가 미국에서 종탑을 제작하여 가져왔고 이것이 미감리회의 한국 선교 25주년 기념종이 되었다.


1926년 40년의 한국 선교 생활을 마감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샌디에고에서 거주하다가 1932년 79세의 일기로 소천하였다. <나의 유골이나마 한국 땅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부인이 유골을 가져와서 1933년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6년 후 부인 애니 엘러스도 소천하여 함께 양화진에 묻혀있다. 벙커 선교사의 묘비에는 <날이 새이고 흑암이 물러갈 때까지>(아가서 4:6) 말씀이 새겨져 우리에게 그의 마음을 전하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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